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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6)화 (176/394)

176화

  

성벽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생활의 흔적이 곳곳마다 남아 있었고, 조금만 걸어가도 숨어 있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A급 12.35%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처음 나타난 고블린 종족을 포함해서 등장하는 몬스터의 등급이 모두 A급이라는 것이다.

SS급인 천사연과 하태헌, S급인 이주하가 있는 데다 힐러가 20명이나 되는 클리어팀 입장에서는 쉬워도 너무 쉬웠다. 그래서인지 쉴 새 없이 몬스터를 마주쳐도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동이 튼 아침, 휴식을 끝내고 다시 움직이기 위해 뒷정리를 하는 팀원들을 한번 둘러본 이주하가 하태헌에게 다가갔다.

“게이트 내부와 밤낮 차이가 없으니까… 바깥도 지금쯤 나흘째 아침일 거야. 슬슬 게이트 출구가 나와 줘야 하는데.”

“레퀴엠의 SS급 게이트처럼 출구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긴 한데…. 지금까지 몬스터가 A급만 나온 걸 보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을 가능성이 커.”

워낙에 랜덤이라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한숨과 함께 덧붙인 말에 하태헌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게이트 이상 현상이 보이거나 하진 않으니, 큰 문제 없이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휴, 그래. 고민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니까.”

억지로 미소 지은 이주하가 준비를 끝냈다는 보고를 듣고 먼저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을 잠시간 바라보던 하태헌도 곧 몸을 돌려 자리를 찾아갔다.

“그러더니 웬 다친 여자를 데려와서 치료하라고 막 성질을….”

“어머. 그래요?”

어느새 친해진 도하석과 민아린은 클리어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하태헌이 들으라는 듯이 과장을 섞은 도하석의 얘기에 민아린이 아주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태헌 씨가 저렇게 점잖아 보여도 사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타입이라서요.”

“그러시구나.”

“닥쳐라.”

듣다 못한 하태헌이 한마디 하며 끼어들었지만, 어딘가 비슷한 웃음을 만면에 가득 채운 도하석과 민아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떠들었다.

“하긴. 우리 마스터도 요즘은 좀 잠잠하지만, 예전에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막 길드로 차인 여자가 찾아와서 난동 부리기도 하고.”

“오, 들어 본 것 같습니다. 하태헌 씨나 천사연 마스터나 나쁜 남자들이네요.”

“그렇네요~.”

민아린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하태헌에게 묘한 시선을 보냈다. 약간의 의심이 담긴 그 눈빛은 한이결을 향한 하태헌의 감정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

하태헌은 당장이라도 그 사람들과 한이결은 다르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아 냈다. 이 상황에 먼저 나서서 말해 봤자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근데 하태헌 씨도 천사연 마스터처럼 누구 안 만난 지 꽤 됐죠? 다친 사람 구해 오는 것도 저번에 그 A급 능력자가 마지막이었고.”

“A급이라면… 설마 한이결 능력자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은 레퀴엠에서 지낸다고 하던데, 민아린 씨도 아는 사이인가요?”

슬쩍 하태헌을 곁눈질한 민아린이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엄청 친해요.”

“오, 그래요? 잘 지내시나요? 저야 하태헌 씨가 한번 데려왔던 이후로 만난 적은 없지만, 뉴스로 소식은 자주 들었습니다.”

“…잘 지내요. 하석 씨가 이결 씨를 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하하, 아주 잠깐 본 거라 한이결 씨는 아마 절 기억 못 할 겁니다.”

아무래도 저 둘을 떼어 놔야 할 것 같은데. 하태헌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앞에서 한 길드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게이트 출구입니다!”

팀원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들자 정말로 게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계단 꼭대기,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부서진 바로크 양식 건축물 앞이었다.

그 누구보다 근심이 깊었던 이주하의 입가에 이제야 진심 어린 웃음이 지어졌다. 모두가 안심하며 게이트 출구를 향해 이동하려는데, 저 멀리 공중에서 날카로운 괴성이 울려 퍼졌다.

끼아아아악―!

거대한 박쥐 날개와 기다란 목에 용의 머리를 가진 몬스터 수십 마리가 떼로 날아왔다.

“와이번!”

“와이번입니다!”

“동쪽에서도 몰려옵니다!”

사방에서 와이번 떼가 몰려들었다. 잠시 당황하던 이주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비전투팀, 중앙으로 모이고 근접팀이 지켜. 원거리팀은 날 따라서 바깥으로!”

빠른 속도로 공중을 날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와이번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 중 하나였다. 최대한 가까이 오기 전에 원거리 공격으로 격추해야 했다.

이주하의 명령대로 팀이 금방 대형을 갖췄다. 거대한 롱보우를 든 사람부터 날카롭게 벼려진 부메랑을 장착한 사람 등 원거리에 특화된 능력자들이 이주하와 함께 나섰다.

끼에엑!

크악, 키이익!

하늘이 어디 하나 비는 곳 없이 와이번으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원거리팀의 공격을 직격타로 맞은 와이번 몇이 아래로 떨어졌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조심해!”

“끄아악!”

순식간에 날아온 북쪽 와이번 떼가 근접팀과 비전투팀을 덮쳤다. 거대한 발톱이 도망치는 이들을 거칠게 밀쳐 냈다. 근접 능력자 몇이 그 공격에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마스터, 실드가 통하지 않아서…!”

“S급 와이번입니다!”

“건물 밑으로 이동해! 비전투팀을 지켜!”

귀를 찌르는 와이번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함께 어우러져 주변이 정신없이 혼란스러워졌다. 근접팀이 이끄는 대로 대피한 비전투팀은 숨 돌릴 틈 없이 다친 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태헌!”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힐러에게 입을 쩍 벌리는 와이번의 목을 단번에 베어 낸 하태헌이 그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불에 감싸진 화려한 검을 든 천사연이 제게로 날아오는 와이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능력으로 발판을 만들어.”

“뭐?”

하태헌의 답은 듣지 않은 채로 와이번의 발톱에 매달린 천사연이 재빠른 몸놀림으로 발 위에 올라서서 검을 휘둘렀다.

끼이이익!

불룩 튀어나온 가슴 중앙을 제대로 찔린 와이번이 피를 쏟아 내며 공중에서 고꾸라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와이번의 시체를 지지대 삼아 다시 위로 날아오르는 천사연의 모습에 그제야 무슨 요구인지 이해한 하태헌이 능력을 사용했다.

다른 와이번에게 닿기에는 부족한 거리. 그 사이에 먼지가 모여들어 작은 발판을 만들었다. 그걸 정확히 밟은 천사연이 두 번째 와이번의 등에 올라타 순식간의 양 날개를 잘라 냈다.

천사연의 피가 조금이라도 묻은 와이번은 질척하게 타오르는 불을 이겨 내지 못하고 몸을 뒤틀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숫자가 많아 꾸역꾸역 모여 있는 만큼 불도 쉽게 번졌다.

선두는 원거리팀이 막고, 그들이 놓친 와이번을 천사연과 하태헌, 근접팀이 막아 냈다.

“추락 시켜! 목 아래 가슴이 약점이다!”

사용하고 있던 총을 레그 홀스터에 집어넣은 이주하가 가죽 팔찌에 끼워진 둥근 구슬 중에 가장 커다란 회색빛 구슬을 빠르게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연기와 함께 기다란 무기가 생겨났다.

RPG-7을 개조한 아이템 로켓 무기.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템을 어깨에 얹은 이주하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와이번 떼의 중앙을 노렸다.

쿠웅!

정확히 날아간 유탄이 와이번과 부딪히며 강한 폭발과 함께 불꽃이 확 터져 나왔다. 투둑, 툭. 폭발에 휩쓸린 와이번의 찢어진 시체가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

어쩐 일인지, 눈을 뜨자마자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항상 맑은 날씨에 따듯하던 장소였는데 갑자기 비라니.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매만졌다. 약간 거칠어진 피부가 손바닥에 와 닿았다.

갈수록 꿈을 꾸는 것이 힘겨웠다. 이번이… 8번째인가. 엊그제 엘로힘이 찾아왔을 때가 7번째였으니까.

고작 이틀이 지난 일인데도 멀게만 느껴졌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한 번 꿀 때마다 시간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고, 잠을 오래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몸이 지쳐 갔다.

협탁에 놓인 시계로 오후 2시를 확인한 나는 잠든 지 고작 5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에서는 사흘을 꼬박 있었는데. 그 긴 시간이 고작 5시간이었다니.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씻고 방을 나섰다. 어제는 엘로힘과 엘라하 모두 바쁜지 만날 수 없었는데, 오늘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어두운 분위기인 신전 내부를 둘러보다 우울한 기분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다른 건 몰라도 끼니만큼은 놓치지 않고 챙겨 주는 엘로힘과 엘라하니만큼 이번에도 역시나 식탁 위는 여러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따듯한 기운이 남아 있는 수프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언제 일어날지도 다 알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이렇게 매번 식지 않게 준비해 놓을 수 있는 거지.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의자에 앉아 수프를 괜히 휘휘 젓는데, 귀에 익은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피이.

여우였다. 언제 온 건지 꼬리를 살랑이며 날 올려다보는 여우를 발견하자 어쩐지 반가움이 밀려왔다. 이 적막 속에서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었다.

피익.

여우는 식탁 위로 올려 달라는 듯이 계속 울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결국 여우를 가볍게 안아 들어 식탁 위에 내려 주었다.

“너 날 수 있잖아.”

괜히 한번 투덜거리는데도 녀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음식 여기저기에 얼굴을 들이밀며 킁킁거렸다. 그런 여우에게 딸기를 하나 주며 정면에 있는 TV를 틀었다.

[오늘 새벽, 새로 나타난 D45 구역 게이트 앞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국내외 통틀어 근 10년 동안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이례적인 사건이며…….]

“……?”

그저 귀가 심심해서 틀어 두려고 한 거였는데. 아나운서가 전하는 심상치 않은 내용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면이 전환되고 회색빛 CCTV 영상이 틀어졌다. 영상은 게이트 입구 앞까지 불안한 걸음걸이로 다가간 한 남자가 폭탄처럼 터지는 장면을 보여 줬다.

[평범한 남자의 모습을 한 저것은 실제 사람이 아닌 폭탄입니다. 현재 사고를 수습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사상자와 부상자의 숫자는 계속 늘 것으로 보입니다.]

폭탄이 터지자마자 화면은 다시 아나운서로 전환됐지만, 설명만으로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폭탄이 터진 후, 아수라장이 된 저곳에 신원이 불분명한 단체가 나타났습니다. 모두 검은 가면을 쓴 이들로, 수가 서른에 달합니다. 그들은 모두 망설임 없이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무슨…….”

[뒤늦게 소식을 들은 로헌 길드는 지원 인력을 모집하여 게이트로 진입했으나 6시간이라는 차이가 생겨…….]

검은 가면을 쓴 자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저 게이트에는 하태헌이….

“세현아.”

“……!”

충격적인 사실에 넋을 놓고 굳어 버린 나를 부르는 엘로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며 엘로힘을 바라보자 그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구나.”

“엘…….”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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