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뜨거운 불이 주변에 가득 차올랐다. 흙먼지가 피어오른 흐릿한 하늘과 숨이 막혀 오는 후덥지근한 공기, 피부에 끈적이며 달라붙는 불쾌한 감각.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천사연과 하태헌이 보였다. 둘 다 온몸을 피로 가득 적신 채로 꼿꼿하게 앞만 응시한다.
“그런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줄까 한다.”
악의가 담긴 목소리. 뿌옇게 일어난 연기 너머에서 낯익은 이의 얼굴이 바닥을 굴러왔다. 검을 쥐고 있는 천사연의 손이 떨린다.
“하하… 하하하! 하하!”
죽은 이를 모욕하는 웃음이 가득 퍼져 나가도 천사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였다.
숨을 쉬는 것이 버거울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차가운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천사연.”
손을 뻗었지만, 그에게 닿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거칠게 호흡하는 하태헌을 불렀다.
“하태헌 씨.”
입을 열고 소리쳐도 그 누구도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과 내 사이에 치솟은 불길이 시야를 가렸다. 뜨거운 열기에 고통이 밀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외쳤다.
“천사연! 하태헌 씨!”
또다시 모든 게 멀어져 간다. 사마엘과 대치한 천사연과 하태헌을 타오르는 불이 아귀처럼 집어삼켰다.
“기다려!”
그들을 먹어 치운 불이 이제는 내 몸에 옮겨붙었다. 눈앞이 빛으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
“한이결! 한이결, 일어나!”
어깨를 누군가가 거칠게 흔들었다. 뜨거운 불과 피비린내가 사라지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감았던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미간을 찌푸린 하태헌이 보였다.
“…하태헌 씨.”
“정신 차려.”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새하얀 이불과 천장, 창밖으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 그제야 방금까지 내가 봤던 것은 꿈이고,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거하게 악몽을 꾼 모양이다. 옆에서 자던 하태헌은 나 때문에 일어난 거고.
‘엘로힘이 준 사탕을 먹었는데도, 어째서?’
하태헌이 잔뜩 굳어 있는 내 손을 잡아 왔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어쩔 수 없이 깨웠다.”
“죄송, 죄송합니다.”
상체를 일으키며 더듬더듬 사과하자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는 됐으니까, 호흡부터 다듬어라. 물이 필요한가?”
“아뇨. 괜찮습니다.”
자다 깼는데도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두통에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혼자라면 모를까, 이대로는 하태헌과 계속 잘 수 없다.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데, 하태헌이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는 거지?”
“그, 땀이…. 좀 씻고 올게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 40분을 넘겨 3시를 향해 가는 늦은 시각. 욕실이 방 안에 있어서 씻으면 하태헌의 잠을 방해할 것 같았다.
“옆방으로 가서 마저 자요, 하태헌 씨.”
“쯧.”
혀를 찬 하태헌이 먼저 침대 밖으로 내려서며 나를 부축했다.
“씻고 나와라. 기다릴 테니까.”
“예?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들어가.”
그가 내 만류를 무시하며 욕실을 향해 등을 밀었다. 수건을 든 채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빨리 씻겠습니다.”
“괜히 넘어지지나 마라.”
어린애한테나 할 법한 걱정이었지만 그에게는 워낙 끼친 걱정이 많은 터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욕실 문을 닫고 입고 있던 품이 넉넉한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땀을 이만큼이나 흘렸는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오한이 들었다.
‘설마 또 감기가 오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감기에 걸리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되는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정수리부터 맞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엘로힘이 말했던 7일도 이제 끝이었다. 하룻밤만 더 보내면 하태헌을 보내 줘야 한다.
그와 겨우 다져 놓은 신뢰를 무너뜨려야 하는 게 뼈아팠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은 남았으니 그동안 하태헌을 잘 설득해 보자. 굳게 다짐하며 서둘러 마저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태헌 씨?”
욕실에 비치된 드라이기로 젖은 머리카락까지 대충 말리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걸어 나왔다. 예상대로 하태헌은 더 자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나왔군.”
“그런가요?”
그래도 20분은 걸렸을 텐데. SS급이니 씻는 소리가 들려서 다시 자기도 힘들었을 거다.
“마셔.”
미안함에 눈썹 끝을 내리며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협탁 위에 놓인 물잔을 내밀었다. 내가 씻는 사이에 주방으로 가서 떠 왔나 보다. 고맙게 받아들여 마셨다. 따듯한 물이 메마른 목을 적셨다.
“다시 잘 수 있나?”
어느새 시간은 3시를 훌쩍 넘어갔다. 하태헌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피곤하긴 해요.”
“누워라. 잠들지는 못하더라도 쉬는 게 나아 보이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와 같이 하태헌 옆에 누웠다. 그가 협탁 전등도 꺼 줬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그건 하태헌도 마찬가지인지, 눈을 감지 않은 채로 반쯤 젖은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저기, 하태헌 씨.”
“말해.”
“그…….”
나른한 목소리로 답하는 그의 모습에 어쩐지 다음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나는 이곳에 남아야겠으니,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당신과 나눈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다고 말해?
머릿속이 단숨에 복잡해지며 바늘로 찔리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몇 번이고 입만 달싹인 끝에 결국 한마디 뱉어 냈다.
“잠이 오지 않네요.”
두려움에 겨우 생긴 기회를 차 버린 격이었다. 스스로의 한심함을 질책하며 눈가를 찌푸리자 하태헌이 따듯한 손으로 내 미간을 문질러 왔다.
“안색이 또 안 좋아지는군.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러는 거지?”
그는 내가 악몽에 시달려서 상태가 나쁜 거라고 오해하는 듯했다. 반절 정도는 맞긴 하지만, 꿈자리가 사나웠던 것은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으니 딱히 큰 타격이 있지는 않았다.
“별거 아닙니다.”
“…….”
“좀 불안했나 봅니다. 아직 미래 계획을 세워 둔 게 하나도 없거든요.”
멋쩍은 기분에 장난처럼 덧붙였다.
“예언자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거라. 밑천 다 털린 거죠, 뭐.”
“괜찮다.”
그의 손이 볼을 쓸고 지나 목으로 내려왔다. 귓가를 가볍게 스치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로헌으로 와라.”
“예?”
“그리고 천천히 고민하면 된다. 앞으로 뭘 할지는.”
로헌에 들어가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네 나이에 뚜렷한 목표나 계획이 없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
“아…. 나이요?”
“내가 곁에서 도와주겠다.”
“하태헌 씨, 저는….”
“로헌으로 와.”
“…….”
하태헌이 재차 말했지만,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디에 소속되는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하태헌의 체온 대신 햇볕이 침대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창문을 뚫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매번 아침에 일어나 엘로힘과 다 같이 식사했는데, 오늘은 늦잠을 잔 탓에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엘.”
“잘 잤니?”
씻고 방을 나서자 마침 앞을 지나가던 엘로힘이 인사를 건네 왔다.
“악몽을 꿨다고 들었다. 다행히 지금은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구나.”
“나쁘지 않습니다.”
“내가 준 사탕은 일반적인 꿈은 막을 수가 없단다. 유감스러운 부분이지.”
그가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게 내밀었다.
“장미꽃 차다. 마시렴. 향이 꽤 좋아.”
“감사합니다.”
“다 마시면 식사를 하는 게 좋겠구나. 먹고 싶은 거 있니?”
주방으로 향하는 엘로힘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하태헌 씨는요?”
“그 아이는 식사를 마치고 바다를 보러 갔다.”
하태헌은 이곳에 지내는 동안 종종 바다를 보러 갔으니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다 마신 찻잔을 테이블에 내리며 입을 열었다.
“엘.”
“응?”
“식사하기 전에 잠깐… 대화를 좀 하고 싶습니다.”
내 요청에 엘로힘이 나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여기서 할까? 아니면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겨도 좋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하태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답했다.
“여기서도 괜찮습니다.”
“말해 보렴.”
고개를 숙인 채로 한참을 고민했다. 주방에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엘로힘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기다려 주었다.
“하태헌 씨를…….”
긴장된 숨을 내쉬며 얼굴을 들었다.
“꼭 보내야 합니까?”
“이런, 세현아.”
내 말에 그가 안타깝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지 않니.”
“방법이 없는 겁니까?”
엘로힘이 가까이 걸어와 양어깨를 붙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그 아이가 이곳에 남으면 많은 것을 할 수 없어.”
달래듯 차근차근 나오는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하태헌이 알기를 원치 않잖아.”
“…….”
“네가 ‘어비스’를 통해 모든 걸 봐 왔다는 사실을.”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쓴 미소를 지은 엘로힘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와 하태헌은 상황이 달라. 그 아이는 알아야 할 정보가 이미 정해져 있다. 만약 그 외의 것을 알게 된다면 추가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게 목숨이 될 수도 있어. 그건 내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란다.”
“…그 부분은 몰랐습니다.”
애당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해 본 질문이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거절당하니 예상보다도 더 기운이 빠졌다. 눈을 내리까는 내 뺨을 어루만진 엘로힘이 살짝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제가 하태헌 씨를…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만약 내일 떠나보내는 순간까지 말하지 못한다면 내가 도와주겠다.”
엘로힘이 나를 돕는다고? 고맙기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하태헌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엉뚱한 이를 걱정하는구나.”
차갑게 웃은 엘로힘이 내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를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니 흔쾌히 돕겠다만, 세현아. 그렇게 되면 너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야 한다.”
“무슨 뜻입니까?”
“하태헌이 그간 온순하게 행동했어도 수틀리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란다. SS급은 굉장히 위험한 존재니까.”
단호한 태도에 기분이 순식간에 불편해졌다. 엘로힘의 손을 치우며 반박했다.
“하태헌 씨가 함부로 저를 공격할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성적이고 냉정하지. 도덕적이고. 하지만 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망설이지 않을 거다.”
“이것도 예언입니까?”
“아니. 그저 너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엘로힘이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세현아. 어비스에서 봤잖아. 하태헌의 오른손이 가진 또 다른 능력을.”
“…하지만 그 능력은.”
“쓰는 것을 싫어하지. 맞아. 하지만 써야 할 때가 온다면 주저 않고 쓸 거란다.”
엘로힘이 내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나를 가엽게 보며 그가 말했다.
“명심해라, 세현아. 그 아이는 반드시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