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주하는 오래간만에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차려입고 차에 올라탔다. 길드 관리 본부에서 1시간 뒤에 시작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SS급 게이트가 새로 나타났을 때를 떠올린 이주하는 옆에 앉아 있는 하태헌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새로운 게이트는 본래 언제 어디에서 등장할지 그 누구도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하태헌이 해 준 예언자의 이야기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새로운 게이트가 등장할 거고, 그것은 별다른 문제 없이 로헌의 소속이 될 것이다. 그러면 코트의 출처도 해결될 거라는 예언자의 말을 처음 전해 들을 당시, 이주하는 하태헌이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게, 기껏 붙여 쓴 휴가가 다 끝나기도 전에 길드로 들이닥쳐서는 뱉어 낸 말이 저런 거라. 그것도 화가 난 것처럼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서는.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이네.’
하태헌은 감정 기복이 원체 없던 터라 이렇게 상태가 저조해 보이는 것이 꽤 낯설었다.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이주하가 입을 열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잘될 거야, 태헌아.”
“…예.”
그 상냥한 위로에 하태헌이 찌푸렸던 미간을 억지로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 본부에 도착한 차가 멈춰 섰다. 회의 참가자를 기다리고 있던 방송 관계자들이 이주하와 하태헌을 발견하고 플래시를 터뜨리며 몰려들었다.
“로헌 마스터!”
“현재 심정이 어떻습니까?”
“저번 SS급 게이트는 레퀴엠에게 뺏겼는데, 이번에는…!”
“이주하 마스터!”
게이트의 등장은 언제나 소란을 몰고 왔다. 쏟아지는 기자들을 경호원이 막아서는 사이에 무사히 본부 홀로 들어선 이주하와 하태헌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멈춰 섰다.
짙은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당황해서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이주하가 하태헌의 앞을 막아서며 먼저 알은체를 했다.
“천사연 마스터.”
“간만에 보는군요. 이주하 마스터.”
제게 내민 커다란 손을 망설이다 잡은 이주하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얼굴. 부드럽게 뻗은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술 끝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살이 빠졌는지 볼이 살짝 들어간 데다 눈 밑이 검어 인상이 이전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귀걸이?’
불안한 마음으로 천사연을 살펴보던 이주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천사연의 귀에 머물렀다. 평범한 귀걸이는 아니었다. 이주하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챈 천사연은 빙긋 웃으며 악수를 마쳤다.
“새로운 게이트를 얻게 되겠군요. 미리 축하를 보내죠.”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닌가요?”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높은 확률로 확정인 것 같은데.”
이주하가 수상하다는 듯이 눈가를 좁혔다. 저번 게이트가 SS급이었던 만큼, 이번 게이트도 혹시 모르니 레퀴엠이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떠보는 건가? 아니, 천사연이 그런 성격은 아니다. 혼란에 빠진 이주하를 사이에 두고 천사연과 하태헌이 서로를 마주 봤다.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는 입과 달리 자신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을 알아챈 하태헌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이주하 마스터.”
“뭐죠?”
“먼저 올라가시겠습니까? 하태헌 부마스터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주하가 뒤에 있던 하태헌을 바라봤다. 당연히 무시할 줄 알았던 하태헌은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알겠어.”
천사연과 하태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번갈아 본 이주하가 결국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로 올라갔다. 넓은 홀에 둘만 남게 된 천사연과 하태헌이 일정 거리에 마주 섰다.
“제법 긴 휴가를 보냈더군.”
먼저 입을 연 이는 천사연이었다. 하태헌은 아무런 반응 없이 묵묵히 그를 노려봤다.
“그래. 첫 휴가는 어땠지? 자랑을 좀 해 보지 그래.”
“글쎄요.”
자랑이라. 그 말에 하태헌이 아주 느릿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좋은 사람과의 여행은 언제나 즐겁지 않겠습니까.”
“…….”
천사연이 드물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렇지.”
한참 뒤에야 대답을 꺼낸 천사연이 주제를 돌렸다.
“이번 게이트에 관해서 제안할 게 한 가지 있는데.”
“제안?”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 줬으면 좋겠군.”
곧 천사연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을 이었다. 잠자코 듣던 하태헌이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하면 제 쪽이 얻는 이득은?”
“괜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내가 돕겠지.”
“어째서 마스터가 아닌 제게 이 얘기를 하는 겁니까?”
“네가 진심으로 설득하면 이주하 마스터도 허락할 거라고 보는데.”
부드러운 말에 하태헌이 대놓고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천사연은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
“그럼 받아들인 것으로 알지.”
제 할 말만 하고 깔끔하게 등을 돌린다. 앞서 걸어가는 천사연의 뒷모습을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바라보던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그게 끝입니까?”
“무슨 뜻이지?”
“더 물어볼 것이 있어 보이는데. 아닙니까?”
성큼성큼 걷던 천사연의 걸음이 한순간 멈췄다. 잠자코 반응을 기다리던 하태헌은 섬찟한 기운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흠….”
입가를 매만지며 숨을 길게 내쉰 천사연은 자신도 모르게 흘려보낸 기운을 다시 갈무리했다.
“이런. 미안하군.”
몸을 다시 틀어 하태헌과 시선을 마주한 천사연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
“누가 먼저 개 목에 목줄을 채울지 내기를 하자고 했었지.”
불쾌했던 그때 기억과 함께, 천사연에게 휘둘려 한이결을 몰아세웠던 자신의 지난 행동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복잡해진 머릿속에 하태헌은 애꿎은 입 안을 짓씹었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 둘 다 실패한 것 같군.”
“…실패?”
“아닌가? 나는 놓쳤고, 너는… 보아하니 버려진 것 같은데.”
버려졌다는 말에 하태헌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챈 천사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만 가지. 둘이 나란히 회의에 늦으면 그것도 볼만하겠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천사연의 모습에 하태헌이 피곤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이주하 마스터어~.”
회의실을 막 들어가려던 이주하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밝고 유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상대로 홍시아였다.
“먼저 와 있었어?”
“자기 기다렸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한 홍시아가 이주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회의실 문을 대신 열어 줬다.
“근데 왜 혼자야? 하태헌 부마스터는?”
“아래층에. 천사연 마스터랑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흐응.”
“홍시아 마스터는 혼자 온 거야? 김나율 부마스터는 바쁜가 보네.”
“지금 게이트에 들어가 있어. 웬만하면 안 보내려고 했는데… 알잖아, 요즘 우리 손 부족한 거.”
장난을 담아 대답한 홍시아가 걸치고 있는 베이지색 정장 재킷 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그 정도야?”
“흐음. 사람을 더 뽑으면 좋겠는데, 막상 뽑으려고 해도 쓸 만한 놈들이 없기도 하고….”
턱을 괸 채로 투덜거리던 홍시아가 이내 골치 아픈 일을 털어 내듯 웃으며 이주하에게 물었다.
“로헌은 어때? 블런 길드한테 넘겨받았던 게이트 말이야. 다 처리됐어?”
“우리도 아직. 그나마도 겨우 진행하고 있고.”
“다들 비슷비슷한가 보네.”
“이미 정해진 일정에 게이트를 추가로 집어넣으려니까 쉽지 않긴 하더라.”
이주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회의실 문이 열리며 천사연과 하태헌이 들어왔다.
“유명인들 어서 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하는 홍시아를 천사연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외면했고 하태헌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하여튼 무시가 일상이라니까.”
홍시아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는 천사연을 탐탁지 않게 노려보며 한 마디 하자,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저번에 보낸 내 연락도 무시했잖아.”
“무시할 만했으니까.”
“연락?”
어쩐 일로 천사연에게 연락을 했나 싶어 이주하가 슬쩍 묻자, 홍시아가 마침 잘됐다는 기색으로 이주하와 그 옆에 앉은 하태헌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한이결 능력자 일로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연락한 건데, 메시지고 전화고 다 씹더라고!”
“한이결 능력자도 핸드폰 있지 않아?”
“그쪽은 보내도 안 읽은 지 한참이라…. 천사연 마스터는 읽고 씹더라.”
하태헌이 딱딱한 목소리로 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이결 능력자는 왜 찾으십니까?”
“응? 딱히 대단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잘 지내나 해서? 수연이가 많이 궁금해하고 있어. 연락해도 답장이 없으니 뭐.”
하태헌은 그제야 잊고 있던 차수연을 떠올렸다. 레퀴엠뿐만 아니라 제이나 길드와도 친분이 있었지. 이렇게 생각하니 한이결은 알고 지내는 이가 참으로 다양했다.
속으로 혀를 찬 하태헌이 입을 열려는 그때, 천사연이 답변을 가로챘다.
“이런. 이결이는 지금 사정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는데. 그런 이유였다면 나중에 다시 내용 보내. 대신 전달해 주지.”
“어머, 자리를 비워?”
의외라는 얼굴로 홍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어디로 갔길래 연락이 안 돼?”
“중국으로 갔습니다.”
이번 대답은 하태헌이었다. 천사연을 보고 있던 홍시아와 이주하의 얼굴이 동시에 옆으로 돌아갔다.
“차수연 씨라면 저도 잘 알고 있으니, 회의가 끝나면 따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아니.”
홍시아와 이주하의 얼굴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내가, 전해 주도록 하지. 이결이 보호자는 나니까.”
“저희 셋은 여러 번 함께 만났었습니다. 한이결이 돌아오면 차수연 씨를 불러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홍시아와 이주하가 서로 눈빛을 나눴다.
“글쎄. 이결이가 한국에 도착하면 나부터 찾아올 텐데. 빨리 연락이 닿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는 걸 추천하지.”
“아니, 저기….”
“그건 장담할 수 없어 보이는데.”
“두고 보면 알겠지.”
“둘 다 내 말 듣고 있어?”
천사연과 하태헌의 몸에서 동시에 날카로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회의실 분위기에 지켜보던 홍시아와 이주하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의 흐름에 긴장감이 차올랐다. 천사연의 입꼬리 끝이 올라가고, 하태헌의 눈썹이 움찔한 그 순간이었다.
벌컥!
“다 와 계셨군요.”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최미진과 본부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실을 한번 둘러본 최미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뭡니까?”
“아무것도.”
재빨리 기운을 갈무리한 천사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모른 체했다. 그 태연한 행동에 오히려 의심만 커진 최미진이 재차 따져 물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던 거죠?”
“사고라니. 그런 말은 섭섭한데, 최미진 센터장.”
“…….”
한참을 천사연만 노려보던 최미진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뭐, 그래요. 바쁘니까 잡담은 그만하고 일이나 합시다.”
그들 맞은편 책상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던지듯 내려 둔 최미진이 자리에 앉으며 직원들에게 손짓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