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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3)화 (173/394)

173화

44. 이쪽도 바쁩니다 

“으흠, 흠흠, 흐음~.”

어린 여자아이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통통 튀기듯 걸어갔다. 매끈한 금발은 양 갈래로 낮게 내려 묶고,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 목 부근엔 붉은 벨벳 리본이 달려 있었다.

기이이잉―!

복도 저편 끝, 흰빛이 새어 나오는 방에 가까워질수록 드릴 돌아가는 섬뜩한 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크게 들려왔다.

“닥터어, 바빠?”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간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부탁할 거 있는데.”

끄아아아악!

여자아이의 등장에도 드릴은 계속해서 돌아갔다. 방 중앙을 가로지르는 불투명한 가림막에 새빨간 피가 훅 튀었다.

“닥터!”

팔짱을 낀 채로 기다리던 여자아이가 영 답답했는지 버럭 소리 질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렸는지 드릴이 뚝 멈추고 가림막 너머로 거대한 체구의 그림자가 비쳤다.

“뭐야?”

차라락, 가림막을 훅 걷어 낸 남자가 밖으로 나오며 들고 있던 드릴을 옆 책상에 던졌다. 드릴과 남자의 위생 앞치마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한창 중요한 작업이었는데.”

닥터라 불리는 남자가 투덜거리면서 손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 냈다. 민머리에 호흡기가 달린 투박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그는 숨을 쉴 때마다 쉬익, 쉭 하는 잡음이 울렸다.

“중요한 작업? 뭔데? 저건 어디서 가져온 거야?”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닥터 뒤를 가리켰다. 철제 테이블 위에 묶여 있는 그것은 꿈틀거리며 살려 달라 중얼거렸다.

“한국인은 아직 건드리면 안 된다고 사마엘이 그랬잖아.”

“저건 안전하다.”

찔렸는지 가림막을 쳐서 시야를 가린 닥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벨. 그러는 너야말로 새 인형을 자랑하려고 가져온 거 아닌가? 못 보던 건데.”

“이거? 어때. 예쁘지?”

닥터의 말에 아벨이 뿌듯한 얼굴로 제자리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가볍게 흔들리는 드레스 치마 아래로 붉은 구두가 반짝 빛났다.

“내가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만들었지?”

겉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벨이 조종할 수 있는 것을 보아 저 피부 아래는 인형을 만들 때 쓰는 솜이나 나무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후후, 새로 온 놈 중에 쓸 만한 제작자가 있더라고. 공을 좀 들였지.”

“너나 나나 똑같구만.”

“나는 적어도 한국인을 가져와서 써먹지는 않았다고!”

까칠하게 대꾸한 아벨이 바닥에 흥건한 피가 혹여 구두에 묻을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자. 가져가.”

“또 뭐야?”

“사마엘이 전달하래. 저번처럼 공간 이동 구슬 하나 만들면 돼. 그분의 피랑 좌표는 넣어 놨어.”

상자 안에는 개조할 구슬과 피가 담긴 유리병, 좌표가 적힌 종이가 담겨 있었다. 쉬익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던 닥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아 죽겠네.”

“참아. 그래도 이제부터는 꽤 재밌어질걸? 그분께서 앞으로 기대하라고 직접 말씀하셨거든.”

아벨은 정말로 기쁜 듯 양손을 맞잡고 떠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닥터는 한숨을 내쉬고는 상자를 드릴 옆에 내려놨다.

“만들어 줄 테니까 사마엘 그 자식한테 전해. 실험용으로 쓸 만한 놈들 더 보내라고.”

“지금도 달에 10명씩 꼬박 받고 있지 않아? 여기서 더 필요해?”

“부족해! 엄청 부족하다고. 뭐 하기도 전에 죽어 버리는 게 태반이다. 좀 건강한 거로 갖다주든가.”

“하여간 욕심은 많아서.”

“네가 할 부탁은 뭔데?”

“나는 뭐~ 어려운 건 아니고.”

수줍게 웃은 아벨이 닥터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그 행동에 맞춰 닥터가 거대한 몸을 굽혀 주자 아벨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새로 나타난 게이트는 D45 구역으로 정해졌다.

레퀴엠 길드 소속인 N19 구역 게이트의 뒤를 이은 두 번째 SS급 게이트가 될지 국내외 모든 관심이 쏟아진 현 상황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상황은 꽤 나쁘지 않았다. ……고 이주하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열흘 전보다 얼굴이 더 망가졌군. 뭐 마음고생할 일이라도 있나 보지?”

“글쎄. 그쪽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흠, 저번 회의 때도 그러더니. 이제 막 나가기로 했나? 반말을 쓰네?”

“그만!”

눈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으르렁거리는 천사연과 하태헌 사이에 끼어들며 이주하가 외쳤다.

“왜 오자마자 태헌이한테 시비를 걸고 그러세요, 천사연 마스터!”

“믿기 어렵겠지만 하태헌 부마스터가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언제요?”

“저번 회의 때.”

“…….”

좀생이같이 열흘도 더 지난 일을 걸고넘어지냐? 이주하의 눈빛에서 속마음을 읽어 낸 천사연이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그때, 천사연의 등 뒤에서 밝은 목소리와 함께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인사를 건네 왔다. 하태헌과 이주하는 그녀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이미 몇 번 마주쳤던 상대였다.

“이번 레퀴엠 소속 힐러팀 총 관리를 맡은 민아린이라고 합니다.”

“아아. 반가워요.”

이주하가 민아린의 새하얀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다.

‘분명… 한이결, 그 능력자와 친한 사이였던 것 같은데.’

치솟는 호기심을 깔끔하게 숨기며 미소 지은 이주하가 이어 말했다.

“와 주셔서 고맙군요. 이번 클리어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이주하에게 웃으며 대답한 민아린이 뒤에 서 있는 하태헌을 잠시간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렸다.

신생 게이트는 등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에 첫 클리어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N19 구역 게이트 클리어에 천사연이 직접 참여했던 것처럼 이주하도 이번 클리어에 몸을 사리지 않고 제일 먼저 참가 의사를 밝혔다.

그런 와중에 레퀴엠에서 힐러 인력을 지원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힐러 인력이 적은 것은 어느 길드나 똑같았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 없이 힐러를 지원해 주겠다니? 게다가 천사연 마스터까지 참여하겠다고?

화친이 목적이라 해도 너무나 찝찝했다. 고민 끝에 거절하려던 이주하를 막아선 것은 의외로 하태헌이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를 때는 차라리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태헌이 섣불리 저런 얘기를 꺼낼 리는 없었다. 이주하는 결국 그의 진중한 성격을 믿고 레퀴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늘. 열흘 만에 다시 마주한 천사연은 저번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유독 피곤해 보였지만 태도만큼은 평소와 같았다. 그 평소의 태도가 워낙 꿍꿍이속이 많아 보이는 게 문제지만, 뭐. 어쨌든.

인사를 끝내고 천사연과 민아린에게서 멀어진 이주하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 힐러팀도 준비 다 끝냈습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의 은테 안경을 쓴 남자. 로헌 소속 S급 힐러 도하석이었다. 그가 곁에 서 있는 하태헌의 어깨에 장난스럽게 팔을 걸쳤다.

“레퀴엠에서 온 사람들까지 다 합치면 힐러만 20명인가요? 엄청 든든하네.”

보통 게이트 클리어를 한다 해도 힐러가 10명을 넘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도하석의 말마따나 걱정을 좀 덜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맞아. 그 정도 인원이면 만약 게이트가 SS급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안전할 거야. 도하석 힐러, 이따가 시간 내서 레퀴엠 측 힐러팀과 인사라도 나눠. 방금 왔다 간 민아린 힐러가 관리자야.”

“아하.”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도하석이 씩 미소 지었다.

“인사야 당연히 해야죠. 이왕 인사하는 거, 친해져도 됩니까?”

“어휴. 마음대로 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주하가 먼저 자리를 떴다.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하태헌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인사하러 갈 때 같이 가도록 하지.”

“음? 뭐, 저야 상관은 없지만.”

도하석이 하태헌을 묘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소리 낮춰 물었다.

“혹시 그런 겁니까?”

“뭐가 그렇다는 거지?”

“원래 좀 알던 사이라든가.”

“몇 번 마주치기는 했다.”

하태헌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이주하와 악수하던 민아린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한이결과 가깝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번 기회에 대화라도 좀 해 두는 편이 좋아 보였다.

“놀랍네요. 레퀴엠 소속 힐러와 아는 사이라니.”

“하려는 말이 뭐지?”

“방해 안 하겠다는 거죠.”

그제야 도하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한 하태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니다.”

“저런 스타일이 취향이신 줄은 몰랐네요.”

“아니라고 했다.”

“하태헌 씨는 좀 더 뭐랄까. 능청스러운 타입이 어울릴 것 같은데.”

“…치워라.”

제 부정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도하석의 모습에 하태헌이 어깨에 올려진 그의 팔을 짜증스럽게 쳐 내며 몸을 돌렸다.

“어어, 알겠어요. 그만 놀릴게요.”

“닥쳐.”

“그냥 전 섭섭해서 그러죠. 휴가 갔다 왔는데 선물 하나 없어서.”

지치지 않고 하태헌에게 다시 찰싹 달라붙은 도하석이 퍽 슬프다는 듯이 눈썹 끝을 내리며 우는 척을 했다.

“길드 들어와서 처음 얻어 낸 휴가인데, 누구랑 놀고 왔는지 얘기도 안 해 주고.”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 하지?”

“궁금하잖아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뻔뻔한 대답에 하태헌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관심 꺼 줬으면 좋겠군.”

“아니, 솔직히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는 어디서 만난 건지 다친 여성분을 몇 번이나 데려오고 그러더니, 어느 기점으로 그것도 뚝 끊긴 데다 휴가까지 내고 여행도 다녀왔잖아요. 생각할수록 엄청 흥미로운데.”

도하석의 말에 하태헌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내가 그랬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한이결과 관련된 것 외에는 무엇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깊게 빠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변화가 연구에 미친 저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재밌는지…….”

옆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도하석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하태헌은 계속해서 한이결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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