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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59)화 (159/394)
  • 159화 

    “우리는 이 세계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 운명이란다.”

    엘라하가 누워 있는 맞은편 소파로 나를 이끈 엘로힘이 대각선 방향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까마득히 오래 살아온 만큼 나도 엘라하도 생에 미련은 없다만, 세계가 끝나는 것은 다른 문제지.”

    “세계가 죽어 가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아주 빠른 속도로.”

    엘로힘이 허공에 손을 한 번 젓자 빈 찻잔에 연녹색 찻물이 저절로 차올랐다.

    “그 이유에는 세현아, 너도 연관되어 있단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한이결의 몸으로 들어와서… 세계가 이상해진 겁니까? 그래서 게이트도 변한 거고요?”

    “반절 정도는 정답이구나.”

    친절하게 내 앞으로 찻잔을 밀어 준 엘로힘이 차를 마셨다.

    “네가 오면서 균형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서 세계가 끝으로 향하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지긴 했지. 하지만 그뿐이다. 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죽어 가던 세계야.”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더는 게이트 이상 현상에 대해서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단다, 아이야. 어차피 게이트는 변했을 테니까.”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세계가 이렇게 된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그 말에 지금껏 가만히 누워 있던 엘라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원인의 이름은 ‘칼리’. 한때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다문 엘로힘이 잠시간 침묵 끝에 내게 시선을 보내며 웃었다.

    “제법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힘들다면 자고 일어나서 계속할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엘라하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알려 주세요.”

    “그렇다면야.”

    엘로힘과 엘라하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맞부딪혔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엘로힘이 설명을 시작했다.

    “나와 엘라하는 동시에 태어나고 눈을 떴단다.”

    ***

    엘로힘과 엘라하는 동시에 태어나고 눈을 떴다.

    그들은 서로가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고, 이후 그것을 ‘가족’이라고 칭했다.

    둘은 아주 오래 살았다. 많은 이들이 그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죽었다.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지도자는 쉴 새 없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거나 사랑했다. 그것을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에서 지켜보며 엘로힘과 엘라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사로잡혔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값어치가 있는가. 어느 유명한 군주는 불로장생을 꿈꾸며 일생을 바쳐 불로초를 찾아다녔지만, 반대로 엘로힘과 엘라하는 끝이 있다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아름다워.”

    한평생 다리가 부서질 때까지 춤을 춰 온 발레리나와 눈이 멀고도 그림을 놓지 않는 화가.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수많은 이들을 봐 온 엘로힘이 중얼거렸다.

    “부럽군.”

    엘라하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앞에 떠 있는 책은 마지막 페이지가 채워져 있었다.

    “그래. 부러워.”

    그들은 방금 막 한 남자의 인생이 끝나는 것을 지켜봤다. 타국의 침략으로 벌어진 해전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장군이었다.

    무슨 이야기든 끝이 나면 허무함만이 남는다지만, 그들은 그 공허가 갈수록 커졌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이해해 주지 못했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만이 알았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외로웠다.

    인간을 지켜보면 볼수록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달라졌다.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하고 시기했으며, 끝내 위험한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엘로힘은 엘라하가 검으로 제 목을 긋는 것을 목격했다. 둘은 그때부터는 보는 것을 포기했다.

    엘로힘과 엘라하는 말수가 극히 줄었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오로지 잠만 잤다.

    그렇게 또 오랜 시간이 지났다.

    둘은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불쾌한 기운의 흐름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그것은 아주 낯설면서 기묘한 기운이었다.

    엘로힘과 엘라하는 사람을 질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위험 요소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스라엘의 어느 한 해안 도시. 쓰레기가 쌓여 있는 낡은 돌집 구석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발견했다.

    “으으… 으…….”

    가까이 다가오는 엘로힘과 엘라하를 노려보는 눈동자에는 공포가 선명했다. 포악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운에 엘로힘이 엘라하를 등 뒤로 감추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왔지?”

    그림자 아래로 보이는 피부가 석탄처럼 새까맣고 갈라져 있었다. 엘로힘의 물음에 존재가 입을 열었다.

    “가까이 오지 마!”

    두꺼운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보였다. 목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울부짖는 것처럼 잔뜩 갈라지고 무거웠다.

    느껴지는 기운부터 겉모습까지, 모든 게 평범하지 않았다. 엘로힘은 가만히 서서 상대를 천천히 살펴봤다.

    손목은 두꺼운 쇠사슬이 감겨 있고, 발목과 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으며, 이마에는 월계관 형태의 서클릿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시선을 내린 엘로힘은 아까부터 느꼈던 난폭한 힘의 근원이 그 물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로힘이 가진 힘이라면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세계에 풀어놔도 좋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

    죽여야 할까. 살생은 달갑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질 사고를 막아 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목을 잘라 낼 수 있었다. 엘로힘은 손을 든 채로 고민했다.

    “…으, 흐. 흑….”

    불확실한 안정성과 한 생명체의 목숨을 저울질하던 엘로힘의 마음이 점차 죽여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상대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잔뜩 웅크린 채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엘.”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엘라하가 팔을 붙잡아 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엘라하를 잠시 바라보던 엘로힘이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손을 휘둘렀다.

    철컹!

    엘로힘의 날카로운 힘이 목에 채워진 족쇄를 잘라 냈다. 이어서 발목을 포함해 손목을 감은 쇠사슬도 끊어 내자, 상대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를 덮었던 검은색 물질이 점차 떨어졌다. 입술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던 송곳니의 크기가 줄어들고, 몸체가 조금씩 작아졌다.

    멍한 표정으로 가벼워진 제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대에게 엘로힘이 다가갔다. 혹여 겁먹고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엘로힘이 천천히 손을 뻗어 이마에 씌워진 월계관 서클릿을 잡아 뺐다.

    끼이이이―.

    새하얀 엘로힘의 손길이 닿자 서클릿이 바르르 떨리며 검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도 빼 주었다. 서클릿보다 더욱 강렬하게 떨리며 비명을 내지른 반지는 이내 중앙에 박힌 보석이 깨지며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존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허벅지까지 길게 내려온 금빛의 웨이브 진 머리카락과 선명한 와인 빛 눈동자를 가진 작은 체구의 소녀였다.

    “아….”

    소녀가 원래대로 돌아온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엘로힘과 시선을 맞췄다. 어두운 힘에 가려졌던 소녀의 기운을 알아챈 엘로힘과 엘라하 또한 놀라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엘. 우리와 비슷한…….”

    “그래.”

    엘로힘이 당황한 엘라하의 어깨를 달래듯 쓸어 만지며 소녀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지?”

    “……몰라.”

    “이름은?”

    간단한 질문에도 소녀는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곧 입을 열었다.

    “칼리.”

    ***

    칼리를 데리고 안식처로 돌아온 엘로힘과 엘라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셋이 함께 지냈다.

    그들의 곁에서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칼리는 점차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이름만 알던 칼리는 1년이 훌쩍 지나 드디어 자신이 살던 곳을 기억해 냈다.

    “나는 이곳과 같지만 다른 곳에서 왔어.”

    엘로힘에게 1년 6개월 전, 첫 만남에서 들었던 질문에 답을 하며 칼리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세계와 함께 태어났고, 세계를 지켰어.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로힘이 침잠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기억하니?”

    “아니. 아직은. 그래도 곧 떠오르겠지.”

    엘로힘과 엘라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듯, 칼리가 애써 가볍게 답하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엘라하는 가까이 다가온 칼리를 품에 안으며 말없이 위로했다.

    어떤 문제로 칼리가 자신의 세계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흘러왔는지는 몰라도, 엘로힘과 엘라하는 그녀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묵만이 가득했던 그들의 공간은 칼리가 온 뒤로 웃음과 활기가 차올랐다. 칼리는 천진하고 쾌활하면서도 굉장히 현명했다. 그녀는 둘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고 아꼈다.

    “엘. 이거랑 비슷한 내용의 다른 책 더 없어?”

    “어떤 건데?”

    칼리는 엘로힘과 엘라하를 똑같이 ‘엘’이라고 불렀다. 애칭을 싫어하는 엘라하였지만, 그녀에게는 순순히 허락했다.

    “음, 2차 대전에 휩쓸린 유대인 남자 얘기였어. 2차 대전에 대해서 더 읽고 싶어.”

    “저번에는 1차 대전에 대한 것만 찾더니.”

    엘라하가 살짝 웃으며 책장에서 책을 찾아 줬다. 그들에게 따듯하게 데운 차를 가져다준 엘로힘이 말했다.

    “칼리는 전쟁에 관심이 많은 것 같구나.”

    “아니야.”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칼리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맞나? 그런가…?”

    “이상한 건 아니란다. 우리에게도 취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취향…….”

    책 겉표지를 쓸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리가 묘한 눈빛을 했다.

    “맞아. 전쟁은 재밌어. 인간의 감정이 가장 극대화되는 무대인 것 같아. 기쁨도, 슬픔도, 절망도….”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칼리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역시 해피 엔딩이 제일 좋아. 전쟁은 해피 엔딩을 위한 중간 과정일 뿐이니까.”

    “…….”

    엘로힘은 짧은 순간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털어 냈다.

    괜한 불안감이라고 생각했다. 칼리만큼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는 없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의심하는 것은 가장 쓸데없는 짓이다. 엘로힘은 찜찜함을 애써 외면하며 밝은 얼굴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엘라하와 칼리를 바라봤다.

    그렇게 계절이 여러 번 지나가고, 찾아왔다. 칼리는 여전히 이전 세계에서 지냈던 기억을 온전히 찾지 못한 채로 엘로힘과 엘라하와 지냈다.

    한 해가 끝나 가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엘로힘에게 엘라하가 다가왔다.

    “칼리는?”

    “서재에.”

    엘로힘은 엘라하가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편히 말하라는 마음을 담아 바라보자, 곧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칼리에게서 들은 게 있는데, 우리한테도 좋아 보여서.”

    “흐음. 뭔데?”

    “가족이 되는 맹세.”

    “우리는 이미 가족이야.”

    “하지만 칼리는 조금 다르잖아.”

    서로의 피를 섞어서 맹세를 나누자. 그러면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어.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것처럼, 우리가 죽으면 칼리도 죽어.

    …칼리가 죽으면 우리도 죽고.

    엘라하는 엘로힘에게 같이하자고 부탁했지만, 사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예상보다 더 칼리를 좋아하는 엘라하의 모습에 엘로힘은 쓰게 웃었다.

    해야 할까. 지금 이 선택이 과연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엘로힘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엘라하를 응시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흔쾌히 알겠다고 할 줄 알았던 엘로힘이 난감해 보이자, 엘라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싫어?”

    “싫은 건 아니고.”

    엘로힘도 자신이 왜 선뜻 허락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칼리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다. 생명체를 사랑하고, 해피 엔딩을 좋아한다.

    “그래.”

    어딘가 껄끄러움은 있었지만, 고작 설명할 수 없는 감정 하나로 사랑하는 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하자.”

    엘로힘의 대답을 엘라하로부터 전해 들은 칼리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당장 맹세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각자 손가락 끝을 살짝 베어 냈다. 그렇게 흘린 피는 허공에서 섞이기 시작했다. 맹세의 힘이 깃든 피는 곧 칼리의 오른쪽 손등에 스며들어 문신으로 새겨졌다.

    맹세의 끝은 문신이고, 그것은 참여자 중 한 명이 반드시 짊어져야 했다. 칼리가 제 몸에 새기기를 자처했다. 엘로힘과 엘라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칼리의 결정이었다.

    이로써 그들은 서로의 목숨이 얽히며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 행복하게 웃는 엘라하와 칼리를 보며 엘로힘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칼리는 그들의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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