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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0)화 (170/394)
  • 170화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꿈에서 천사연과 마주 잡았던 손이었다. 어쩐지 아직도 그 감각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한참을 멍하니 왼손만 바라보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니?”

    “엘?”

    그제야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엘로힘을 알아챈 나는 급히 왼손을 내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멋쩍어하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웃은 엘로힘이 다정히 물었다.

    “몸은 좀 어떻지?”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창문으로 보이는 밖은 밝았다. 차분히 시간을 계산해 봤다. 책을 받고 읽기 시작했을 때가 오후 2시쯤이었으니, 하루 정도 잔 건가?

    “사흘째 아침이구나.”

    “예?”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잠든 지 사흘이나 지났다고?

    “정말요?”

    “꽤 무리했으니 그 정도 쉴 만하지.”

    “으음….”

    그야, 잠들기 전에 엄청나게 졸리긴 했지만…. 설마 그만큼 오래 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심란해하는 내게 협탁에 올려놨던 물이 든 잔을 건넨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특별한 꿈을 꾼 것 같더구나.”

    “아.”

    물을 마시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뺌하는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보셨습니까?”

    “우리가 너를 항상 보고 있긴 하다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단다.”

    빈 잔을 도로 가져간 엘로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곳은 본래 내가 들어갈 꿈이었던 터라.”

    “…잠깐만요.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까?”

    나를 보고 놀라던 천사연의 표정과 예언자가 보냈냐고 따지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천사연도 저를….”

    “그 아이도 꿈에서 너를 만난 것을 기억하겠지.”

    목과 귓가에 뜨거운 기운이 훅 치솟았다. 그저 꿈일 거라 여기고 천사연이 손잡는 것도 내버려 둔 거였는데.

    급히 손으로 목덜미를 가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혀… 몰랐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능력이 발동된 것 같더구나.”

    능력. 한이결의 바람 능력이 아닌 내 개입 능력을 말하는 건가.

    이제야 내 능력이 가진 힘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감이 왔다.

    “능력을 쓰는 바람에 더 오래 잔 거란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럴 수 있지. 천사연, 그 아이가 많이 보고 싶었니?”

    “네?”

    이번에는 볼과 이마까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한이결의 과거를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천사연이랑 워낙 엮인 게 많았으니까요.”

    “흠. 그래?”

    엘로힘은 다행히 쉽게 수긍했다. 이왕이면 다시는 저런 끔찍한 말은 안 해 줬으면 좋겠다. 너무 놀라서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래 자고 깨어났으니 속이 비었을 텐데, 씻고 식사하러 오렴. 먹기 편하도록 수프와 샐러드를 준비했단다.”

    “뭐든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엘로힘의 말을 들으니 꼬르륵 울리는 배가 느껴졌다. 씻기 위해 침대 밖으로 나온 나는 예상했던 것보다 몸이 청결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분명 기절하기 전에 식은땀이 엄청 났었는데, 왜 이렇게 개운하지. 냄새가 나거나 하지도 않고. 입고 있는 옷도 달랐다.

    설마…….

    “엘.”

    “응?”

    방을 나가려던 엘로힘이 내 부름에 뒤를 돌아봤다.

    “혹시 제가 자는 사이에 몸을 닦아 주셨습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깨끗할 리가 없었다. 떨떠름히 묻자 엘로힘이 화사한 낯으로 가벼이 답했다.

    “아니, 닦아 준 건 아니란다.”

    “그래요?”

    놀라라. 안도의 숨을 내쉬는 날 보며 엘로힘이 이어 말했다.

    “그냥 씻겨 주었단다.”

    “네?”

    “그럼 준비 끝내고 나오렴.”

    엘로힘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채로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이 끝도 없이 몰려오는 창피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에서 깨어난 후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부끄러운 건지, 정신이 다 어질어질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서 끙끙거리며 창피해하다가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울긋불긋한 한이결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아….”

    하태헌만으로도 충분한데, 이제는 엘로힘까지 몸을 봤다니. 심지어 씻겼다니.

    다시금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겨우 진정하고 씻기 위해 주섬주섬 셔츠 단추를 풀었다.

    ***

    “한이결의 과거가 꽤 길게 느껴지던데. 보통 한 권을 다 보는 데 그 정도 걸립니까?”

    엘로힘이 준비해 준 수프를 떠먹으며 묻자 그가 음료가 채워진 유리병을 든 채로 나를 봤다.

    “그렇지. 시간상으로는 6시간 정도 걸렸단다.”

    6시간이라. 수프를 깨끗하게 비운 나는 물로 입가심을 한 후에 말했다.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에도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 말해 보렴.”

    편하게 얘기해 보라는 듯이 눈짓하는 엘로힘의 행동에도 쉽사리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세현아?”

    “…과거를 확인하려면.”

    불안하게 흔들리는 각오를 다잡으며 좀 더 힘 있게 목소리를 냈다.

    “천사연의 과거를 확인하려면 어떤 대가를 치르면 됩니까?”

    엘로힘이 아주 의외라는 듯이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안다. 나도 설마 천사연의 과거를 알고 싶은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붉은 책에 이어 한이결의 책을 보고 나니 천사연의 과거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제가 이런 요청을 할 거라고 조금도 예상 못 하셨나요?”

    “어느 정도는 했지만, 확신은 없었단다. 책을 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인 데다… 천사연, 그 아이에게 이 정도로 애정을 가질 줄 몰랐으니까.”

    “애정은 없습니다.”

    천사연과 나만큼 건조한 관계도 없을 텐데, 애정은 무슨.

    헛기침을 한번 한 후에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가능한가요?”

    “……정말로 알고 싶은 거니?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뭐, 목숨이라거나 그런 과한 건 당연히 싫고요. 들어 보고 적당하면 받아들이겠죠.”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답해 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엘로힘은 복잡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

    “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

    들고 있던 유리병을 식탁에 내려 둔 엘로힘이 내 맞은편에 앉으며 쓰게 웃었다.

    “천사연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도 그 누구보다 칼리와 깊게 연관된 아이란다.”

    “…….”

    “천사연의 과거를 알게 되면 세현아, 너도 그렇게 될 거다. 무섭지 않니?”

    식탁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를 시험하는군요, 엘.”

    이번은 그가 정말로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한이결의 과거를 보면서 몇 가지 추측한 게 있습니다.”

    “추측이라.”

    “대단한 건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추측한 내용이 맞는지 자신은 없어요.”

    너무 현실적이지 않아서. 하지만 죽은 사람이 타인의 몸에 들어가거나 사람들이 능력을 쓰고, 신에 가까운 남자가 내게 식사를 차려 주는 이 세계에서 그런 게 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이 세계는 어느 기점으로 시간이 계속 반복되고 있고.”

    “…….”

    “그 중심에 천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엘로힘이 이제는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했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는 꽤 서늘한 인상이었다.

    “맞습니까?”

    “나는 아무 답도 해 줄 수가 없단다.”

    부드러운 거부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천사연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간이 거꾸로 되감아지는 게 맞다면….”

    거기까지 말한 나는 말라 오는 입술을 한번 핥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을 꺼냈다.

    “이번에 또 돌아간다면, 그때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도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엘이 저번에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한이결의 몸으로 들어온 것은 굉장히 희박한 확률이었다고.”

    “…….”

    “돌아가는 기점이 제가 이쪽 세계로 건너오기 전이라면 이번 같은 기적은… 없을 것 같은데요.”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엘로힘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똑똑하구나.”

    마치 혼자 숙제를 다 끝낸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말투였다.

    “그래도 오해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다. 세현아, 우리는 너를 시험하지 않아.”

    “예?”

    “그들과 더 깊게 엮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란다. 하지만 넌 이미 어느 정도 선을 넘었고….”

    조곤조곤 얘기하는 엘로힘의 음성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모든 걸 외면하고 좋은 것만 보게 해 줘 봤자 그 또한 너를 죽이게 될 테니.”

    “저는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싶지 않습니다.”

    “알겠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엘로힘의 서로 다른 눈동자 색이 보였다. 항상 금빛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밤하늘 같은 검은 눈동자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네 말이 다 맞단다, 세현아. 천사연 그 아이가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너는 그대로 사라지겠지.”

    “어차피 살기 위해서는 천사연을 도와야 하는 거네요.”

    “그렇지.”

    입이 마른 듯 식탁에 놓여 있던 찻잔을 앞으로 끌어온 엘로힘이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비어 있던 잔이 금세 따듯한 차로 가득 찼다.

    “천사연은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란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지.”

    “각오했습니다.”

    “또한, 그 아이의 과거는 굉장히 길단다. 수십 권에 달해. 그걸 모조리 본다면 적어도 3개월은 걸릴 거다. 그러니 중요한 부분만 축약한 책이 필요할 텐데, 그래도 다 보려면 며칠이 걸릴 거고.”

    “음…….”

    “신중하게 생각하렴. 한이결 과거가 6시간밖에 안 걸렸는데도 많이 힘들었잖니.”

    “제가 천사연의 과거를 보는 편이 더 좋지 않습니까? 상황을 그만큼 자세히 알게 되는 거니까.”

    “더 가벼운 대가를 치르고 내게 설명만 듣는 방법도 있단다.”

    엘로힘은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대가를 치르고 알아야 할 거면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하자 엘로힘이 어딘가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을 일부러 외면하며 물었다.

    “대가를 치르면 서재에서 봤던 붉은 책의 뒷이야기나 ‘어비스’의 이후 내용까지 다 알 수 있습니까?”

    “그래. 그 두 가지는 처음부터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대가 없이도 알려 줄 수 있단다. 어차피 천사연의 과거를 보면 다 알게 되겠지만.”

    찻잔에 담긴 차를 모두 마신 엘로힘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천사연의 과거를 정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단다. 방금 말한 그 두 가지와 네가 치를 대가도 정리가 끝났을 때 얘기해 보는 게 좋겠구나.”

    “어느 정도 걸립니까?”

    “글쎄. 이런 작업은 우리도 처음이라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완성이 안 될 수도 있어.”

    “그럼…….”

    “만약 그렇게까지 오래 걸린다면 그때는 우리가 한국으로 찾아가야겠지.”

    기껏 복잡했던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체 내용이 얼마나 많길래 그만큼 걸리는 걸까.

    “차라리 잘됐구나. 천사연의 과거를 버텨 내려면 세현아, 너도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우리가 정리할 동안 꿈을 꾸면서 힘을 키우는 편이 책에 잡아먹히지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문제에 고집부려 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지금은 물러나서 기다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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