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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65)화 (165/394)

165화

42. 과거 되짚기 

“형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우물쭈물 들어섰다. 큰 덩치와 맞지 않게 내 눈치를 살피는 그의 이름은 동주였다.

“말해.”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듣자마자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이 왔다.

남자가 신입이랍시고 새로 들어온 놈들을 넣어 준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래. 사고를 한 번쯤 칠 때지.

두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동주 녀석이 안심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험악한 생김새와 우락부락한 몸을 가졌지만, 분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임신한 아내와 알콩달콩 잘 사는 건실한 놈이다.

“좆같은 새끼, 시발! 이리 안 와?”

채앵!

아래층으로 내려가자마자 복도 너머로 남자의 고함과 함께 술병 깨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이미 한바탕하고 있나 보군.

느긋했던 걸음 속도를 높여 문제가 생긴 룸으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

오. 달에 한 번쯤 꼬박 듣는 대사까지 나온 것을 보아 아무래도 중요한 타이밍에 잘 도착한 듯싶다. 반쯤 닫혀 있던 룸의 문을 빠르게 열며 곧바로 팔을 뻗었다.

탁!

신입 직원의 뺨을 향해 휘둘러진 손목을 그대로 낚아챘다. 뒷짐 지고 가만히 서 있던 신입 직원은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다지 겁먹지는 않아 보이는 게 아무래도 한 대 맞으면 10대로 갚아 주려고 벼르고 있었나 보다.

그럼 그렇지. 하여튼 그 남자가 보내 준 놈들은….

“뭐, 뭐야? 너 이 새끼, 뭔데 끼어들어?”

내게 손목이 잡힌 손님이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일단 룸 내부 상황부터 차분하게 살폈다.

비싼 양주들은 바닥에 깨진 채로 널려 있고,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 몇이 하얗게 질린 채로 움츠리고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룸 안쪽까지, 천천히 시선을 올리던 나는 이윽고 가장 끝에 앉아 있는 이를 발견했다.

탈색을 몇 번이나 했는지, 부스스한 금발과 귀에 꽂힌 피어싱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흥미롭게 이쪽을 구경하고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담배 연기를 훅 내뿜어 냈다.

“이거 안 놔? 뭐 하는 새끼야, 시발 놈아!”

아. 잊고 있었다. 내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낑낑거리는 진상에게 다시 주의를 돌렸다.

“진정하시죠, 손님.”

일부러 붙잡은 손목을 한번 강하게 움켜쥔 후에 놔주자 상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문제가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너, 너, 시발, 네가 여기 주인이야?”

“예.”

간단히 답하며 뒤에 서 있는 애들에게 턱짓하니 눈치 빠르게 신입을 데리고 룸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손님이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애새끼들 관리를 어떻게 시키는 거냐, 서비스를 이따위로 하면서 무슨 장사를 하겠다는 거냐, 내가 누군지 모르냐, 이 기분 잡친 걸 어떻게 보상할 거냐 등등.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횡설수설하는 진상 놈의 말을 심드렁하게 들었다. 어떻게 이런 놈들은 매번 레퍼토리가 비슷한지 모르겠다.

“손님.”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내가 환하게 웃어 보이자, 진상 놈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아무런 보상도 해 드리지 않을 겁니다. 서비스도 뭐… 이 정도 참아 줬으면 꽤 잘해 준 것 같은데.”

“뭐?”

“영업에 피해가 가니 이만 나가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룸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간 동태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진상이 힘이 들어간 주먹을 파르르 떨며 분노했다.

“시팔, 뭐라 지껄이는 거야?! 지금 나보고…!”

다시 난동을 부릴 기세라 강제로 내쫓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는 밝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나가는 게 좋겠다.”

아까 눈이 마주쳤던 그 금발의 남자였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로 그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주인 말대로 좀 민폐긴 하네. 시끄럽기도 하고, 맛있는 술도 다 깨졌고.”

“어, 어? 무슨….”

“영업 방해로 신고라도 하면 어떡해? 난 경찰서 가기 싫은데. 너네도 싫지?”

“으, 응.”

“그렇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하는 말에 굳은 채로 구경하던 여자들이 흠칫 놀라며 어색하게 동조했다.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진상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야, 야…. 왜 그래? 시발, 연선우. 너….”

“음? 뭐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신입 직원이나 내게 욕할 때 보여 준 당당했던 아까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진상에게 연선우라 불린 금발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물며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뭐 어쨌다고? 좋았던 분위기 잡친 건 너잖아, 민건아.”

“…….”

“안 나가?”

정말로 왜 안 나가는지 궁금하다는 어투였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들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발!”

목까지 붉어진 채로 한참 동안 입술만 깨물던 진상이 나를 거칠게 밀치며 룸을 빠져나갔다.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한숨을 삼켜 내며 슬쩍 고개를 돌리자, 올망졸망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들과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금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음….”

뻘쭘하게 웃으며 바닥을 슬쩍 살폈다. 깨진 술로 난장판이 되어 있는 상태라 아무래도 룸을 옮겨 줘야 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새 룸을 준비해 드릴 테니 옮기시겠습니까? 깨진 술도 다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깍듯하게 말하자 금발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래 주면 고맙죠.”

“예. 바로 직원을 보내겠습니다.”

어떻게 잘 마무리된 것 같군. 안도하며 룸을 막 나가려고 등을 돌린 그때였다.

“그런데요.”

“……?”

“그쪽이 여기 주인인 거 진짜예요? 엄청 젊어 보이는데.”

호기심으로 점철된 질문에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혀를 찼다. 귀찮아 죽겠네.

“관리인입니다.”

상대는 손님이다, 손님이다. 염불처럼 외며 친절을 가득 담아 대답하자 그가 턱을 괴며 눈을 반짝 빛냈다.

“술은 다시 안 가져다줘도 되니까 다른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뭡니까?”

“한 번만 더 웃어 봐요. 아까처럼 활짝.”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요구에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가만히 앉아서 나와 남자의 눈치만 살피던 여자들도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경악했다.

“안 돼요?”

“…….”

천진한 목소리에 두통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

연선우가 바에 들락거리는 행동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내쫓을 심산으로 시작한 커피 심부름은 갈수록 의미가 사라졌다.

녀석은 나조차 놀랄 정도로 끈질기고 고집이 셌다. 딱 봐도 대단한 집안에서 오냐오냐 자란 것 같은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왜 나한테 저 정도까지 관심을 두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여기요.”

한여름의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한낮에도 연선우는 별다른 불만 없이 커피를 사 왔다. 그가 내미는 커피를 받아 들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하지만 끝내 묻지 않은 건… 이유야 어찌 됐건 녀석은 무채색으로 삭막하기만 했던 내 하루에 날아온 밝은 색종이 같은 존재임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가라.”

“아, 또 왜요?”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한창때의 어린놈이 자꾸만 술집에 들락거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 같은 놈이 아니라, 연선우에게 어울릴 만한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기를 바랐다.

“공부 안 해?”

“어휴, 또 그 소리.”

“그러다 나 같은 사람 된다.”

“형님이 뭐 어때서요?”

벌써 몇 번이고 반복해 온 잔소리에 연선우가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는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형님처럼 섹시하고 일 잘하는 남자면 아주 괜찮지.”

“얼씨구.”

웃기지도 않은 소리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대회 출전하면 우승하겠다, 너.”

“제가 못하는 게 없기는 해요.”

“됐으니까 나가.”

며칠 전에 녀석이 들고 와 억지로 책상 위에 올려 둔 작은 인형을 집어 던지자 연선우가 허리를 숙여 재빠르게 피했다.

“너무해요!”

“맞지도 않아 놓고 뭐가 너무하냐.”

“방금 제 선물을 던졌잖아요.”

“난 싫다고 했다.”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주워 든 연선우가 투덜거리며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놨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검은 여우 인형이었는데, 어디서 사 왔는지 나를 닮았다는 개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형님이랑 똑 닮았는데 그렇게 험하게 다루면 슬프잖아요.”

그래. 이런 개소리. 피로가 몰려와 커피를 쪽 빨아 마셨다. 단 향과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저번에 사 온 거랑 똑같은 거지? 이거 이름이 뭐라고?”

“바닐라 라테요. 맛있게 먹길래 한 번 더 사 온 건데. 마음에 들어요?”

“어.”

다른 애들이 사다 주는 건 죄 쓰고 떫기만 한데, 이건 맛있었다.

“다음에 사 올 땐 네 것도 사 와.”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야.”

“그러면 여기서 마시고 갈래요.”

“넌 내가 노는 거로 보이지?”

“아니에요?”

“…마음대로 해라.”

사무실이 시원하긴 하지. 한여름에 시키는 심부름인데 그 정도야 해 줄 수 있다.

내 허락에 연선우가 눈을 살짝 접으며 기쁜 듯 웃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햇살처럼 참으로 밝고 따듯해 보였다.

***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몽롱했던 정신이 점차 맑아지면서 현실감이 찾아왔다. 새하얀 이불을 짚은 손이 덜덜 떨렸다.

고개를 숙이자 눈가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후드득 떨어졌다.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이 다리를 덮은 이불을 적셨다.

“…으, 윽…….”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울음소리를 억지로 삼켜 냈다. 갈수록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이이.

언제 또 들어온 건지 여우 울음소리가 약하게 들려왔지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꾸역꾸역 흐느낌을 참아 내며 손에 닿아 오는 이불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연선우. 선우야.

차마 뱉어 내지 못할 이름을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몇 번이고 다시 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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