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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61)화 (161/394)

161화

41. 어린 왕자의 장미꽃 

날카로운 바람이 스치자,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잎이 떨어져 나갔다. 말라비틀어진 잎 몇이 겨우 달린 메마른 나무를 바라보던 나는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지루한가?”

“아닙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기다란 손가락이 새하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간단하게 답하며 행동에 맞춰 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남자가 매끈한 입술에 담배를 끼고 불을 붙여 주는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이내 볼이 패도록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그대로 내 얼굴을 향해 훅 뱉어 냈다.

“…….”

매캐한 냄새와 시야를 가리는 뿌연 연기를 당장 손으로 흩트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곳에 오면 남자의 기분은 항상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차피 이 정도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보고 있었지?”

“별걸 다 궁금해하십니다.”

그렇다 한들, 그의 기분에 맞춰 알랑댈 마음은 없었다.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픽 웃은 남자가 반절도 넘게 남은 담배를 내게 내밀었다.

“가자.”

역시 심술부릴 마음으로 꺼내 든 담배였군. 담배를 구겨 끄며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의 뒤를 쫓았다. 길게 이어진 정원을 지나 정문으로 나오자 대기 중이던 기사가 차 뒷문을 열었다.

“권세현.”

일정 거리에서 더 따라오지 않는 나를 돌아보며 남자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타.”

“이사님, 저는….”

“토 달지 말고.”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나와 남자를 번갈아 보는 기사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게 꽤 거슬렸지만, 여기서 고집부려 봤자 나쁜 꼴만 보이게 될 게 뻔했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먼저 차에 올라탔다.

나와 남자가 탄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는 차 안은 말 한마디 오가는 것 없이 고요했다. 다리를 꼰 채로 창밖을 바라보던 남자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 왔다.

“…….”

손바닥이 마주 닿고, 손가락끼리 엉켜들었다. 마치 뱀처럼 미끈하고 차가운 감각에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는데, 룸미러로 운전 중인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행동에 당황하던 기사는 내 시선에 곧 불편함이 담긴 헛기침을 작게 뱉어 냈다.

운전기사가 바뀐 지 이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나를 마주칠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예상이 갔다.

울컥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며 손을 빼내려고 힘을 줬지만, 그보다 더 강한 힘이 손바닥을 짓눌렀다. 그럼 그렇지. 혀를 차며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달려 차가 저택에 도착해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손을 놓지 않고 있던 남자가 먼저 내렸다. 뒤따라 밖으로 나가려는데,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놨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뭐지?’

남자의 뒤를 쫓아 안으로 들어서며 들키지 않도록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했다.

「일요일에 본가 빈다는데. 같이 가 볼래요?」

메시지를 보낸 이는 연선우였다. 일요일이라. 낮이라면 두세 시간쯤은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이따가 전화라도 하자고 생각하며 일단 핸드폰은 다시 집어넣었다. 타이밍 좋게도 그때 남자가 뒤돌아봤다.

“지금 생각났는데.”

“예?”

“새로 들어온 양주. 가져와.”

코트를 벗어 거실 소파에 대충 던져두며 남자가 명령했다. 양주라. 일찍 돌아가긴 글렀네.

목을 조이던 넥타이와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정장 재킷을 식탁에 걸쳐 두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관리인이 내게 눈인사를 보냈다.

“일주일 전에 새로 들여온 거 달라고 하셔서요.”

“아, 네. 준비해 드릴게요.”

“옮기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관리인이 술상을 준비할 동안 핸드폰을 다시 꺼내 연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일이 텍스트를 쳐서 답장하는 건 귀찮았다.

[형님?]

“그 형님 소리 언제까지 하게.”

[형 맞잖아요.]

능청스럽게 덧붙인 말에 고개를 저으며 주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 벽면을 가득 메운 커다란 창문 밖으로 한강 야경이 보였다.

“일요일 몇 시?”

[형님 편할 때요. 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실 테니까 마음 놓고 와요.]

“그럼 낮에 갈게. 정확한 시간은 토요일에나 알 것 같은데.”

[전 상관없어요. 일요일은 시간 다 비워 둘 거니까.]

덧붙인 말에 약간 부담스러워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제가 그러고 싶은데요? 그리고 사진 필요하잖아요.]

“급하게 필요한 건 아니야.”

[그래도요. 온 김에 밥도 같이 먹고.]

“밥 같은 소리 한다.”

천진한 말에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딱딱했던 목소리가 조금 풀린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녀석이 한결 부드럽게 답했다.

[그럼 토요일에 연락해요.]

“그래.”

통화를 끝내고 야경을 구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관리인이 서빙 카트를 끌고 나왔다. 술상으로 채워진 서빙 카트를 건네받아 1층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남자에게 있어 잠만 자는 2층 침실보다도 더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깊게 들어와 복도를 한 번 더 꺾어야 보이는 이 방은 구석진 데다 창문이 없어 불을 켜도 어딘가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로 서빙 카트에 올렸던 트레이를 옮겼다.

침대 맞은편은 커다란 스크린 화면이 있고, 양옆에 대충 봐도 비싸 보이는 음향 기기가 즐비했다. 진열장을 꽉 채운 DVD 케이스를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거꾸로 놓인 잔을 뒤집어 얼음을 넣었다. 남자가 씻으러 간 지 대략 30분 정도 지났으니, 슬슬 나올 텐데.

“눈치가 참 좋아.”

생각이 끝나자마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반은 못 되겠군. 집게로 들고 있던 얼음을 잔에 마저 넣으며 몸을 돌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새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가 다가왔다. 방금 씻어서 그런지, 유난히 피부가 창백해 보였다. 긴 속눈썹 아래로 반쯤 가려진 은회색 눈동자를 넋 놓고 바라보다 그만 집게를 뺏겼다.

“마실 거지?”

“안 마십니다.”

“그래.”

순순히 대답하며 남자가 잔을 하나 더 뒤집어 얼음을 넣기 시작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순간 마시겠다고 대답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사님.”

“자고 가.”

“…….”

얼음이 든 잔에 양주를 채워 낸 남자가 억지로 잔을 내 손에 쥐여 주고는 진열장으로 움직였다.

“같이 영화라도 보지. 이 중에 마음에 드는 것 있나? 아니면 따로 결제해도 되고.”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한숨을 몇 번이고 삼켜 내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뭐라고 말한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것이다.

“시시하네.”

입가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그는 이내 오래된 홍콩 영화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남자는 간혹 저렇게 옛날 것을 찾고는 했다.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영화나 책, 노래 같은 것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복잡해져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서서 그러지 말고 앉지.”

나와 시선을 맞춘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면 누워도 좋고.”

“저 안 씻었습니다.”

“상관없어.”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냉정한 눈길을 담담히 받아 내며 말했다.

“주무시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뭐… 마음대로 해. 할 수 있다면.”

의미심장한 답에 먼저 시선을 피했다. 달그락. 남자가 잔을 가볍게 흔드는 손길에 따라 얼음이 부딪혔다.

***

볼과 눈가를 건드리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으…….”

벌레라도 날아다니나. 거치적거려서 도통 잠을 더 잘 수가 없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버티던 나는 결국 눈을 번쩍 떴다.

“…….”

피이.

벌레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커다란 놈이었다. 새하얀 몸에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나는 동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났던 그 여우였다. 하늘도 막 날아다니던.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피이이.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키자 방금까지 내 얼굴에 코끝을 비비던 녀석이 후다닥 도망갔다. 어디로 숨나 지켜봤더니, 문을 열고 들어선 엘로힘의 뒤로 쏙 사라졌다.

“이런.”

나와 마찬가지로 여우를 알아챈 엘로힘이 부드럽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잘 잤니?”

“그럭저럭요.”

“따듯한 물이다. 마시렴.”

엘로힘이 건네는 물 잔을 고맙게 받으며 마른 목을 축였다.

“몸 상태가 어떨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나쁘지 않아 보이는구나.”

“음, 뭐. 네. 그다지 나쁜 과거는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꿈이었다.

“꿈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긴 했지만요.”

그때 마셨던 양주 향이 지금도 입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남자가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시고 거의 기듯이 집으로 돌아갔었지.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났으면, 일어나서도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익숙해질 동안은 힘든 꿈이 없기를 바라야겠구나.”

엘로힘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열린 문 근처를 서성이는 여우를 발견했다. 아예 도망간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아아.”

내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엘로힘도 여우를 알아채고는 귀엽다는 투로 말했다.

“네가 어지간히도 궁금한가 보구나. 원래도 호기심이 많은 아이지.”

“처음 왔을 때 이미 한 번 만났습니다. 그 후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네 곁에 있던 하태헌이 무서웠겠지. 저 아이에게 SS급의 기운은 꽤 날카롭게 느껴질 테니까.”

잠시 텀을 두고 눈동자를 굴리던 엘로힘이 장난처럼 덧붙였다.

“하태헌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

토도독 달려와 침대 아래에서 몇 번 폴짝거리던 여우가 결국 공중을 날아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다가 엘로힘에게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글쎄. 딱히 지어 주지 않았구나. 내게는 모두 같은 아이들이라서.”

피이.

다리를 모으고 앉은 여우가 나를 바라보며 작게 울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나도 아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참에 네가 이름을 지어 줘도 좋겠구나.”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 물론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불러도 안 오겠지만.”

그게 뭐야. 장난치는 건가 싶었지만, 엘로힘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이름을 지으라니. 나한테 그런 센스가 있을 리가. 목덜미를 매만지다 어색하게 대답했다.

“고민해 볼게요.”

“그러렴.”

“…평범한 동물은 아닌 거 맞죠?”

“으음.”

내 어깨를 다정한 손길로 두드린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초기에 생겨난 게이트에서 고스트 타입의 몬스터 한 마리를 연구차 데려왔는데, 어느 날 자식을 낳았더구나. 그러고는 죽어 버렸지. 저 아이들을 남겨 두고.”

“자, 자식이요?”

“몬스터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다른 세계의 생명체니까. 그들도 대부분은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식을 낳겠지.”

“설마 토끼나 고양이도?”

“새하얗게 생긴 아이들은 모두 형제란다.”

피이이.

자기 얘기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여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울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나와 엘라하의 힘을 많이 흡수한 터라, 이제는 몬스터보다는 우리와 더 가까운 존재들이란다.”

평범한 동물이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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