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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56)화 (156/394)

156화 

새하얀 맨발 아래로 검은 흙바닥이 밟혔다. 탁한 연기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간 엘로힘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봤다.

그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은 척박한 장소. 어둠에 휩싸인 하늘은 빛 한 점 들지 않았으며, 눈앞을 가득 메운 연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그럼에도 엘로힘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땅의 끝, 절벽에 가까워진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러면 안 된다, 아이야.”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리하는구나.”

“무리?”

엘로힘의 말에 빈정거리듯 한마디 내뱉은 천사연이 먹물처럼 시꺼먼 바다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봤다. 어둡고 음울함이 가득한 공간 한가운데 서 있는 엘로힘의 몸에서는 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요.”

“으음….”

천사연과 얼굴을 마주한 엘로힘은 난감한 미소를 띠며 입가를 매만졌다.

“상태가 꽤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천사연이 아닌 척 어깨를 으쓱였지만,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었고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느껴졌다.

“나를 만날 때만 잠을 자잖니.”

“그래 봤자 뭐 얼마나 된다고 그러시는지.”

건성으로 대꾸한 천사연이 됐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어 보이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한이결은 어떻습니까?”

“물론 잘 지내고 있다.”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엘로힘은 모른 척 부드럽게 답했다. 쿠궁, 동시에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여러 갈래로 금이 갔다.

“그렇습니까?”

헛웃음을 지은 천사연이 갈라진 바닥을 구두로 툭툭 쳤다.

“집을 나가 놓고 잘 지낸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잠시간 천사연을 응시하던 엘로힘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한이결에게는 네 곁이 집이 아니었던 거겠지.”

“…….”

“오히려 궁금하구나.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지진 소리가 점차 커졌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만큼 천사연의 상태도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한이결이 지내던 방은… 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고.”

엘로힘의 질문에 답하는 천사연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적당히 이용할 수 있도록 쓸 만한 놈들도 곁에 붙여 줬는데.”

파도가 한층 거칠게 일었다. 지진에 갈라진 절벽 파편이 아래로 떨어져 검은 물속에 처박혔다.

“어째서 착각이라는 겁니까?”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하는 천사연의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붉은 귀걸이가 반짝 빛났다.

쿠구궁!

엘로힘과 천사연이 서 있는 절벽 근처를 제외한 모든 땅이 서서히 무너져 내려 어둠에 먹혀들었다.

꿈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 가고 있었다. 엘로힘을 꿈으로 불러들이는 것 자체가 큰 기운을 소모하지만, SS급은 그래도 1시간 정도는 거뜬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사연은 20분도 채 버티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이야. 네가 놓친 부분이 여럿 있지만, 그중 두 가지만 알려 주자면….”

천사연의 등 뒤로 검은 바닷물이 크게 솟구쳤다.

“한이결은 생각보다 더 너를 믿지 않았고.”

끼기기기긱―.

쇠가 일그러지는 기이한 소리가 하늘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고작 그것만으로는 ‘집’이 될 수 없다.”

그 말에 겨우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천사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몇 번이고 나를 불러들여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어. 알고 있잖니, 아이야.”

“…….”

“한이결을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만, 그렇다 해도 이곳으로 통하는 입구를 열어 주지는 않을 거다. 그만 포기하렴.”

그 말을 끝으로 검은 파도가 입을 벌린 아귀처럼 천사연을 집어삼켰다. 엘로힘이 딛고 서 있던 땅도 산산조각이 나며 어둠에 잠겨 들었다.

몸이 추락하고 있음에도 엘로힘은 여전히 평온했다. 땅을 딛고 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도 올곧게 서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꿈은 이미 끝나 있었다.

“…괜찮을까?”

엘로힘을 지켜보던 또 다른 이가 깨어난 것을 알아채고 말을 걸어왔다.

“다음 싸움을 버텨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상대의 걱정에 엘로힘이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다정하게 답했다.

“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불안정해 보여.”

“그래. 천사연, 그 아이는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지.”

엘로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자를 바라봤다. 자신과 놀랍도록 똑 닮은 얼굴은 불안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니 믿어야 해.”

“…….”

엘로힘과 잠시간 시선을 맞추던 남자는 이내 반쯤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 뒤로 누우며 말했다.

“권세현이 찾아. 지금은 하태헌을 피해서 2층에 올라가 있어. 17A-a 책장 앞.”

“알겠어.”

엘로힘이 애정을 담아 그의 새하얀 손등을 가볍게 토닥인 후 방을 나섰다.

전해 들은 대로 2층으로 올라가 17A-a 책장 쪽으로 움직이자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한이결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현아.”

서재를 멍하니 둘러보던 한이결이 엘로힘의 부름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이곳이 마음에 드나 보구나. 자주 찾아오는 걸 보면.”

“아뇨. 딱히…. 제가 책이랑은 별로 안 친해서요.”

“그렇다 해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지.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유가 없으니까.”

그의 말이 무언가를 건드린 듯 한이결이 씁쓸하게 웃었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엘.”

“편히 해 보렴.”

“문제가 좀… 생겨서요.”

***

오늘 하태헌은 이 장소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젯밤, 그에게 남겠다는 말을 끝내 뱉어 내지 못한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머뭇거렸다.

“하태헌 씨에게….”

“전하지 못했구나.”

“네.”

엘로힘은 딱히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실패할 거라고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글쎄.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아직 아무 말도 안 꺼냈는데요?”

“안 들어도 알겠구나.”

“…….”

어째 말썽을 피우는 애가 된 느낌인데. 어색함에 괜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상황이 조금, 음. 이상해져서요. 제가 직접 하태헌 씨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반드시.”

“위험할 수 있다.”

“괜찮습니다.”

하태헌이 나를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내 말에 그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제가 자초한 일이니까요.”

“세현아.”

“죄송합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그러지 마라.”

엘로힘이 다정한 손길로 내 얼굴을 붙잡아 올렸다.

“자책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 이상으로 너를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제가 말입니까?”

일부러 모른 척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엘로힘은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성공할 확률이 적은 일에 망설이게 되는 것은 누구나 똑같단다.”

“자신 없던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그래. 어렵게 쌓아 둔 하태헌의 신뢰가 어떻게 돌변할지 두려운 거겠지.”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듯이 아려 오는 속을 느끼며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충돌은 이미 예정되어 있단다, 세현아.”

“…….”

“네가 직접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이유는, 최소한 그것을 언제 받아들일지 선택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를 바라서였다.”

“우유부단한 제 행동이 하태헌 씨에게 피해를 끼쳤습니다.”

“충돌은 언제나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지.”

“차라리….”

어젯밤부터 끊임없이 해 온 후회가 머릿속을 뒤덮었다.

-진지하게… 고민해 줬으면 좋겠군.

하태헌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자 심장에서 온몸으로 강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차라리 첫날에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런. 또 그러는구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말거라.”

엘로힘이 어깨를 힘주어 잡아 왔다.

“네가 여기에 남겠다는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처럼, 그 아이도 널 이곳까지 따라온 책임을 지는 거다. 지나간 날을 후회해 봤자 지금 상황에서 도움 될 건 없어.”

“…감사합니다.”

우울해하는 나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그의 배려는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웃는 것이 조금은 편해졌다.

엘로힘이 그런 내 상태를 이해한다는 듯이 등을 두어 번 다독였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마저 정리하고 내려오렴. 하태헌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를 따라 미소 지은 엘로힘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새하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싱그러운 숲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걸음걸이로 서재를 나가는 엘로힘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비치는 바깥과 달리 이곳은 살짝 어둠이 내려앉아 오히려 안락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지.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유가 없으니까.

엘로힘의 조언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돌아다녔다. 답답함에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태헌이 설마 내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남 사건 이후로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설마 거기까지 갔을 줄이야.

어쩌면 하태헌은 한국을 떠나와서 지금까지 나에 대한 감정을 계속해서 확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끝내 결론을 내린 거겠지.

내가 한이결이 아닌 다른 인물의 몸에 들어왔다면 좀 더 빨리 눈치챌 수 있었을까? 가령… 여자라거나.

‘…아니, 아니야.’

하태헌의 말마따나 이제 와서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감히 그 감정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거절하면 하태헌과는 다시는 지금처럼 가깝게 지내지 못하겠지. 그게 예의고.

곁을 떠나지 말라던 부탁을 배신하는 건, 나중에라도 다시 만나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을 거절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 남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하태헌에게 연락 한번 하는 것도 몇 번이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안부는 물론이고 용건이 생겨도 쉽사리 할 수 없겠지.

“…….”

그와 나는 함께 있어도 느끼는 감정이 달랐다. 하태헌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동안 내게 계속 표현한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상황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곁에 남아 달라는 의미를 담아서.

뭉근하게 이어지는 두통에 두 눈을 손으로 내리눌렀다. 엘로힘의 말마따나 충돌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이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나도 하태헌도 그 선택에 책임을 지게 되겠지.

감았던 눈을 뜨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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