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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55)화 (155/394)

155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으며 방을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시간은 벌써 밤 9시를 향하고 있었다.

1시간쯤 후면 하태헌이 자자고 방으로 찾아올 텐데, 그 상황에서 뜬금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으니….

‘내가 먼저 찾아가자.’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살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하태헌도 방에서 쉬고 있을 테니 찾아가서 노크하면 될 것이다.

“하아…….”

그게 다인데도 영 쉽지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하태헌의 방문 앞에 서서 손을 들어 올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막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였다.

벌컥!

“……!”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고 하태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찾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하, 하태헌 씨.”

노크하려던 손을 급히 내리고 어색하게 웃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지? 벌써 자려는 건 아닐 거고.”

“그게, 음.”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용기 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금 바쁘십니까?”

“말해.”

“같이 산책하러 가실래요?”

내 제안이 다소 의외였는지, 잠시간 눈을 깜빡이던 하태헌이 방 안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산책하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군.”

“멀리 가는 건 위험하겠지만, 근처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밤하늘이 꽤 멋있기도 하고요.”

하태헌이 거절할까 봐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나를 묘한 시선으로 보던 그가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였다.

“걸쳐라.”

옷장에서 얇은 카디건을 챙긴 하태헌이 내게 던져 주며 앞장섰다. 엘로힘이 말했던 대로 이곳은 항상 따듯했지만, 그래도 굳이 거절하지 않고 카디건을 받아 입었다.

엘로힘은 어디 갔는지, 거실을 지나쳐 뒷문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 창문으로 비춰 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셀 수 없이 빼곡하게 박힌 별들이 보였다.

워낙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그렇지, 아름다운 장소인 것은 인정할 만했다. 어둠 저편에서 저번에 봤던 사과나무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과나무를 바라보다 운을 뗐다.

“시간 진짜 빠르지 않습니까?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열흘이 지났네요.”

“그렇군.”

대충 걸친 카디건을 대신 잘 여며 준 하태헌이 나와 똑같이 하늘과 사과나무를 차례로 둘러봤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뭘 하실 겁니까?”

“일단 SS급 코트부터 발표해야겠지.”

“적당히 내세울 만한 이유는요?”

“찾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말을 바꿨다.

“아니, 찾은 것 같군. 한국으로 돌아가 보면 알게 되겠지.”

“예?”

“저 남자, 예언자가 말해 준 정보가 있다.”

예상치 못한 얘기에 놀라서 하태헌의 팔을 붙잡았다.

“엘로힘이 말해 줬다고요? 설마 대가도 치렀습니까?”

“아니. 묻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알려 주더군.”

엘로힘이… 먼저 알려 줬다고? 알아야 할 정보가 정해져 있다더니, 그중 하나가 이건가?

“원래는 중국 게이트로 출장 갔을 때, 그곳에서 발견한 거로 할까 생각했다. 협력 관계인 중국 길드와 미리 상의도 끝냈고.”

“중국 게이트요? 하지만 그러면….”

“그래. 그 중국 길드와의 관계가 쓸데없이 복잡해지지. 나중에 말을 바꿀 위험성도 있고. 마스터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더군.”

“엘로힘이 말해 준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한 겁니까?”

“별로 탐탁지는 않다만, 타국과 얽히는 것보다는 나아.”

나는 잠자코 수긍했다. SS급 코트의 주인은 하태헌이다. 다른 무언가가 끼어드는 것은 불쾌했다.

“모쪼록 코트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비스’처럼, 하태헌이 당당하게 코트를 입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자 하태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결되면 네게는 바로 알려 줄 거다. 코트를 구해 준 건 너니까.”

“저는…….”

“한이결. 나를 똑바로 봐라.”

꽃향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와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하태헌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왜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 거지?”

“…….”

긴장으로 어깨가 잔뜩 굳었다. 어떤 식으로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순식간에 엉켜들었다.

주먹을 쥐고 고민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태헌이 한 박자 빨랐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제가 사실, 예?”

이게 무슨 소리야? 당황을 숨기지 않으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태헌 씨를 왜 못 믿겠습니까?”

한이결의 몸에 들어와 지금까지 지내면서 하태헌만큼 믿고 의지한 사람이 없었다. 비록 그는 나를 믿지 못했지만…. 그건 내가 워낙 수상했으니까 당연한 거고.

하태헌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했던 행동들이 있으니까.”

“뭐라고요?”

하기는 뭘 했다고? 기껏해야 얼굴 한 대 때린 거밖에 더 있나? 아, 샌드위치를 억지로 먹인 것도 있지. 호텔 파티에서 나 모른 척하고 무시하기도 했고.

아무튼, 이제 와서 따지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소소한 것들뿐이다.

“제가 잘못했던 것도 있는데요. 그리고 의심하신 거 모두 이해합니다.”

진심을 담아 대답했지만, 하태헌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부터 그에게 나를 두고 한국으로 떠나라고 해야 하는데, 시작도 전에 우울해지면 설득하기가 더 힘들었다.

어쩔 수 없나. 심호흡을 한번 한 뒤에 하태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태헌 씨.”

나를 의심하고 재 보던 예전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저는 당신이 항상 부러웠습니다.”

항상 중심을 유지하며 쉽게 휘둘리지 않는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사람. 큰 힘을 다루는 데 있어 책임감을 느끼고 사람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영웅.

“부러운 만큼 존경하고요. 제가 많이 힘들 때, 하태헌 씨를 보면서 위로받기도 했습니다.”

“…….”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더라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하태헌 씨였습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면 할수록 얼굴에 후끈한 열이 몰려왔다.

젠장, 이래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창피함을 억누르며 괜히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한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그렇군.”

“오히려 너무 믿어서 부담스러우실… 하태헌 씨?”

복잡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던 하태헌이 얼굴을 붙잡아 왔다. 바람에 흩날린 앞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쓸어 넘기고는 왼쪽 뺨으로 시선을 옮겼다.

집요할 정도로 내 뺨을 노려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많이 아팠었나?”

그제야 하태헌에게 맞았던 곳이 왼쪽 뺨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거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계속 내 반응을 살피는 그의 행동이 귀엽게 느껴져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가 보기와 달리 꽤 튼튼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그럴 테니까….”

“그럼 호텔은?”

“예?”

그가 며칠 전에 했던 것처럼, 입을 맞췄던 눈가를 매만져 왔다.

“호텔에서 있었던 일도 신경 쓰지 않을 건가?”

“무슨…….”

호텔에서 있었던 일. 정확한 설명은 없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머릿속이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하게 멈추었다. 내 반응을 살핀 하태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나 보군.”

“아니, 그…….”

정확하게 짚어 낸 말에 더욱 난감해졌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민하다가 미간을 좁히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 냈다.

“실수가 아니었다는 뜻입니까?”

“누가 실수로 얼굴에 입을 맞추지?”

“술에 취한 줄 알았습니다.”

“맥주나 와인 좀 마셨다고 취할 리가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근데 계속 이렇게 얼굴 붙잡힌 상태로 대화를 해야 하나? 영 부담스러운데. 하태헌의 손을 슬쩍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직전에 게이트를 지나기도 했고, 이래저래 일이 많았으니 피곤해서 취할 수도 있겠다 싶었죠. SS급도 취하기는 하잖아요.”

“SS급이 아니더라도 그거 마시고 취하지는 않았을 거다.”

심드렁하게 대꾸한 하태헌이 팔로 허리를 감싸 안아 왔다. 은근슬쩍 도망가려는 내 행동을 그가 눈치 빠르게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다. 그래도 신경 쓰이지 않는 건가?”

“…….”

붙잡힌 허리를 풀기 위해 하태헌의 몸을 힘주어 밀었지만, 마치 돌덩이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다.

“놔주세요, 하태헌 씨. 일단 놓고 얘기를…….”

“적당히 둘러대고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라.”

“…제게 뭘 원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그와 나눠야 할 대화는 이게 아니었는데. 계획은 진작에 다 무너진 데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는 남자입니다.”

“안다.”

“하태헌 씨도 남자고요.”

“내가 너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마음과 성별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예? 키스요?”

경악하는 날 보며 한숨을 내쉰 하태헌이 천천히 팔을 풀어 줬다.

“내 감정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꺼낸 얘기야.”

급히 그와 거리를 벌리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당혹스러운 심정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적당히 받아들이고 넘어갈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랬다가는 하태헌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거겠지.

“…….”

거절… 해야겠지. 침착하려고 애쓰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가벼운 감정일 수도 있잖아.’

여긴 이제 ‘어비스’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하태헌이 갑자기 연애할 마음이 생겨도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거다. 그 와중에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나와 함께 지냈으니, 아무래도 감정을 착각한 모양이고.

여자건 남자건, 하태헌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 지금 내 상황을 잘 설명하고 더불어 잘 설득하면 그도 이해할 것이다.

겨우 머릿속을 정리하고 손을 내려 하태헌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나는 기껏 생각해 둔 말은 단 한마디도 뱉어 내지 못했다.

“지금 꼭 대답을 들으려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줬으면 좋겠군.”

멍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하태헌이 처음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귀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참담한 심정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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