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모든 준비를 끝낸 클리어팀은 이주하를 선두로 게이트 입구를 통해 내부에 진입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널따란 초원이 펼쳐지고 정면에는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성벽 너머로는 산을 따라 지어진 건물들이 보였다. 중세 시대의 도시 하나를 통째로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내부는 멀리서 보기에도 제법 넓은 데다, 여러 건축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돌파가 쉽지 않아 보였다.
“게이트 출구는 저 안쪽에 있을 확률이 높겠어.”
그곳을 바라보며 이주하가 중얼거렸다.
어떤 몬스터가 얼마만큼 튀어나올지, 게이트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출구는 어디에 있을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 생긴 게이트 탐사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S급 검을 쥔 천사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금이야 탁 트인 장소라 뭐가 접근해 와도 바로 보이겠지만, 성벽 너머 도시로 들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좋지 않은데….’
몬스터는 별 상관없었다. 게이트에 몬스터가 나오는 건 당연하니까. 어차피 이주하와 하태헌까지 있으니 웬만하면 몬스터로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걱정하는 부분은 몬스터 따위가 아니라…….
“일단 움직입시다.”
모든 팀원이 내부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이주하가 도시를 향해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며 천사연은 하태헌의 등을 바라봤다.
초원을 가로질러 성문에 도달할 동안 시선을 떼지 않자, 잠자코 걸어가던 하태헌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먼저 물었다.
“…뭡니까?”
하태헌이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뻔히 알면서도 천사연은 모른 척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말이지?”
“용건 없으면 쳐다보지 마십시오.”
“내가? 언제?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하태헌.”
“…….”
하태헌의 매끈한 이마 위로 혈관이 툭 튀어나왔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을 하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하태헌을 즐겁게 응시하던 천사연이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말해 봤자 믿어 주지도 않을 것 아닌가?”
“웃기는군.”
듣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하태헌도 존댓말을 때려치웠다.
“내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는데.”
“있어서 나쁠 것 없는 게 사람의 신뢰이지 않나.”
“하…….”
깊은 한숨을 내쉰 하태헌이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따지듯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글쎄.”
“게이트 내부에 들어왔는데도 계속 이런 식으로 군다면, 다음은 없다.”
애당초 이번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한이결 때문이었다. 그와 지내면서 상대방을 무작정 밀어내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으니, 천사연도 한번 지켜보자는 판단이 들었다.
…그랬는데, 하루도 채 가지 않아 그 선택에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애당초 한이결과 천사연은 달라도 너무 다른 상대 아닌가. 자신의 섣부른 결정을 믿고 따라 준 이주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흉흉해지는 하태헌의 분위기에도 천사연은 여전히 느긋하게 웃었다.
“그럼 안 되지. 우리 대단하신 로헌 부마스터의 신뢰도 지킬 겸 솔직하게 대답해 드려야겠군.”
하태헌이 어디 해 보란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내가 아니야.”
새하얀 검 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린 천사연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태헌, 진심으로 충고하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뭐?”
“앞으로 이곳에서 벌어질 일들은 나조차도 알 수 없으니까.”
장난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태헌이 제대로 설명하라고 다그치려던 그때,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몬스터다!”
“7시 방향에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정찰 나갔던 길드원들이었다. 대화의 흐름이 끊긴 것을 느낀 하태헌은 혀를 차며 망설임 없이 뛰쳐나갔다.
“근접팀, 앞으로 오고 원거리팀은 뒤에서 비전투팀 호위해.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어느새 총을 꺼내 든 이주하의 명령대로 길드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잔뜩 무너져 폐허나 다름없는 돌벽과 건물들 사이로 회색빛 피부를 지닌 생명체 수십 마리가 재빠른 몸놀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캬아아악!
키아악, 카악!
몬스터는 삐쩍 마른 얼굴을 가졌으며, 커다란 눈은 동공이 뱀처럼 날카로웠다. 지나치게 기다란 두 팔과 다리로 건물 외벽을 거미처럼 기어 다니는 그들은 생김새가 고블린 종족과 아주 흡사했다.
끄륵!
이주하가 멀리 있는 몬스터의 미간 정중앙을 총으로 정확하게 쏴 맞혔다. 총소리에 맞춰 몰려오던 몬스터의 머리가 터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스터.”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본래 고블린 종족은 약한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로 몰려다녔다. 이주하가 총으로 견제해도 그 이상으로 몰려오니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지기 시작했다.
“제가 맡겠습니다.”
원거리 능력자인 이주하 앞을 막아서며 하태헌이 능력으로 만든 새까만 검을 손에 쥐었다. 몬스터가 쏜 화살을 가볍게 피해 낸 이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진 이주하가 원거리팀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빈 하태헌의 옆은 가뿐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 천사연이 대신 채웠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다시 얘기하시죠.”
가까이에 서 있는 근접팀을 의식한 하태헌이 다시 존댓말을 사용했다. 천사연이 눈꼬리를 휘고는 검을 손바닥에 갖다 댔다.
반말을 쓰다 말다 하는 하태헌의 행동에 자꾸만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천사연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실수로 더 깊이 베어 내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A급이나 될 법한 잔챙이들 상대로 너무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걸 하태헌도 알아챘는지 떨떠름한 눈빛을 했다.
“하하…….”
천사연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피에 젖은 검날을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곧 크게 휘둘렀다.
***
“A급 34.5%입니다. 그 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측정 능력자의 보고에 이주하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등장한 몬스터는 천사연의 예상대로 A급이었다. 몰려드는 수가 제법 많긴 했지만 그 밖에는 시시할 정도로 약했다. 원거리팀의 광역 공격에 우르르 녹아 처리도 금방 끝났다.
한차례 싸움이 끝나자 뒤로 물러서 있던 20명의 힐러가 활동을 시작했다. 워낙 인원이 넉넉한 터라 한 명 한 명 세세하게 봐 줄 수 있었다.
“실례할게요. 다친 곳 있으세요?”
검을 가슴께에 걸쳐 놓고 앉아 있는 하태헌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섰다. 자신은 멀쩡하니 다른 사람을 봐 달라고 하려던 하태헌은 힐러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기운 채워 드리는 서비스도 있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온 이는 민아린이었다. 설마 그녀가 먼저 다가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던 하태헌은 조용히 팔 한쪽을 내밀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팔이었다.
눈치 빠른 민아린은 맞은편에 앉아 그 팔을 잡고 치료하는 시늉을 하며 소리 낮춰 물었다.
“이결 씨는 잘 있나요?”
“…….”
모른 체하기에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잠시간 민아린을 바라보던 하태헌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으음, 사실 오늘까지도 긴가민가했어요.”
하태헌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팔을 내려다보고 있는 민아린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제가 봐 온 이결 씨는 혼자 무리하게 떠날 사람이 절대 아니라서요. 상황 판단이 빠르고 주변을 적당히 이용할 줄 아는 성격이니, 분명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죠.”
“그게 저라는 말입니까?”
“확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하태헌 부마스터도 알다시피 이결 씨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잖아요. 우리 길드 사람들은 아니니, 그럼 타 길드 사람이 분명한데….”
조곤조곤 설명하는 민아린에게선 별다른 감정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한이결과 많이 친한 줄 알았는데.’
그래서 예전에는 잠깐이나마 한이결과 이 힐러의 관계가 단순한 친구가 아닌, 그 이상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친구라기엔 너무 삭막한 반응 아닌가. 그야 한이결에 대해 이것저것 추리할 정도로 관심은 있어 보이지만, 이 정도는 호기심과 눈치만 뒤따른다면 얼마든지 예측할 수준이었다.
하태헌이 민아린을 향한 경계심을 조금 더 높이는 동안에도 민아린은 얘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차수연 씨나 홍시아 마스터를 상대로 넌지시 떠봤는데, 쓸 만한 답변을 못 들어서요. 그럼 남은 건 하태헌 부마스터뿐이거든요.”
“…….”
“듣기로는 얼마 전에 휴가를 다녀오셨다고 하더군요. 어딜 갔다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고.”
“글쎄요. 죄송하지만 제가 해 드릴 말은 없습니다.”
“하태헌 부마스터.”
팔을 강하게 잡아 오는 힘에 하태헌이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방금과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에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도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제가 알고 싶은 건 하나예요.”
민아린의 얼굴은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이결 씨가 아픈 곳 하나 없이 안전하게 있는지.”
“민아린 힐러.”
“그 정도는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싸늘한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단호했다.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제 팔을 힘주어 잡은 민아린의 손을 한참 동안 보던 하태헌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냅니다.”
“확실한가요?”
망설임 끝에 나온 답에 민아린의 굳은 표정에 안도감이 조금 깃들었다.
“최소한 저와 지낼 때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도 못 본 지 2주가 다 되어 가서 지금은 어떨지 모릅니다.”
“돌아올 가능성은요?”
“이 이상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냉정한 거절에 민아린이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깨물며 잡았던 팔을 놓았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민아린을 지켜보던 하태헌이 의심을 담아 말했다.
“왜 천사연 마스터가 아닌 제게 묻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우리 마스터보다 아는 게 더 많아 보이니까 그렇죠.”
별걸 다 묻는다는 것처럼 간단하게 대꾸한 민아린이 빙긋 미소 지었다.
“게다가 마스터는 이런 허술한 협박은 통할 상대가 아니라서요.”
“…….”
그럼 통한 나는 뭔데?
어이없어하는 하태헌을 두고 민아린은 유유히 떠나갔다.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에 미간을 매만지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도하석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뭡니까? 엄청 심각해 보이던데.”
“별거 아니다.”
“인사하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워낙 험악해서 눈치만 봤네요.”
“인사는 혼자 가라.”
“예?”
필요한 대화는 이미 다 나눴으니 굳이 도하석 옆에 끼어들 이유가 사라졌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태헌이 몸을 일으켰다.
“뭐, 상관은 없지만… 진짜 뭔 일 있는 겁니까?”
“없어.”
무성의하게 답한 하태헌은 도하석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