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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60)화 (160/394)

160화 

엘로힘이 해 준 이야기는 그들의 과거라기보단, 신화나 동화 이야기를 듣는 느낌을 줬다. 칼리가 떠났다는 것을 끝으로 입을 다문 엘로힘에게 물었다.

“왜 떠난 거죠?”

“우리에게서 얻을 것을 다 얻었으니까.”

“맹세 말입니까?”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안전하게 지낼 장소와 이 세계의 기본적인 지식, 마지막으로 맹세를 이용해서 우리의 손을 묶어 두는 것까지.”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한 엘로힘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이용. 그래. 칼리는 우리를 이용했단다. 그리고 나와 엘라하는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지.”

가만히 대화를 듣던 엘라하의 표정이 점차 창백해졌다. 속이 안 좋은 듯, 이따금 손으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짧게 뱉어 냈다.

“칼리가 우리를 배신하고 떠나간 지 1년 만에 세계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통로가 열리고,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침범해 오기 시작했지. 그 영향으로 인간들도 변화했고.”

통로가 열렸다고? 별로 어려울 것 없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챘다.

“게이트….”

나는 ‘어비스’에서 나왔던 게이트의 설명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게이트가 등장했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는 사람들이 능력을 각성했다. 그럼 이게 다 칼리라는 그 존재 때문이라고?

“그게 가능합니까?”

“우리도 몰랐단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애당초 칼리가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건너왔기 때문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지. 자세한 방법은 그 아이만이 알 거고.”

“하지만 생명체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칼리는 자신이 인간들을 진화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다. 약한 이들은 도태되거나 죽고, 강한 이들만이 살아남아 미래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

“그래야 제대로 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하더구나.”

상상을 뛰어넘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상을 가진 이가 진짜로 있었다니.

“고작 게이트로는 완벽한 진화를 이뤄 낼 수 없다고 여긴 칼리는 좀 더 강한 재앙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앞에 놓인 연녹색 찻물에서 일순간 붉은빛이 스쳐 지나갔다.

“완벽한 신이 되기 위해서 재앙의 역할을 해 줄 인간을 찾아다녔지.”

“…찾았습니까?”

“그래.”

엘로힘은 그게 누구인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엘로힘은 다른 말을 꺼냈다.

“어쨌든 칼리는 계획에서 가장 큰 걸림돌인 우리를 죽이지 못하니, 자신을 대신해서 행동할 이들을 여럿 뽑았다. 그들을 세현아, 너는 이미 만났단다.”

이미 만났다니? 급히 머리를 굴려 지금까지 만나 온 이들을 나열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그들이 사마엘과 인형술사입니까?”

“그 둘 말고도 더 있다. 아직 나서서 활동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특히 정신계 능력자인 사마엘을 추종하고 따르는 이들은 그 수가 상당하다.”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이라면 납치됐을 때 만났습니다.”

“그건 아주 소수란다. 사마엘의 능력으로 이지를 잃은 경우도 있지만, 칼리의 사상에 동의하고 진심으로 따르는 자들도 많아.”

“하…….”

납치당한 기억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다쳐서 쓰러진 권정한과 지배당한 에드워드를 지키기 위해 따라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그때 겪은 소름 끼치는 일들은 정신 깊숙이 박혀 버리고 말았다.

그런 놈들이 더 있다니. 심지어 사마엘의 정신 지배를 당하지 않고 개인 의지로 따른다고?

“세현아. 알고 있겠지만 그들은 너를 노리고 있단다. 칼리의 힘이 닿은 이들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아.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지.”

“한이결의 바람 능력 때문입니까?”

“능력은 중요하지 않아. 실제로 네가 한이결이 되기 전까지는 그들은 관심도 없었으니까.”

곧바로 나온 엘로힘의 대답에 당황했다. 당연히 공중 지원이 가능한 바람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것은 칼리를 따르는 이들이 또 접근해 올 거고, 너는 그에 맞는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란다.”

“저번처럼 주변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저도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떠나온 거고요. 혹시 아주 오랫동안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상황이 달라집니까?”

“아니. 그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고, 여길 나가면 언제든 발각될 위험이 있다. 그전까지는 하태헌이 곁에 있었으니 괜찮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부드럽게 웃는 엘로힘의 얼굴을 바라보다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70일을 마저 지내고 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뜻이군요.”

“현재로서는 그 길이 가장 안전해.”

“저도 계속 피해 다닐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무섭습니다.”

“맞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엘로힘이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그 위에 새까맣고 둥그런 사탕이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게 필요하지.”

“사탕이요?”

사탕으로 대체 무엇을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해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엘라하가 그것도 못 알아듣냐는 눈빛을 했다.

“사탕이 아니라 꿈이 필요한 거란다. 물론 단순한 꿈이 아니라 정확히는 네 과거가.”

“…….”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엘라하가 이제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세현아. 꿈을 이용해서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그래야 네가 능력을 좀 더 확실하게 지각할 수 있어서란다.”

“한이결이 아닌 너한테도 능력이 있다는 뜻이야.”

엘라하가 답답하다는 듯이 까칠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동안 한 번도 못 느꼈어? 이상한 적 많았잖아. SS급 게이트에서 너만 모래 속으로 끌려들어 가지 않았던 거나, S+급이 된 벤시의 주술이 통하지 않거나. 뭐, 불안정한 상태니까 항상 막아 낸 건 아니긴 하지만.”

“아니, 그….”

“가장 최근에는 SS급 정신 지배도 제대로 차단했고. 근데 어떻게 몰라?”

“잠깐만요. 잠깐.”

갑자기 밀려든 예상치 못한 정보들에 두통이 번졌다. 엘라하의 말을 막아 내며 엘로힘을 돌아봤다.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음….”

엘라하와 나를 어색하게 지켜보던 엘로힘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현아. 너에게도 능력이 있단다.”

“무슨… 저는 그런 거 없습니다.”

“아니, 있다. 네 과거를 우리는 정확히 모르니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있는 건 확실해. 내가 보기에는 죽기 직전에 각성한 것 같구나. 그래서 능력 덕분에 좀 더 쉽게 통로를 건너온 것 같고.”

“제가 살던 세계는 게이트나 각성자가 없습니다.”

“능력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강렬한 경험을 겪는다면… 낮은 확률로 각성할 수 있는 것 같구나. 그곳과 여기는 다르지만 같으니까.”

엘라하보다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죽기 직전에 각성이라니. 내 진짜 몸은 이미 한참 전에 재가 되어 사라졌을 테고, 이제는 한이결의 몸인데. 그런데도….

“권세현의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겁니까?”

“쓸 수는 있어. 하지만 한이결의 바람 능력과는 다를 거다.”

“어떻게요?”

“한이결의 몸과 권세현의 능력의 격차로 부담이 심할 거란다. 아마 한번 쓰면 다시 쓰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러니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격차…….”

한이결의 몸은 A급이다. 그런데도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면, A급 이상일 거고. 엘라하의 말처럼 SS급인 사마엘의 정신 지배도 통하지 않았으니까….

“설마 SS급인 겁니까?”

이번에는 정답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자신 있게 입을 열었지만, 엘라하는 오히려 비웃음을 지었고 엘로힘은 많이 부족한 아이를 보듯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아니에요?”

설마 A급보다 더 낮은 B급이나 C급인 거야? 실망하려던 찰나, 엘로힘이 안심하라는 것처럼 말했다.

“등급 외 능력이란다.”

“등급 외라고요?”

“그래.”

“두 분처럼요?”

“아니. 우리는 ‘따지자면’ 등급 외인 거고. 세현아, 너는 등급 외가 맞다.”

내 말을 정정한 엘로힘이 한숨을 내쉬는 엘라하의 손등을 달래듯 가볍게 두드렸다.

“능력은 흠,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까.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개입’이라고 해야겠구나. 네 편한 대로 생각하렴.”

“개입… 이요?”

“현실뿐만 아니라 과거나 누군가의 기억까지도. 네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뭐든 끼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뭐라는 거야? 잠시간 엘로힘을 바라보다 답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괜찮다. 그럴 수 있지.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C12 구역에 갔을 때를 기억하니?”

“한이결이 살던 곳 말입니까?”

“그곳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었잖아.”

‘어비스’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한이결과 천사연의 첫 만남을 정확하게 구현하던 정체불명의 환상. 그게 내 능력이었다고?

“그전에는 서류를 보면서 기억력을 강제로 끌어 올렸었고.”

“하지만 그건.”

“그런 일들을 겪은 후에 굉장히 지치고 힘들지 않았니? 마치 능력을 한계까지 써서 기운이 남아나지 않았을 때처럼.”

“…….”

덧붙인 설명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엘로힘과 엘라하의 말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내게 한이결의 능력이 아닌 또 다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나는 이쪽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이결이나, 하태헌이나… 천사연 같은 사람들처럼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고, 그래서 남들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늘 생각했으니까.

입가를 매만지며 복잡한 표정을 하자 엘로힘이 다정하게 말했다.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세현아. 꿈을 꾸면서 숨어 있는 네 존재감을 지금보다 더 키우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제가 엘이 말했던 능력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사마엘로부터 주변을 지킬 수 있는 겁니까?”

“그보다 더한 것을 지킬 수 있게 되겠지.”

엘로힘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단호했다. 식은땀으로 차갑게 식은 양손을 맞잡으며 우울한 걱정에 빠졌다.

“사탕을 먹고 꿈을 꾸는 것이 두 번째 대가 아닙니까?”

“그렇지.”

“제 능력을 이용해서 칼리를 막으려고 하는군요.”

“세현아.”

“하겠다고 대답했으니, 이제 와서 그만두지는 않겠지만… 저는 그럴 힘도, 자신도 없습니다.”

“오해가 있구나.”

엘로힘의 손바닥에 놓였던 사탕이 허공에 떠올라, 내 앞으로 날아왔다.

“칼리를 막는 건 오래전부터 이미 한 아이가 해 오고 있단다. 네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고, 어떻게 쓸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주는 이유는 예정된 충돌 때문이지.”

충돌. 나는 눈앞에 떠 있는 사탕을 응시하며 물었다.

“……칼리가 저를 알고 있습니까?”

“아직은.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래서 예정된 충돌이라는 건가요?”

“변하지 않을 미래지. 그리고 충돌은.”

“피해를 입히겠죠.”

이전에 들었던 엘로힘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사탕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언제부터 시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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