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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62)화 (162/394)

162화

  

“어제 해 준 설명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하겠지만, 급하게 들어 봤자 좋을 것은 없단다.”

식탁에 과일과 시럽을 뿌린 핫케이크를 놔 준 엘로힘이 말했다.

“최종적으로 칼리를 막아야 하는 건 맞지만, 네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이 남았단다.”

“중요한 일이요?”

“네가 첫 번째 대가를 받아들인 이유와도 연관이 있지.”

“2층 서재에서 봤던 붉은 책 말입니까?”

“그래. 뒷이야기가 궁금하겠지. ‘어비스’ 4권 이후의 내용도 그럴 테고.”

그거야 당연히 궁금했다. 나는 어제부터 줄곧 묻고 싶었던 내용을 꺼냈다.

“엘. 하태헌 씨가 주인공인 ‘어비스’를 엘라하가 쓴 거라면… 내가 본 붉은 책에도 주인공이 있는 겁니까?”

“물론이란다.”

역시 그런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미안하지만, 책을 직접 읽게 해 줄 수는 없단다. 그러면 또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해. 하지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말해 줄 수는 있단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나중에.”

엘로힘이 내 앞으로 핫케이크를 재차 밀어 주며 다정하게 덧붙였다.

“먹으렴. 사탕을 먹고 억지로 과거의 꿈을 꾸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힘이 소모되니까.”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먹자. 먹어야 뭐든 하겠지.

한숨을 내쉬며 포크를 들고 핫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폭신하고 달콤한 핫케이크 맛이 느껴졌지만, 기분은 여전히 저조했다.

‘김우진도 핫케이크 잘 만드는데….’

설상가상으로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기억나기 시작했다. 이럴까 봐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 거였는데. 마치 모래를 씹는 심정으로 핫케이크를 먹으며 한국에 있는 이들을 생각했다.

다들 별일 없으려나.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는 김우진이 제일 걱정스러웠다. 부디 민아린 씨가 잘 케어해 줘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까 권정한한테 김우진 그만 놀리라고 말도 못 해 줬네.

박건호 팀장님이나 우서혁 씨는… 뭐, 잘 지내겠지. 그 둘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천사연은…….

“함께 지냈던 아이들이 보고 싶은가 보구나.”

내 상태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 엘로힘이 샐러드가 담긴 그릇을 새로 가져왔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자꾸 어디서 이렇게 요리를 가져오는 건지 신기했다.

“그냥 조금요.”

머쓱함에 목덜미를 매만지며 웃자, 그가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웃었다.

“보고 싶을 만하지. 좋은 아이들이니.”

“그렇죠.”

“보여 줄까?”

“예?”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떻게 보여 준다는 거지?

‘아. 능력으로 대신 봐 준다는 건가?’

그거라면 나쁘지 않다. 그냥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만 알아도 기분은 훨씬 나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니 엘로힘이 싱긋 미소 지으며 식탁 정면에 있는 벽 일부분을 손으로 힘주어 눌렀다. 그러자 쿠궁, 건물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벽이 한 칸 뒤로 빠져나가며 빈자리에 커다란 TV 화면이 생겨났다.

“…….”

상상도 못 했던 최첨단 시설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내 얼빠진 표정에 엘로힘도 덩달아 어리둥절해했다.

“TV란다. 혹시 모르니?”

“아뇨, 압니다. 근데 TV가 왜 여기에….”

“우리도 TV 정도는 본단다.”

그렇군요….

신전에 사는 데다, 신에 가까운 존재이고, 능력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데도 TV를 설치해 놓다니. 떨떠름한 나를 두고 엘로힘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다행히 뉴스를 할 시간이구나.”

어째 입맛이 뚝 떨어져서 포크를 놓고 대신 찻잔을 들었다. 향긋한 차로 입가심을 하며 틀어진 화면에 시선을 보냈다.

[지난 2월 25일, C급에서 A급으로 등급이 올라가며 재각성 판정을 받았던 레퀴엠 길드 소속 김우진 능력자를 기억하시나요? 김우진 능력자가 훈련을 끝내고 첫 게이트 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소식입니다.]

아나운서 옆으로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김우진의 사진이 띄워졌다. 천사연과 함께 공식 입장을 발표할 때 찍힌 사진인가.

[G31 구역의 B급 게이트는 제이나 길드가 담당하고 있으며, 레퀴엠 길드와 협력을 통해…….]

화면이 전환되며 클리어팀이 게이트 밖으로 막 빠져나오는 영상이 틀어졌다. 그 사이로 유난히 새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우진이었다.

[다음은 현장 인터뷰입니다. 물리지원팀 박혁준 능력자와 김우진 능력자가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 옆에 서 있는 김우진이 보였다. 나와 지낼 때보다 날카로워진 턱선과 어둡게 내려온 다크서클 때문인지, 이전보다 더 예민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여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처음으로 선두에서 게이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김우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곁에 있던 녀석을 TV 화면으로 마주한다는 게 신선했지만, 내가 없을 때 게이트를 들어간 건 아무래도 좀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저렇게 순순히 인터뷰하는 것도 좀 찝찝하고. 김우진은 낯가림이 심해서 인터뷰 같은 거 하기 싫어할 텐데, 웬일이지?

[다음 일정은 바로 3일 후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보통 일주일 정도 휴식 기간을 가지는데, 이렇게 급하게 게이트에 들어가는 이유가 있나요?]

김우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저 제 개인적인 욕심입니다.]

그것으로 인터뷰 영상은 끝이 났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김우진, 이 자식이 정말.’

가뜩이나 지쳐 보이는데, 고작 3일 쉬고 게이트를 또 들어간다고? 왜 저렇게 무리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국이었으면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착잡한 마음으로 찻잔에 담긴 다홍빛 찻물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김우진이 C급일 때를 떠올렸다.

하긴. 녀석은 예전에 C급일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게이트를 쫓아오곤 했다. A급으로 재각성도 해 놓고 계속 훈련만 해 왔으니,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치지 않게 조심했으면 좋겠다. 물론 레퀴엠에서 잘 관리해 줄 거라고 믿지만….

“다른 아이들도 모두 잘 지낼 거란다.”

“그렇겠죠.”

TV를 끈 엘로힘이 내게 다가왔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계속 저 상태로 둘 테니 심심할 때마다 보렴.”

그가 건네주는 리모컨을 받아 들며 쓰게 웃었다.

***

신전 기둥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새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보이고, 아래로 넓게 초원이 펼쳐져 있다. 쉽사리 마주하기 힘든 풍경을 앞에 두고도 아까 봤던 뉴스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선택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만약 한국을 떠나온 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래. 그들이 좀 그리웠다. 이제 와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우스웠지만, 더는 억지로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꽤 들었던 건가.

어쩌면 하태헌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 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아….”

안 되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차라리 엘라하가 있는 서재에 가서 볼만한 책이라도 추천받는 게 나아 보였다.

혀를 차며 자리에 일어서려는데, 앞에 있는 수풀이 파삭거리며 흔들리더니 새하얀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침에 만났던 여우였다. 입에 나뭇가지를 문 채로 달려온 아이가 내 발아래에 그것을 뱉어 냈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높게 쳐들며 꼬리를 막 흔들었다. 무슨 행동인지 몰라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뭐. 던져 달라고?”

피익!

정답이었는지, 이제는 숫제 당장 튀어 나갈 것처럼 내 주변을 빙빙 돌며 뛰어다녔다.

여우가 아니라 개였나? 아니, 따지고 보면 여우도 갯과니까 그게 그건가?

속으로 허탈하게 웃으며 나뭇가지를 주워서 던져 줬다. 파바박! 여우가 달려 나갔다.

꽤 힘줘서 던졌는데도 여우는 금방 돌아왔다. 오히려 꽤 만족스러웠는지, 아까보다 배로 신나 보였다.

‘귀찮은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더 놀아 줄 마음이 없었다. 이대로 무시하고 방으로 돌아갔다간 발목이라도 물릴 것 같으니, 나뭇가지를 멀리까지 던지고 잽싸게 도망쳐야겠다.

“흡!”

이번에는 진짜로 온 힘을 다해 엄청 멀리 던져 버렸다. A급 신체가 전력으로 던진 나뭇가지는 금세 수풀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만히 서서 저 멀리 날아가는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던 여우가 파다닥 뛰어갔다.

이때다. 또 붙잡히기 전에 급히 몸을 돌렸다. 아예 바람 능력까지 써서 빠르게 신전 안으로 도망치자 뒤늦게 피이이, 하는 기운 빠진 소리가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안하다. 나 말고 엘로힘한테 놀아 달라고 해.

중앙 홀을 지나 아치형으로 된 대리석 문 앞에 서자, 엘로힘이 없는데도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아무래도 내가 편하게 들를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둔 모양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슬쩍 얼굴을 들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엘라하가 말을 걸어왔다.

“그 아이나 더 놀아 주지, 여기는 왜 와?”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로 대답하자,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누워 있던 엘라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를 보고 있었습니까?”

“이번에는 너니까.”

“예?”

영문 모를 말에 눈만 깜빡이니, 엘라하가 바닥으로 내려오며 손짓했다.

“들어와. 어지간히 심심해 보이는데.”

“심심하긴 하죠.”

엘라하가 말을 바꾸기 전에 곧장 서재에 발을 들이고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여기에….”

“네가 볼만한 책이 있냐고? 많지는 않아도 있긴 하지.”

엘라하가 걸친 기다린 옷이 나풀거릴 때마다 향긋한 꽃 내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엘라하도 키가 꽤 컸는데, 엘로힘과 달리 보고 있자면 어딘가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자.”

“…다른 거 없습니까?”

엘라하가 책장에서 뽑아 준 책은 식물도감이었다. 겉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도감이라는 글씨에 질색하자, 그가 입꼬리 끝을 가볍게 올렸다.

“어린이 동화라도 찾아 줘?”

엘라하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렇게 웃는구나.

나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네요.”

“흠, 그래.”

허공을 날아 높은 책장에서 다른 책을 꺼낸 엘라하가 그것을 내밀며 경고했다.

“뭔가를 보는 건 상관없는데, 무조건 나나 엘에게 물어보고 꺼내. 여기는 저 허술한 집에 놔둔 서재와 많은 부분이 다르니까.”

“알겠습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대가 없이 남의 과거를 훔쳐보는 일은 두 번이면 족하잖아.”

“…….”

마지막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박혀 왔다.

‘두 번이라.’

하나는 ‘어비스’를 뜻하는 걸 테고, 나머지는….

“걱정하지 마세요.”

어깨를 으쓱이며 애써 가볍게 답하자, 잠시간 나를 응시하던 엘라하가 먼저 등을 돌렸다. 서재 중앙으로 돌아가는 그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어린 왕자’라고 써진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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