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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57)화 (157/394)
  • 157화

     

    40. Abyss 

    “처음에는 일주일 전에 사용했던 통로를 다시 열까 했지만.”

    엘로힘이 다양한 색으로 한가득 펴 있는 코스모스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며 연분홍색 코스모스 꽃잎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무래도 다른 길을 새로 여는 게 나아 보이더구나.”

    찬란한 햇빛 아래로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코스모스 꽃밭 끝에는 거대한 나무가 얼기설기 엉켜 있는 오래된 숲이 있었다. 평화롭고 온화한 이곳과 달리, 그 숲은 지나치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자.”

    엘로힘이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젓자 그 앞에 타원형 입구가 생겨났다. 게이트 입구와 아주 흡사한 생김새였지만 특이하게도 검푸른 빛이 아닌 은빛으로 반짝거리며 빛났다.

    “어디로 이어진 거지?”

    “한국의 D23 구역 게이트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입구란다.”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불가능할 것도 없지.”

    당연하다는 듯이 나온 대답에 하태헌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엘로힘을 노려봤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저런. 하지만 열린 통로는 이곳 하나뿐인데.”

    부드럽게 웃은 엘로힘의 곁으로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왔다. 입구 주변을 킁킁거리던 토끼가 그를 올려다봤다.

    “마침 잘 왔구나.”

    몸을 숙여 토끼를 쓰다듬은 엘로힘이 입구를 가리켰다.

    “나를 영 믿지 못하는 것 같으니, 이 아이를 먼저 들여보내 주도록 하지.”

    토끼는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곧장 입구를 향해 폴짝 뛰어올랐다. 작고 동그란 몸이 입구 너머로 쏙 사라졌다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입구 밖으로 귀여운 얼굴을 내밀었다.

    “고생했다. 아이야.”

    엘로힘의 인사에 토끼가 귀를 한번 쫑긋거리고는 아까보다 더 힘찬 몸놀림으로 뛰어나왔다. 멀어져 가는 토끼에게서 등을 돌린 그가 하태헌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저 어린아이보다 약한 게 아니라면 멀쩡히 걸어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어떤가?”

    엘로힘이 다정한 말투로 비꼬자 하태헌의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하태헌은 여기서 지내는 일주일 내내 엘로힘이 뭘 하든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니, 저 정도 빈정거림은 이해할 만했다.

    하태헌은 여전히 찝찝하다는 반응이었지만, 토끼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더는 의심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의 뒤에 서서 엘로힘과 시선을 맞췄다.

    황금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때가 왔다는 뜻이었다. 쓰게 웃으며 하태헌의 팔을 붙잡았다.

    “하태헌 씨.”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나와 시선을 맞추는 하태헌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굳어 있었다. 부디 내가 짓는 표정이 너무 괴로워 보이지 않도록 바라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저는….”

    “말해.”

    “그…….”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일순 현기증이 일 정도로 긴장감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눈가를 좁힌 채로 엘로힘과 나를 번갈아 보던 하태헌이 나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한이결. 이곳에 남겠다는 말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다.”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예?”

    “뭐?”

    “…….”

    큰일 났다.

    서로 말이 엉켜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창백하게 질려서 식은땀을 흘렸고, 하태헌은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반사적으로 팔을 놓자 이번에는 그가 내 팔을 잡아챘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엘로힘이 작게 탄식을 흘렸다.

    “아이야. 너는 다 괜찮지만, 본론부터 냅다 뱉는 그 버릇은 좀 고치는 게 좋겠구나.”

    “동감한다.”

    처음으로 엘로힘과 의견을 맞춘 하태헌이 이를 악물고 내게 물었다.

    “당장. 제대로. 설명해라.”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준 하태헌이 엘로힘을 의식하며 나를 반대편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미리 하태헌과 대화를 하겠다고 설득해서 그런지 엘로힘은 끌려가는 나를 보고도 굳이 막지 않았다.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하태헌은 이어 말했다.

    “지난 일주일간 충분히 느꼈을 텐데? 이곳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다.”

    “하태헌 씨.”

    “정체불명의 생명체나 웃기는 말투를 쓰는 저놈은 둘째 치고, 비바람 한번 불지 않는 이곳이… 정상적으로 보이나?”

    그가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알았지만, 그렇다고 엘로힘에게 얻어 낼 정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그를 올려다봤다.

    “제게는 남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남지 않으면 예언을 하지 않겠다고 저자가 협박하던가?”

    “협박이 아니라 제안이었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일주일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결정했습니다.”

    “처음 왔을 때부터라고?”

    하태헌은 여전히 침착했지만 되묻는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치솟는 초조함에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저는 그가 알고 있는 정보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걸 듣기 전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이결.”

    “…솔직히, 네. 정보를 포기하고 당신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고….”

    “상황이 달라져?”

    하태헌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싸늘하게 웃었다. 그에게 잡힌 손목에서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설마 그게 나 때문인가?”

    “…….”

    “내 감정에 대한 답이냐고 물었다. 한이결.”

    그의 고백뿐만 아니라 책에서 봤던 그 끔찍한 기억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 부분까지 하태헌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거절할 거라면 오해하게 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예. 이게 답입니다.”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그걸 보니 가슴이 말도 안 될 만큼 아파졌다.

    “저는 누군가를 받아들이거나 곁에 둘 만큼 한가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습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온다면?”

    “…무슨 뜻입니까?”

    “상황 핑계 대지 말고, 네 감정에 대해서 말하라는 거다.”

    최대한 담담한 척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든 하태헌을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한 부분인데, 오히려 그가 정확하게 찔러 들어왔다.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쥐며 힘겹게 대답했다.

    “감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태헌 씨를 언제나 존경하고 있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지만 그게 다예요. 저는 당신을…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그걸 끝으로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태헌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함부로 이 정적을 깰 만큼 대담하지 못했다.

    차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잡힌 손을 응시했다. 하태헌의 손은 여전히 따듯했다. 당장이라도 날 등지고 떠날 줄 알았는데.

    “그래.”

    드디어 입을 연 하태헌이 말했다.

    “알겠다.”

    믿기 힘들게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그가 잔뜩 긴장한 채로 굳어 있는 내 얼굴을 가볍게 만져 왔다.

    “날 봐, 한이결.”

    “…….”

    마른침을 삼키며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겨우 마주한 하태헌의 얼굴은 내 걱정과 달리,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걸 보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만큼 겁먹는 이유를 모르겠군. 너한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나?”

    “그, 야 당연히….”

    “내가 차였다고 좋아하는 상대에게 화를 내는 그런 쓰레기로 보이나 보지?”

    “아뇨. 그건 아니지만 여기 남겠다는 결정도 있으니까, 저는….”

    “상관없다.”

    내 볼을 쓸던 그가 곧 커다란 손으로 내 두 눈을 한 번에 가렸다. 나는 뒤늦게 그 손이 오른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

    다급히 손을 떼어 냈지만, 눈앞에 새까만 어둠이 번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허억, 앞에 있던 하태헌의 품으로 쓰러지며 눈가를 더듬더듬 매만졌다.

    더는 눈을 가리는 게 없는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몸에 닿아 오는 하태헌의 체온도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어차피 널 두고 가지 않을 거니까.”

    하태헌이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일시적으로 시력을 없애고 그 외 모든 감각은 증폭시키는 디버프. 하태헌의 오른손이 가진 또 다른 능력이었다.

    효력은 한 번 닿을 때마다 10분간 지속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하태헌의 오른손은 내 신체를 붙잡고 있는 터라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씁쓸한 엘로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나를 더욱 단단하게 안으며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비켜라.”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한이결은 여기 남아야 해.”

    사라락, 주변에 먼지가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이야.”

    엘로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몸이 떨릴 만큼 강렬한 추위가 엄습해 왔다. 평범한 냉기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데도 심장을 옥죄이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크윽!”

    콰각, 몸이 몇 번이고 흔들리며 하태헌이 신음을 삼켜 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지면서 날 끌어안고 있던 힘이 점차 약해졌다.

    “읏…!”

    쿠궁! 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뜨거운 체온이 사라지고 몸에 여러 번 충격이 가해졌다. 파삭, 풀잎 소리와 꽃향기가 짙게 퍼졌다. 기침을 내뱉으며 푹신한 흙바닥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이런. 미안하다, 아이야.”

    “한이결…!”

    느긋한 엘로힘의 목소리와 하태헌의 날카로운 외침이 번갈아 들렸다. 거칠게 호흡하며 증폭된 청각에 집중했다.

    “소용없어, 하태헌.”

    “이거, 놓…….”

    “말했던 대로 한이결은 네가 아니라 나를 택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거라.”

    무언가 바닥에 길게 끌리는 소리에 이어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땅의 흔들림도 사라졌다.

    “허억, 헉….”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기 위해 노력하는데, 등 뒤로 서늘한 것이 점차 가까워졌다.

    “세현아.”

    “흐…….”

    마치 거대한 태양을 마주한 것처럼 지나치게 차갑고 동시에 뜨거웠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긴장감에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잔뜩 예민해진 나를 달래듯 말한 엘로힘이 빠르게 기운을 줄였다.

    “입 벌리렴.”

    내 턱을 잡아챈 손이 입술을 억지로 벌리며 둥근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혀를 찌르는 화한 맛에 뱉어 내려고 했지만 단단한 손이 입을 덮어 막았다.

    “으, 읍… 으!”

    “삼켜, 세현아. 삼켜야 한다.”

    반항하는 나를 억지로 짓누르며 엘로힘이 속삭였다. 한참을 시도한 끝에 겨우 그것을 삼켜 내자, 앞을 가렸던 어둠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디버프 효과를 제거하는 사탕이란다. 앞으로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시력과 감각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흐릿한 시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엘로힘의 얼굴이 보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그에게 의지한 채로 앞을 바라봤다.

    은빛으로 빛나던 입구는 어느새 굳게 닫혀 있었다.

    “하태헌 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큰 문제 없이 입구로 들어갔다. 한국으로 무사히 도착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집으로 가자. 좀 쉬는 게 좋겠구나.”

    엘로힘이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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