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코스모스 꽃밭을 지나쳐 집으로 다시 돌아온 엘로힘은 나를 안은 채로 1층 가장 구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일주일간 이곳에 지내면서 처음으로 와 본 그의 방은 나와 하태헌의 방과 내부 구조가 동일했지만, 침대 옆에 창문 대신 새하얀 문이 자리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괜찮다. 긴장하지 말거라.”
거침없이 걸어가 문을 연 엘로힘이 내게 말했다.
“자, 세현아. 앞을 보렴.”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시력이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아 조금 흐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찬란한 광경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넓은 들판 너머로 새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한 줄기의 황금색 빛이 신전을 비추고, 그 주변에는 불투명한 종이가 가득 흩날렸다.
“앞으로 70일 동안 너와 내가 지낼 장소란다. 진짜 ‘집’이지.”
“그럼 원래 지냈던 곳은….”
“눈속임용으로 급하게 만든 곳이었다. 흠, 그래도 그곳이 마음에 든다면 계속 거기서 지내도 돼.”
“…….”
잠시 고민하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태헌을 억지로 보낸 지금, 저곳에 있어 봤자 그가 떠오를 뿐이었다. 차라리 장소를 옮기는 편이 좋았다.
“좋은 선택이구나.”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지은 엘로힘이 신전으로 들어섰다. 허공에 팔락이며 떠다니는 불투명한 종이는 신전 안에도 여전히 많았다. 나는 그것을 가리켰다.
“저건 뭡니까?”
“우리가 힘을 쓸 때 사용하는 것이지.”
“우리가 누굽니까?”
“곧 만나게 된단다.”
신전 중앙에서 가장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간 엘로힘은 널따란 침대에 나를 내려 주었다. 감각은 모두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렸다.
‘천사연의 기운을 차단하는 능력도 사기라고 생각했는데, 하태헌도 만만치 않네.’
손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게 엘로힘이 물 잔을 건네주었다.
“알고 싶은 게 많겠지, 세현아.”
“물론입니다.”
미지근한 물로 갈증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에 대한 것부터 어떻게 제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건지…. 모든 게 다 궁금합니다.”
“천천히 설명해 주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대신 너도 해 줘야 할 게 있단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곧바로 알아챘다. 두 번째 대가. 물 잔을 내려놓으며 엘로힘과 시선을 맞췄다.
“지금부터 70일간 내가 주는 사탕을 먹고 꿈을 꿔야 한다.”
“…그것뿐입니까?”
“그래. 그저 꿈을 꾸는 것뿐이지만 몸에 어느 정도 무리도 갈 거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힘들 거다. 하지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지.”
굳은 표정으로 설명하던 엘로힘이 내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아이야. 정말로 각오가 됐는지.”
“안 됐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한국으로 보내 주마. 하태헌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통로를 열어서.”
지금까지 그와 한 대화 중에 제일 진심이 느껴지지 않은 말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바로 시작합니까?”
“꿈은 나중에. 일단 좀 쉬렴. 피곤할 텐데. 시간은 많으니 무리할 필요 없단다.”
“아뇨. 어느 정도 괜찮아졌습니다.”
잠시간 내 상태를 살핀 엘로힘이 내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래. 어차피 오늘은 설명 듣는 것 말고 다른 일은 없을 테니.”
그에게 손이 잡힌 채로 방을 빠져나와 넓은 중앙 홀을 가로질렀다. 새하얗고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 곳곳에 박혀 있고, 천장에는 독특한 생김새의 황금빛 조명 여러 개가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쿠구궁!
홀 가장 안쪽 정면으로 금빛 문양이 새겨진 아치형의 대리석 문이 보였다. 저걸 어떻게 여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컸는데, 신기하게도 엘로힘이 가까이 다가가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저절로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기존 집의 2층에서 보던 서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고 책장이 가득 찬 서재가 나타났다.
“오….”
“마음에 드니?”
넋을 놓고 안을 구경하는 날 보며 웃은 엘로힘이 서재 안쪽으로 이끌었다.
“지금부터 누구를 좀 소개해 줄까 하는데.”
“예?”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조금 평범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하나 남은 가족이라서.”
“가족이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따라가던 나는 곧 그가 걱정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서재 중앙,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곳 바로 옆으로 공중에 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겉모습은 엘로힘과 놀랄 만큼 닮았지만, 머리카락 길이는 나와 비슷했으며 소매가 길고 너풀거리는 새하얀 동양풍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주변에는 새하얀 빛 무리가 마치 별처럼 반짝거리며 끊임없이 맴돌았다.
“엘라하. 내 쌍둥이 형제이자 능력을 나누고 있는 존재란다. 나는 그가 없으면 안 되고, 그도 내가 없으면 안 되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엘로힘의 목소리에 엘라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연결되어 있다는 엘로힘의 말을 이해했다.
오른쪽 눈이 금안인 엘로힘과 달리, 엘라하는 왼쪽 눈이 금안이었다. 같은 얼굴이었지만 청렴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엘로힘과 달리 그는 어딘가 우울하고 무거워 보였다.
“…모두 별문제 없어.”
“고생했네.”
“좀 쉬어야겠어.”
엘로힘과 대화를 나눈 엘라하가 공중에서 내려왔다. 목소리까지 똑같네.
“권세현.”
그가 피곤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태헌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갔다.”
“예?”
“지금은 게이트 출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지. 저번에 중국으로 오면서 웬만한 몬스터는 다 처리했었으니, 오늘 내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내게 엘라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알고 싶었던 것 아니야?”
“그건 맞지만, 어떻게….”
“나와 엘라하는 볼 수 있단다.”
비틀거리는 엘라하를 부축해서 소파에 앉힌 엘로힘이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부터 말해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당황스러웠다면 미안하구나.”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에 드러눕는 엘라하를 잠시 보다 물었다.
“하태헌을 볼 수 있는 겁니까? 그… 눈으로요?”
“넌 내가 예언자라고 알고 있지.”
뒷짐을 진 엘로힘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섰다. 그의 오른쪽 눈동자가 황금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일어나는 대부분을 볼 수 있다. 특정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최종적으로 어느 선택을 내리는지.”
“설마 그게 능력인 겁니까?”
“능력보다는 ‘힘’이란다. 네 말로 굳이 따지자면… 등급 외 능력이겠지.”
등급 외 능력. SS급보다 더 높다는 의미였다. 시력을 잃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때 느꼈던 거대한 기운. 예상대로 그건 엘로힘이 가진 기운의 크기였다.
“보는 것은 나와 엘라하 둘 다 가능하지만, 기록하는 것은 엘라하만이 가능하지. 그래서 나는 그 밖의 일들을 하는 거란다. 너와 하태헌을 맞이하거나, 꿈에 찾아가거나 하는 것들.”
어느 순간 눈동자의 빛이 줄어들었다. 빙긋 웃은 엘로힘이 가장 가까운 책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만난 아이들은 나를 예언자라고 부르고 엘라하를 기록자라고 부르더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고 있으니까.”
책장에서 검은 표지의 책을 한 권 꺼내 든 엘로힘이 내게 다가와 그것을 건넸다. 무심코 받아 들고 책의 제목을 확인한 나는 차갑게 굳었다.
「Abyss」
“어떻게 이걸…….”
“보고 싶어 했잖니.”
심장이 크게 뛰며 머리로 강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비틀거리는 나를 엘로힘이 담담하게 지켜봤다.
-소설책이에요. 한번 읽어 보세요.
-무슨… 나 이런 거 안 봐.
-왜요? 꽤 재밌어요. 10년도 더 전부터 이 책장에 꽂혀 있더라고요. 아버지 취향은 아닌데 누가 갖다 둔 건지.
연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내 옆에 놔 주는 같은 제목의 책이 세 권 보였다.
-이따 돌아갈 때 책 챙겨 줄게요. 갖고 가서 봐요.
연선우가 밝게 말하며 미소 짓는다. 귀찮다며 거절해도 끝내 쥐여 준 그 책은, 결국…….
“네가 읽었던 ‘어비스’의 뒷권이란다.”
“…제가 4권까지밖에 못 봤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날 찾아왔겠지. 그 이야기의 끝을 모르니까.”
거칠어진 호흡을 힘겹게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고 싶었어요.”
복잡한 마음으로 책 겉표지를 쓰다듬었다.
“대체 어떻게 ‘어비스’가 제가 살던 곳에 있었던 거죠?”
“내가 하태헌을 보낼 때 통로를 만든 것처럼 세계는 수많은 통로가 있다. 그것은 종종 다른 세계와 이어져 있지.”
수많은 통로라면… 설마 게이트를 뜻하는 건가?
“통로를 통해 책을 보냈다는 뜻입니까?”
“우리가 보낸 게 아니다. 흘러 나간 것이지. 정해진 운명처럼.”
그가 새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책을 툭 두드렸다.
“네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확률로 따지면… 0.01%도 채 안 될 테니까.”
“제가 ‘어비스’를 갖고 있어서 한이결 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겁니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엘로힘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로로 길게 휘두르자 새하얀 빛줄기가 생겨났다. 그가 빛줄기 중간마다 박혀 있는 황금색 빛 무리를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을 이었다.
“반복된 시간의 흐름으로 세계가 많이 약해졌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기존보다 많이 늘어났으며, 그중 하나에 책이 흘러 나갔고, 그 책이 도착한 세계가 네가 살던 10년 전 세계였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나도 몰랐었지. 확실한 건, 그 책이 네가 이곳으로 올 수 있는 길이 되어 주긴 했지만… 마침 오랜 시간 고통받아 영혼이 마모된 육체가 있지 않았다면 너는 살 수 없었을 거다.”
영혼이 마모된 육체.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설마 그게 한이결이라는 겁니까?”
“이해가 빠르구나.”
새하얀 빛줄기를 도로 없앤 엘로힘이 단단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떤 것 같니? 세현아.”
“…….”
“이 모든 게 정말로 단순한 우연인지….”
무거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이내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면 무너져 가는 세계가 살아남기 위해서 널 이곳으로 이끈 것인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엘로힘이 어깨를 힘 있게 붙잡아 왔다.
“나는 그게 궁금하고,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