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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64)화 (164/394)
  • 164화 

    타닥, 어두운 방 안에 키보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니터에서 흘러나온 새파란 불빛을 정면으로 맞으며 하이드는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5개의 모니터는 화면이 계속해서 휙휙 바뀌며 다양한 이미지가 떠오르고, 사라졌다.

    끼익―.

    하이드가 일하고 있는 방 맞은편 문이 열리며 트레이닝 바지만 걸친 남자가 머리에 수건을 올려 쓰고 나왔다. 뿌연 김이 새어 나오는 욕실 문을 닫으며 김우진이 수건을 내렸다.

    “괜찮냐?”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하이드가 의자를 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김우진이 잔뜩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눈을 깜빡였다.

    “…….”

    “뭐라도 좀 먹지 그래?”

    아무 답이 없는 김우진을 향해 재차 물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하이드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엄청나게 말랐는데. 제대로 먹고 다니기는 해? 지금 안색도 완전….”

    “됐고.”

    들고 있던 수건을 대충 집어 던진 김우진이 하이드의 말을 끊으며 근처 의자에 앉았다.

    “전화로 했던 얘기나 자세히 해 봐.”

    “김우진.”

    “그, 중국… 중국이랬지? 맞아? 확실해?”

    붉게 충혈된 눈을 손으로 거칠게 비비던 김우진이 더듬더듬 물었다.

    불안정한 모습의 김우진을 잠시간 응시하던 하이드가 얼굴을 살짝 숙이며 지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중국 어디?”

    “난징이라는 도시에 있는 소규모 시장 거리. 한이결처럼 보이는 남자를 봤다는군.”

    “확실한 정보야?”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다. 생긴 건 한이결인데,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래. 안경도 끼고, 어린아이를 안고 있다고 했어.”

    “안경… 어린아이….”

    “체인징 아이템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따져 봐야 하고.”

    “좌표 적힌 자료 줘. 넘겨야 하니까.”

    “누구한테?”

    “…….”

    “레퀴엠 마스터?”

    “아니.”

    하이드의 말에 김우진은 대표실을 찾아가던 날을 떠올렸다.

    그는 한이결을 믿고 있고, 그래서 돌아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이결이 저를 버리고 떠났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한이결이 떠올랐고, 잠이 들면 저에게 아픈 말을 쏟아 내고 냉정하게 떠나가는 한이결의 뒷모습이 악몽으로 나타났다.

    마음을 편하게 갖지도, 잠들지도 못한다. 한계까지 치달은 김우진은 자신을 걱정하는 민아린과 권정한을 뿌리치고 대표실로 무작정 찾아갔다.

    경호원이 자신을 막아섰지만, 우서혁이 복잡한 표정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뭐든 하겠습니다.

    -…….

    -한이결을…….

    서류를 보고 있던 천사연을 향해 두서없이 꺼낸 말은 차마 끝을 맺지 못하고 어그러졌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뭘 부탁하려는 거야? 한이결이 천사연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가진 것 하나 없이 떠났다는 사실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대체 왜…….

    한이결을 찾아 달라는 그 한마디를 뱉어 내지 못한 채로 굳어 버린 김우진을 조용히 바라보던 천사연이 보고 있던 서류를 덮으며 의자에 천천히 등을 기댔다.

    -이틀 뒤부터 게이트 일정이 잡혀 있는 거로 아는데.

    싸늘한 목소리에 김우진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고작 B급 게이트에서 죽거나 다쳐 나오면 꼴이 볼만하겠군, 김우진.

    -…저는.

    -뭐든 하겠다고? 그럼 정신 차리고 네 할 일이나 제대로 하고 있도록.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도 없게 해 줄 테니.

    김우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상념을 끝낸 그의 앞에는 천사연이 아닌 하이드가 보였다.

    지난 며칠간 끊이질 않던 두통이 다시금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지친 몸이 제발 휴식을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정신을 짓누르는 피로에 이마를 쓸자, 하이드가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물었다.

    “김우진,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자료 줘.”

    김우진은 하이드의 말을 흘려들으며 책상에 올려놨던 자료를 건네받았다.

    박건호 팀장이 위치만 제대로 확인되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서 팀원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중국 정도면 거리가 멀지는 않으니 충분히 가능하겠지.

    “3일 뒤에 또 게이트 들어간다며. 제대로 쉬지도 않았는데 지금….”

    하이드의 잔소리에 김우진은 삐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천사연의 말대로 차라리 게이트라도 들어가는 게 나았다.

    “간다.”

    윗옷을 챙겨 입은 김우진은 자료를 손에 들고 하이드에게서 등을 돌렸다.

    “야, 김우진!”

    하이드의 외침은 거칠게 닫히는 현관문에 가로막혔다.

    ***

    테이블 위로 올라온 여우가 나를 노려보며 풍성한 꼬리를 툭툭 흔들었다. 저번에 나뭇가지를 던지고 몰래 도망쳤던 일로 아직 삐친 모양이다. 그 시선을 무시하며 엘로힘이 준 우유를 마셨다.

    어딘가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나와 여우를 둘러보던 엘로힘이 웃음을 띠고는 물었다.

    “아직도 이름을 못 정했구나.”

    “네.”

    시원한 우유를 두어 모금 들이켠 나는 컵을 내리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여우라고 불러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여우라. 너무 간단하지 않니?”

    “이름은 간단한 게 최고죠. 어때?”

    여우가 아무 울음소리 없이 고개를 픽 돌렸다. 싫다는 뜻이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여우 이름 따위가 아니었다.

    “천사연이나 하태헌에 대해서는 더 보여 줄 수 없다고 하셨죠.”

    “그래.”

    “그럼… 한이결은요? 한이결에 대한 것도 볼 수 없는 겁니까?”

    내 질문에 엘로힘이 잠시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이결의 과거가 알고 싶은 거니?”

    “그렇죠.”

    “왜?”

    왜냐고? 반사적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내게 엘로힘이 이어 말했다.

    “한이결의 과거가 네게 어떤 가치가 있지? 분명 이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한이결의 몸에 들어왔을 때,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여동생 때문에 천사연에게 휘둘리며 사는 한이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멍청하고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실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의 목숨 때문에 제 인생까지 내건 그 모습이… 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깔끔하게 잊고 네 인생을 살았어야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서 보란 듯이 행복했어야지. 그렇게 했어야지….

    한이결의 가죽을 뒤집어쓴 내 과거에게 전하고 싶던 말들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볼 수 있다면 보겠습니다. 아는 게 많을수록 확실히 도움이 될 테니까요.”

    “흐음…….”

    엘로힘이 입가를 매만지며 고민 어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였다. 틀어 둔 뉴스에서 길드 관리 본부로 화면이 전환됐다.

    [SS급 게이트 이후 6개월 만에 새로 등장한 신생 게이트의 소유권을 정하기 위한 회의가 오늘 길드 관리 본부에서 진행됩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취재 기자 연결해 보겠습니다. 박수진 기자, 그곳 상황은 어떤가요?]

    신생 게이트? 처음 듣는 내용에 엘로힘에게서 시선을 돌려 TV 화면에 집중했다.

    [네. 이곳 길드 관리 본부에서는 앞으로 1시간 후 신생 게이트 관련 회의가 열리는데요. 현재 본부 입구에는 길드 대표들의 도착을 기다리는 취재진이 모여 있어 분주한 상황입니다.]

    [회의에 참석하는 대표는 누군가요?]

    [현재는 레퀴엠 길드의 천사연 마스터, 로헌 길드의 이주하 마스터와 하태헌 부마스터, 제이나 길드의 홍시아 마스터가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스를 보던 나는 문득 하태헌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SS급 코트를 발표하기 위해 내세울 만한 이유를 엘로힘이 말해 줬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설마.

    “새로 생긴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하태헌에게 미리 알려 준 겁니까?”

    “그랬지.”

    “…이래서 하태헌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거군요.”

    SS급 코트를 새로 생긴 게이트에서 얻어 낸 것으로 발표하려면 게이트 소유를 로헌이 가져야 한다.

    현 레퀴엠이나 제이나의 상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하태헌이 회의에 참석해야 로헌에게 갈 확률이 높아지겠지. 무엇보다 하태헌이 게이트도 직접 들어가야 할 테고.

    “코트 문제도 있지만.”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여우가 피이, 하는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나와 엘로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여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하태헌, 그 아이는 천사연과 함께 있어야 한다.”

    “예?”

    생각지도 못한 답에 놀라며 되물었다.

    “하태헌 씨와 천사연이요?”

    “그래야 죽는 사람이 그나마 적어진단다.”

    “…….”

    “그 두 아이는 지금 위험한 싸움을 앞두고 있어. 그리고 그걸 천사연은 짐작하고 있겠지. 슬슬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무슨 시기 말입니까?”

    “칼리의 하수인들이 활동을 시작할 시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굳어 버린 나를 보며 엘로힘이 슬프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장난에 불과했지만, 칼리가 깨어났으니 그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겠지. 천사연을 무릎 꿇리고, 그밖에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기 위해서.”

    “대체 왜… 어째서 하필 천사연과 하태헌 씨인 거죠?”

    그 순간, 열린 창문 너머에서 바람이 훅 불어왔다. 몸이 일순 휘청일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쿠구궁―!

    “무슨…….”

    피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천둥이 울려 퍼졌다. 여우가 황급히 엘로힘의 어깨 위로 올라가 꼬리를 말았다.

    갑작스럽게 변한 주변 모습에 당황하는 내 어깨를 붙잡은 엘로힘이 눈썹 끝을 내리며 말했다.

    “강해져야 한다, 세현아.”

    “엘?”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이들이 또다시 죽을 것이고, 아마 이 세계도 더는….”

    “…….”

    “한이결의 과거를 원한다면 보여 주마. 그 아이는 네게 더는 ‘남’이 아니니까. 어쩌면 이것도 필요한 수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괜찮은 겁니까?”

    “그래.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안 된다. 최소한 꿈을 두 번은 더 꿔야 해.”

    “한이결의 과거를 보는 것과 제 꿈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검은 사탕은 매일 자기 전에 먹고 있지만 두 번째 꿈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꿈을 꿀수록 한이결보다 권세현, 네 기운이 강해지니까. 그래야만 우리가 네게 줄 책의 힘을 견뎌 낼 수 있단다.”

    “책의 힘이요?”

    “그래. 이미 한번 경험해 봤으니, 이해하기 더 쉽겠지.”

    “아.”

    천사연을 볼 수 있었던 붉은 책.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로힘이 조금은 안심한 눈빛을 했다.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기다란 은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미리 말해 두자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칼리에게 대적하는 중요한 인물… 천사연이나 하태헌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겼지만, 한이결에 대한 것은 딱 한 권밖에 없단다.”

    “…….”

    “그 아이의 과거는 네 예상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정말 보겠느냐?”

    내 예상과 다르다고? 이번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나도 더는 말리지 않겠다.”

    엘로힘이 따스한 손길로 내 이마를 쓸어 넘기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어느새 바람은 그치고 하늘은 평소처럼 먹구름 없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세 번째 꿈이 끝나는 날, 서재로 찾아오렴. 기다리고 있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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