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5)화 (175/394)
  • 175화 

    붉은 책이 널려 있는 서재 중앙, 엘라하가 공중에 뜬 채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 옆에 앉아서 붉은 책을 읽던 엘로힘은 엘라하가 기록을 잠시 멈췄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어때?”

    “지금은 괜찮기는 한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한 엘라하가 제 앞에 떠 있는 펼쳐진 책을 바라봤다. 아직 색을 정하지 못한 이 책은 펼쳐진 페이지의 절반 정도가 채워져 있었다.

    “끝은 아직 모르겠어.”

    “천사연, 그 아이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긴 한데… 이번 흐름은 그 녀석도 처음이라 그런지 불안해 보여.”

    “음…….”

    “엘.”

    엘라하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이번 충돌의 끝이 위험하다면….”

    “그럼 이겨 낼 방법을 찾아야지. 대가를 치러서라도.”

    단호하게 답한 엘로힘이 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계속 봐 줘. 나는 세현이한테 가 볼 테니.”

    “…알겠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엘라하가 다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페이지에 저절로 글씨가 써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엘로힘은 곧 등을 돌렸다.

    피이이.

    “음?”

    육중한 서재 문이 열리자마자 부드러운 무언가가 제 발목을 툭툭 두드려 왔다. 새하얀 아이 중 하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이런. 무슨 일이니?”

    다정하게 묻자 이번에는 바짓단을 이빨로 물고는 낑낑거리며 잡아당긴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행동에 엘로힘이 의아한 것도 잠시, 곧 뜻을 이해하고 손을 뻗었다.

    “그래. 만나러 가자, 여우야.”

    권세현이 지어 준 이름과 함께 아이를 안아 든 엘로힘이 조금 급한 걸음으로 신전 첫 번째 방으로 향했다.

    끼익, 작은 소리를 내며 열린 문틈 사이로 어두운 방이 드러났다. 커다란 침대 위로 몸을 작게 웅크린 채 헐떡거리는 한이결이 보였다.

    “세현아.”

    한걸음에 침대맡으로 다가간 엘로힘이 부드러운 손길로 식은땀에 젖은 한이결의 이마를 매만졌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 위로 내려온 여우도 꼬리를 살랑이며 피이,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흐으… 헉…….”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한이결은 엘로힘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몸을 뒤틀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밑으로 식은땀에 젖은 창백한 뺨과 목덜미가 드러났다.

    엘로힘은 고통스러운 꿈에 짓눌려 헐떡거리는 한이결을 안타깝게 응시하면서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사탕의 힘으로 찾아온 꿈은 아무리 그라 해도 섣불리 끝낼 수 없었다. 걱정된다고 괜히 억지로 깨웠다가는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엘로힘은 응원하듯 한이결의 얼굴을 계속 어루만지며 묵묵히 곁을 지켰다. 반쯤 열린 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선 그에게 짙은 그림자가 졌다.

    힘이 들어간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꿈속을 헤매던 한이결이 한참 뒤에야 눈을 떴다.

    느릿하게 들어 올린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무척이나 흐릿했다. 깜빡이는 행동에 맞춰 눈꼬리 끝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세현아.”

    “…….”

    조용한 부름에 넋을 놓고 천장만 바라보던 한이결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읏…!”

    엘로힘을 발견한 한이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눈앞의 상대가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허겁지겁 기듯이 침대 안쪽으로 물러선 그는 경계 어린 얼굴로 엘로힘을 노려봤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놀란 여우가 꼬리를 바짝 세웠다.

    “…….”

    거절당한 손을 잠시간 내려다보던 엘로힘은 천천히 한 발짝 물러서서 한이결이 진정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아…….”

    다행히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한이결이 방 내부를 둘러보고 꿈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친 숨을 푹 내쉬며 두 눈을 비볐다.

    “엘.”

    “그래.”

    한이결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거라.”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에 한이결이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엘로힘의 금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그의 생각을 들은 엘로힘이 가는 발목을 한 손으로 붙잡아 강하게 잡아당겼다. 윽!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이 쭉 끌려온 한이결이 당황한 얼굴로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땀을 좀 흘렸다고 내가 불쾌할 리가 있겠니.”

    “그래도…….”

    “괜찮단다.”

    확실히 평소보다 그의 체향이 좀 더 짙었다. 푹신한 침대 위로 손을 짚고 몸을 숙인 엘로힘이 한이결의 목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제 귀와 목덜미를 스치는 은빛의 긴 머리카락에 한이결이 어깨를 흠칫 좁혔다.

    “이번이 몇 번째지?”

    “7번째였습니다.”

    “힘든 꿈이었니?”

    “…아뇨, 그냥… 조금….”

    웬만해서는 본인이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이결은 이번에도 역시나 얼버무리기만 했다.

    엘로힘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둠 너머로 한이결이 떠올리고 있는 생각이 짤막하게 나타났다. 그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꿈으로 마주하고 심하게 우울한 상태였다.

    노란 장판 바닥 위를 뒹구는 피 묻은 칼, 누군가의 고함, 어둠 속에서 이빨을 드러낸 뱀.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한이결은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여전히 그 속에 갇혀 있었다.

    잠시간 그것들을 보던 엘로힘이 눈을 뜨고 한이결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쿵쿵, 가파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엘?”

    “앞으로도 계속 꿈을 꿔야 할 텐데, 많이 힘겨워 보이는구나.”

    “어쩔 수 없죠.”

    “조금만 더 버티렴. 그래도 7번이나 채웠더니 기운이 확실히 짙어졌구나.”

    “그렇습니까?”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댄 채로 말하는 엘로힘의 행동 때문에 숨결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 간질간질한 감각에 한이결이 이불을 그러쥐며 은근슬쩍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엘로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설명했다.

    “남은 기간에 몇 번의 꿈이 더 찾아올지는 모르겠다만, 이 정도 속도면 나쁘지 않다.”

    “예에….”

    “네가 고민하는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거란다, 세현아. 꿈이 느리게 온다고 안달 낼 필요는 전혀 없어.”

    한이결이 긴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상체를 다시 일으킨 엘로힘이 담백하게 웃으며 물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이대로는 더 잘 수 없을 것 같구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엘로힘이 있던 자리는 잽싸게 다가온 여우가 차지했다. 반쯤 누운 한이결의 배 위로 앞발을 척 올린 여우가 풍성한 꼬리를 살랑였다.

    “술이라도 한잔하는 건?”

    여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귀와 목을 어색하게 쓸어 만지던 한이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이 있습니까?”

    “물론이지. 다만 적포도주밖에 없단다.”

    적포도주. 그 단어에 한이결이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좋긴 하지만, 많이 마시면 또 취할 수도 있으니까…….’

    잔뜩 마시고 취해서 푹 자고 싶다는 욕구를 억지로 누른 한이결이 엘로힘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대답했다.

    “한 잔 정도라면….”

    “그래. 준비해 놓을 테니 씻고 나오렴.”

    마지막으로 그의 볼을 툭 매만진 엘로힘이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한이결은 아직도 제 배를 받침대 삼아 서 있는 여우를 번쩍 들어 안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익!

    처음으로 그의 품에 안긴 여우가 놓으라는 듯이 손을 약하게 깨물어 왔다. 본인이 먼저 다가와서 치댔으면서. 한이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여우를 놔주었다.

    ***

    새로 나타난 D45 구역 게이트 입구로 클리어팀이 들어간 지 나흘이 지났다. 입구 주변엔 언제 나올지 모르는 클리어팀을 기다리는 몇몇 방송국 관계자들과 로헌 길드 직원들이 대기했다.

    혹시 몰라 쳐 놓은 안전선 근처를 지루한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던 김지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는 로헌 관리 부서 직원으로, 클리어팀에 속해 있는 측정 능력자가 게이트 진행 내내 적은 기록지를 곧바로 넘겨받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커피 마실래?”

    물론 혼자서 24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같은 부서 직원들과 3교대로 돌아가며 지켰다.

    새벽의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막 떠오르는 이른 시각, 잠에서 깨어나 텐트 밖으로 나온 직원이 내민 종이컵을 김지호가 받아 들었다. 뜨거운 김과 함께 올라오는 커피 믹스 향이 진하게 맡아졌다.

    “근데 30분 뒤면 잘 텐데, 커피 마셔도 괜찮겠어?”

    “괜찮아, 괜찮아. 이거라도 마셔야 그 남은 30분을 버티지. 지금 머리만 기대면 바로 잠들 것 같아.”

    “엄살은.”

    손을 휘휘 저으며 하는 말에 직원이 가볍게 웃었다. 후룩, 뜨거운 커피를 조심히 마시던 김지호의 시선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

    검은 모자 위로 겉에 걸친 점퍼 모자까지 깊게 눌러쓴 장신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게이트 근처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불안한 걸음걸이에 눈길을 뺏긴 김지호는 한참을 남자만 바라보다 옆에 서 있는 동료의 팔을 툭툭 쳤다.

    “이봐. 저기 저 남자 보여?”

    “엉?”

    “아무리 봐도 일반인 같지 않아? 술이라도 마셨나 본데.”

    그제야 뒤를 돌아본 직원이 김지호와 같은 곳을 보고는 턱수염이 삐죽삐죽 돋은 입가를 긁적였다.

    “글쎄. 내가 보기엔 그 뭐야, 방송국 쪽 사람 같은데. 오늘 N 채널 놈들 온다며. 거기 PD 아냐?”

    “그런가?”

    “그래. 맨날 저렇게 입고 다니잖아. 하이고, 음침하다. 그냥 신경 꺼.”

    김지호와 직원이 떠드는 와중에도 남자는 쉬지 않고 걸어와 어느새 안전선 앞까지 도달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를 다시 본 김지호는 모자 아래로 드러난 피부가 거의 회색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챘다.

    째깍째깍.

    그것뿐만 아니라 묘한 소리까지 들려왔다. 뭐지? 시계 초침 소리?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뒤늦게 남자를 발견한 경호원들이 급히 다가왔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김지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당장 나가 주십시오.”

    “끌어내!”

    경고에도 물러서지 않고 입을 천천히 벌리는 남자의 행동에 경호원이 팔을 붙잡았다. 그때였다.

    삐, 삐, 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지며 기괴할 정도로 커다랗게 벌어진 남자의 입 속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김지호는 뜨거운 기운과 강한 충격에 몸이 훅 밀렸다.

    콰아앙―!

    땅을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남자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이 충격에 튕겨 나가고 불이 확 번졌다. 폭발에 휩싸인 이들의 피와 비명으로 게이트 앞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