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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66)화 (166/394)

166화

  

“기운이 꽤 선명해졌구나.”

서재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엘로힘이 인사 대신 꺼낸 한 마디였다.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습니까?”

“세 번째 꿈을 만났니?”

“예.”

간단히 답하자 엘로힘이 역시, 하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선명해졌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내가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못 느끼겠는데, 엘로힘은 어떻게 바로 알아챈 걸까. 궁금해서 물으니 그가 빙긋 웃으며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아테나 길드의 부마스터 기억하니? 클로에 애스너라는 아이인데.”

“물론 기억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곧 클로에의 능력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엘로힘이 정답이라는 듯 입꼬리 끝을 부드럽게 올렸다.

“참으로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지. SS급이라는 등급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단다. 그런 능력은 쉽사리 가질 수 없어.”

“상대방의 기운의 색이 보이는 눈 말이군요.”

“그래. 네 것도 봐 줬었지.”

“맞습니다.”

그때 기억이 차츰 떠올랐다. 뭐라고 했더라.

“짙은 남색이라고 들었을 텐데.”

아, 맞아. 그랬지.

“근데 그건… 한이결의 기운 아닙니까?”

“아니. 네 기운이기도 하다. 정확히 따지자면 한이결의 기운과 권세현, 네 기운이 섞인 거지.”

“섞여요? 물감처럼 말입니까?”

“적절한 비유구나. 그럼 묻겠다, 세현아. 짙은 남색이 되려면 어떤 색이 섞여야 하는지 알겠니?”

짙은 남색이라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파란색과 검은색이요?”

“정답이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매일 저녁 엘로힘이 주는 검은 사탕. 그걸 먹으면 내 과거의 기억을 꿈으로 꿀 확률이 높아진다.

그전에는 꿈속에서 만나서 연하늘색 사탕과 검은색 사탕을 고르게 했었지.

“검은색이 저입니까?”

사탕 색상 따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조차 의미가 있었던 건가.

“등급이 높을수록 기운의 색도 더 선명하고 짙단다. 며칠 전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니? 한이결의 영혼은 오랜 고통으로 인해 마모되어 희미해졌다는 것.”

“네.”

“본래 한이결은 파란색을 갖고 있었지. 하지만 네가 들어올 때는 연하늘색이 될 정도로 약해졌단다. 그 상태에서 네 영혼이 들어왔으니 다시 파란색으로 차올랐고… 추가로 검은색이 섞였지.”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을 듣는데도 알쏭달쏭했다. 이마를 문지르며 엘로힘의 말을 겨우 정리했다.

“음, 그러니까… 영혼이 약해져서 연하늘색이 됐는데, 제 덕분에 다시 파란색으로 회복했고. 거기에 제 검정까지 추가돼서 결국 남색이 됐다는 뜻입니까?”

“이해가 빠르구나.”

엘로힘이 한낮의 햇살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서재 안을 돌아다니던 엘라하가 그런 엘로힘 옆으로 걸어오며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쉬운 것도 그렇게 늦게 알아들으면 어떡해? 앞으로 알아야 할 게 산더미인데.”

그가 들고 온 책을 엘로힘에게 건넸다. 남색 표지를 가진 책이었다.

“고마워.”

“정말 괜찮겠어? 난 반대야. 적어도 이걸 보려면 꿈을 두 번은 더 꿔야 해.”

“아니. 지금이 나아.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야.”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던 엘로힘이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심장에 엉켜 있는 기운의 색은 섞였지만, 능력을 쓸 때 보이는 색은 섞이지 않아. 세현아, 네가 바람 능력을 쓸 때는 한이결의 기운 색이 나타날 거라는 뜻이다. 물론 바람이 아닌 개입 능력을 쓸 때의 기운 색은 검겠지.”

“잠깐만요, 그럼….”

그 설명에 문득 언젠가 봤던 클로에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다. 당혹스러운 감정이 짙게 묻어 있던 그 표정이.

언제였지? 사마엘에게서 무사히 빠져나온 다음 날이었던 것 같다. 클로에와 에드워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레퀴엠 길드로 돌아가기 위해 바람 능력을 썼을 때.

-창문을 통해 날아가다니. 바람 능력은 정말 로맨틱하네요.

가벼운 말투로 장난을 치며 여유롭게 우리를 배웅하던 클로에가 나를 응시하며 기운 감별 능력을 썼다.

-…아니, 아닙니다. 미안해요. 제가 뭔가 착각을 해서.

빛 가루가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하고서 굳은 얼굴로 급히 고개를 젓던 그 달라진 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줄곧 하고 있었다. 엘로힘의 설명을 들으니 이제야 클로에가 그런 모습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봤구나. 짙은 남색을 띠던 심장의 기운과 달리, 바람 능력을 쓸 때 몸 밖으로 흘러넘치던 새파란 기운의 색을.

복잡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엘로힘에게 말했다.

“클로에 부마스터가 눈치챘다면 당연히 천사연도 알고 있겠네요. 제 기운의 문제를.”

예상대로 엘로힘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한숨을 푹 내뱉었다.

“꿈을 꿀수록 색은 점점 짙어질 거다. 개입 능력을 쓰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속도도 빨라질 거고. 아예 깨끗한 검은색으로 되지는 않겠지만 그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워지겠지.”

“그렇다는 건… 한이결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건가요?”

“사라지기를 바라니?”

“굳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도 이제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겁니다.”

만약 어딘가에 남아 있는 한이결의 영혼이 이제 와서 몸을 돌려 달라 해도 순순히 돌려줄 마음은 없었다. 뻔뻔하더라도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갈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 휘말리거나 사고로 죽는 게 아니라면, 나 스스로 목숨을 놓지는 않을 거다. 절대로.

“네가 원한다면 따로 빼낼 수는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일단 두고 보는 게 좋겠구나.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 굳이 건들지 말아야겠지.”

그 말에 옆에 서서 대화를 듣던 엘라하도 동의했다. 오래 살아온 그들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니. 절대 하지 말아야겠군.

“자.”

엘로힘이 아까 엘라하에게 받았던 책을 내밀었다. 아무런 제목도 쓰여 있지 않은 책이었지만, 파란색 가죽 표지를 보니 대충 감이 왔다.

“꿈을 세 번 만났으니, 약속대로 한이결의 과거를 볼 수 있게 해 줘야겠지.”

“이걸 읽으면 되는 겁니까?”

“그래. 그게 사용법이지. 펼치고, 읽으렴. 하지만 읽는 내내 몸이 받는 부담은 심할 거란다. 읽는 와중에는 괜찮겠지만 다 보고 나면 일주일은 힘들 거야. 그래도 괜찮겠니?”

“상관없습니다.”

꺼끌꺼끌한 책 겉표지를 쓸어 만지는 내게 엘로힘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도 알려 줬듯, 한이결에 대한 것은 그 한 권이 끝이다. 그나마도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른 아이의 과거를 가져와서 채워 넣었단다.”

“혹시…….”

“그래. 한이결뿐만 아니라 천사연의 생각도 들려올 거야. 본래라면 정해진 기준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이미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응시하던 엘로힘이 응원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나와 엘라하가 곁에 계속 있을 테니, 안심하고 보고 오렴.”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몸이 조금 풀렸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등을 대고 책을 펼쳤다. 제일 첫 장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지만, 두 번째 장부터는 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손으로 맨 위에 써진 첫 줄을 매만졌다. 글을 읽을수록 점차 주변의 모든 것이 흐려지고 허공에 떠오르는 듯한 부유한 감각이 느껴졌다.

「동생, 이연이는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아이였다.」

***

눈앞에 C12 구역의 좁은 골목길이 펼쳐졌다. 살을 에듯이 강하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피부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얼굴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홀린 듯 그 뒤를 따라갔다. 한이결의 작고 동그란 뒤통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키가 좀 더 작고 아직 볼살이 빠지지 않은 얼굴이 무척이나 앳돼 보였다.

「동생, 이연이는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아이였다.」

나와 달리 조금 더 예민해 보이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겨울바람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낡은 집의 철문을 연 한이결이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글쎄. 어미 배 속에서 하도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아비 얼굴은 이미 잊은 지 오래고 낳은 이는 죽었다. 지금까지는 노쇠한 노인이 폐지 팔아 번 돈으로 간간이 입에 풀칠하듯 살아왔으나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그래도 전에는 가끔 돌아오더니, 어느새 3개월 넘도록 만나지 못했다. 20살의 추운 겨울, 이제 이곳은 이연이와 나만 남았다.」

좁디좁은 원룸 방. 창문에 어설프게 붙여 둔 신문지가 보이고 차갑게 식은 방바닥은 뼈가 아릴 정도로 한기가 돌았다. 그 위에 놓인 얇은 이불에는 유일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오빠.」

이불 속에 누워 있던 이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작은 체구와 빛 한번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한이결과 같은 부드러운 갈색이었지만, 이목구비는 조금 더 오밀조밀하고 드러난 이마가 뽀얗고 동그랬다.

「연아.」

들고 있던 봉지를 대충 방구석에 던져둔 한이결이 급히 여자애에게로 달려갔다. 한이연. 한이결의 하나 남은 혈육이자 목숨처럼 아끼는 여동생.

눈꼬리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간 한이결과 달리 한이연은 눈이 훨씬 더 둥글고 컸으며, 끝이 아래로 처져 있어서 어린 강아지 같은 인상을 풍겼다. 팔을 벌린 한이결을 마주 안은 한이연이 냉기를 느꼈는지 몸을 작게 떨었다.

「밖에 많이 추워?」

「조금.」

한이연이 추위로 빨갛게 튼 한이결의 손을 잡아끌어 따듯한 이불을 위에 덮었다. 그걸 보며 한이결이 처음으로 입꼬리 끝을 올려 웃었다.

좁은 방에 서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20살의 어린 가장과 어리고 아픈 여동생. 살면서 지겹게 봐 온 익숙한 불행의 냄새.

막 20살이 되었지만, 남들에게 축하받으며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은 사치일 터였다.

학생일 때보다야 더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는 구질구질한 삶.

「오빠, 배고프지? 어서 씻고 와. 내가 밥 차려 둘게.」

한이결이 얼어붙은 손을 좀 녹이자 한이연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코앞에 있는 주방으로 간 한이연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는 한이결의 생각이 들려왔다.

「예쁜 내 동생.」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작고 마른 몸. 학교도 가지 못하고 종일 이 좁은 집 안에서 얼마나 심심하고 외로울까.

「나는 너만 있으면 돼.」

한이결이 순한 얼굴과 맞지 않게 싸늘하니 가라앉은 눈빛으로 재차 중얼거렸다.

「너만 있으면.」

“…….”

그 기묘한 분위기에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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