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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69)화 (169/394)

169화

43. 정체기

천사연의 경고에도 한이결은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한번 내뱉고 나니 오히려 뻔뻔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천사연에게 매달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골치 아픈 쪽은 천사연이었다. 주변 상황을 무시한 채로 울면서 사랑 고백을 뱉어 내는 한이결의 행동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돌거나 모욕적인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길드 측에서 관리에 들어간다 해도 그 양이 워낙에 많아 막기가 쉽지 않았다. 천사연이야 본래 성격상 그런 소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쓸데없는 문제까지 겹쳐지니 몸이 10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이 이상 내가 시선을 끄는 것은 좋지 않겠군.」

한이결이 해 오던 일을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버리지 못하고 억지로 데리고 있던 천사연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네 여동생을 핑계로 그동안 널 이용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동생은 죽었고 넌 쓸모가 없어.」

「…….」

「알아들었으면 다신 나타나지 마. 또 눈에 띄었다간…….」

「아, 안 돼……. 안 돼요, 저는…….」

천사연을 향해 손을 뻗는 한이결을 수행원들이 막아섰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처절하게 외쳤다.

「싫어, 제발요! 제발 데려가 주세요. 뭐든 할게요.」

「치워.」

「흐으, 헉, 제발…….」

냉정한 한마디에 한이결은 두 팔이 붙잡혀 끌려 나갔다. 어딘가 낯익은 장면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한이결의 몸에 들어와 처음으로 꿨던 꿈을 떠올렸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슬슬 이 이야기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혼란으로 울렁이는 속을 억지로 외면하며 차분하게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가 천천히 바뀌었다. 다시 나타난 천사연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한이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나, 뭐야? 인간 방패?」

높은 톤의 조롱이 들려왔다. 붉은 구두를 신고 거대한 낫을 든 장신의 여자가 턱을 달각거리며 뱉어 낸 말이었다.

사람 같지 않은 번들거리는 피부와 이질적인 외모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강승건에게 납치당했을 때 만났던 인형 카렌이었다.

「쿨럭…….」

한이결이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그가 입은 부상은 딱 보기에도 굉장히 심했다. 오른쪽 어깨와 팔이 모조리 날아가 상체는 온통 질척한 피로 범벅이었고, 허벅지도 깊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용할 수준이었다. 고통에 헐떡이는 한이결을 조용히 응시하는 천사연은 흰 뺨에 피가 묻어 있었다.

「멍청하군.」

천사연의 생각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SS급의 앞을 막아서는 A급이라니. 방금 그 공격은 확실히 저라고 해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어깨가 통째로 날아간 한이결보다야 자신이 맞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을 텐데.

「제멋대로 따라와서 고작 한다는 게….」

천사연이 어딘가 허탈한 기색으로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한이결이 눈물을 흘리며 입꼬리 끝을 살짝 올렸다.

「이걸로… 헉, 충분….」

「…….」

「나를, 오래도록… 기억…….」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던 한이결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로 숨이 툭 끊겼다. 공허한 눈동자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피를 머금고 볼 아래로 주룩 떨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이결의 죽음을 끝까지 봐 준 천사연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검을 고쳐 들었다. 올곧게 서 있는 천사연과 죽은 한이결 주변에는 사지가 잘린 인형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낭자했다.

「하아…….」

천사연이 등을 돌린 채로 피곤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평소보다 살짝 내려간 어깨가 유난히 지쳐 보였다.

그걸 끝으로 눈앞이 다시 어둠에 먹혀들어 갔다. 더불어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뭐, 한이결이 죽었으니 당연하겠지만….’

자꾸만 검을 든 채로 홀로 선 천사연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내 마음과 상관없이 어둠은 끊임없이 몰려왔고, 곧 모든 것이 사라졌다.

***

공중에서 떨어지는 섬뜩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빛 무리가 훅 지나가며 짧은 순간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식었다.

“허억…!”

등줄기를 스치는 오싹한 느낌에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들이켰다. 덜컹,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기울자 무릎에 무언가 부딪혔다.

“후, 으윽….”

“세현아.”

몸살이 난 것처럼 뻐근한 통증과 동시에 식은땀이 흘렀다.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단단하게 붙잡아 준 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쉬이, 괜찮아. 천천히 호흡하거라.”

“하아, 헉…….”

손바닥으로 가파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로 쓴 미소를 짓고 있는 엘로힘과 함께 낯익은 서재가 보였다.

“엘….”

“고생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축 늘어지는 나를 엘로힘이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저번보다… 흐, 더 힘든….”

“책을 오래 봐서 그런 거란다. 책은 우리들의 힘이 만들어 낸 결정체라서 그 속에 오래 있을수록 몸에 부담이 커지지.”

“…쉬면 괜찮아지는 겁니까?”

“그래. 며칠 푹 쉬고 나면 평소대로 돌아올 거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엘라하가 눈짓으로 서재 문을 가리켰다.

“그냥 지금 데리고 나가. 애 상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한데.”

엘로힘도 같은 생각인지 나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뜨거운 숨을 뱉어 냈다.

나를 보며 엘라하가 혀를 쯧쯧 찼다.

“정말 엄청나게 허약하네.”

“A급 평균… 인데요….”

“웃기지 마. A급 평균은 안 그래.”

바닥에 떨어진 남색 책을 주워 든 엘라하가 장난치듯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쓸데없이 말대답하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

웃으며 나와 엘라하의 대화를 듣던 엘로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뒷정리는 엘라하에게 맡긴 엘로힘은 서재를 빠져나와 내가 지내는 방으로 곧장 향했다.

“몸이 아직도 차구나.”

침대에 나를 내려 준 엘로힘이 손을 잡아 왔다.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누워 있으니 그가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부드러운 손길로 쓸었다.

“책의 내용이 꽤 버거웠나 보구나. 기운이 잔뜩 흐트러졌다.”

“그렇습니까…?”

엘로힘이 한 말은 좀 의외였다. 버거웠던가?

당황스럽기는 했다. 한이결이 내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천사연 관련해서 궁금한 것도 많아졌고.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은 일단 쉬렴. 급한 것 없으니.”

“그럼 내일…….”

몽롱한 정신에 웅얼웅얼 대답하니, 엘로힘이 내려다보며 볼과 목을 매만졌다.

“땀이 식으면서 온기를 빼앗는구나. 힘들더라도 씻고 자는 게 좋아 보이는데.”

“…….”

“도와줄까?”

“으음,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제가….”

지독한 졸음이 몰려와 대충 얼버무리며 그의 손에 볼을 비볐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엘로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발아래로 펼쳐진 흙바닥이 온통 새까맸다. 연기로 가득 차오른 눈앞은 지나치게 흐렸다.

“…뭐지?”

여기가 어딘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걸음을 옮겨도 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는 척박한 땅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방향을 모르니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가 있나 보네.’

딱히 갈 곳도 없으니 우선 그곳으로 향했다. 파도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릴 때쯤에야 안개 너머로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고 다가가던 나는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보고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천사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천사연이 분명했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유난히 하얀 얼굴과 붉은 귀걸이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배경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그제야 이곳이 꿈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들기 전에 천사연을 봐서 그런가.’

잠들었다기보다는 기절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꿈이라면 괜히 어색해할 필요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천사연.”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그를 불러 봤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발견한 천사연이 놀란 것처럼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이결?”

거침없이 다가오는 천사연의 날카로운 기세에 눌려 무심코 뒤로 물러서는 내 손목을 그가 단번에 낚아챘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는 나를 천사연이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재차 물었다.

“예언자가 보냈나?”

“뭐?”

“아니지, 애초에 그게 가능했으면…….”

먼저 물어봤으면서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저 혼자 중얼거리냐.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천사연의 어깨를 조금 밀며 입을 열었다.

“보내긴 뭘 보내? 정신 차리고 보니까 여기였어.”

“보낸 게 아니라고?”

“그래. 그냥 꿈이잖아.”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천사연이 잠시간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입꼬리 끝을 올려 삐딱하게 웃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줄 알았는데.”

“엄연히 따지면 네가 내 꿈에 온 거지….”

“그게 마음에 들면 그런 거로 하고.”

뭐라는 거야.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통하는 게 없는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는 나와 달리 기분이 제법 좋아 보이는 천사연은 자꾸만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꿈인데 엄청 생생하네.

“그만 만져.”

“왜?”

왜는 무슨 왜야.

“귀찮아.”

“참아.”

이 자식이….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이럴 때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천사연을 만나면 묻고 싶었던 게 있었다.

“천사연.”

“말해.”

“괜찮냐?”

앞뒤 뚝 잘린 말이었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내 질문을 천사연은 평소처럼 모른 척 넘기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묘한 표정으로 내 볼을 쓸어 만지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

“…….”

“별로 안 괜찮은 거 같은데.”

그 담담한 답에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근처로 확 퍼지며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역시 이건 꿈이다. 현실의 천사연이 이만큼 솔직하게 대답할 리가 없으니까.

내 표정을 본 천사연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왔다.

“지금은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하나만 해.”

표정을 숨기지 못한 머쓱함에 괜히 투덜거리던 나는 뒤늦게 주변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안개가 옅어지다 못해 아예 사라졌다. 검고 탁했던 흙바닥은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운 황갈색으로 변했고, 그 사이로 아주 작은 연둣빛 새싹이 솟아났다.

“아…….”

천사연의 어깨 너머로 새파란 바다가 보였다. 짙은 안개에 보이지 않았던 건가.

내가 바다에 시선을 뺏기자, 천사연이 마주 잡은 손을 당기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절벽 끝에 천사연과 나란히 서서 점차 희미해지는 먹구름 아래로 넓게 펼쳐진 바다를 구경했다. 회색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점점 하얗게 번져 갔다.

“꿈이 끝나 가는군.”

속삭이듯 말한 천사연이 손에 깍지를 끼며 재차 강하게 잡아 왔다. 바다를 모조리 집어삼킨 새하얀 빛이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한이결.”

“어.”

“다음에 또 와.”

천사연이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얼굴에 넋을 놓은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찬란한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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