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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53)화 (153/394)
  • 153화

    39. 신뢰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사흘이 지났다.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엘로힘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하지만 하태헌은 마음을 놓지 않고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밤에는 내 방으로 찾아와 반드시 나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그래야 안심이 되는 듯했다.

    그와 한 침대에서 잠드는 일은 이제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태헌은 어쩌면 이미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곳에 남을 거라는 것을. 나를 믿겠다고 했지만, 본능적인 감각은 다른 문제일 테니까.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읽던 책을 덮었다. 하태헌이 운동을 하러 지하실로 내려간 틈에 2층 서재에 들른 참이었다. 서재라기에는 매우 크고 넓은 데다, 거대한 책장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도서관에 가깝지만.

    방금 덮은 책은 세계 각지에서 자라나는 다양한 식물에 대해 나와 있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식물도감?

    하태헌에 관한 생각을 잠시라도 쉬려고 꺼내 든 건데 어마어마하게 재미없어서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냥… 하태헌을 따라서 한국으로 돌아갈까?’

    힘들게 예언자를 만나게 됐는데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엘로힘이 말했던 7일이 끝난 후에는 과연 쓸 만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가 ‘어비스’에 나온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부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른 모든 것도 알고 있을 거라고 마냥 믿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하태헌이 내게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신중하게 대답할 걸 그랬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대답했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엘로힘의 제안과 하태헌의 신뢰를 두고 저울질을 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결국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생각하고 다른 읽을거리라도 찾아봐야겠다.

    꺼냈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두고 다른 책장을 살펴봤다. 살면서 책을 읽어 본 경험이 워낙 적어서 어떤 게 재밌을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어비스 같은 거 없나?’

    장르가 뭐였지. 판타지 소설? 이렇게 책이 많으니 한두 권쯤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도 없이 넓게 이어진 서재 중앙을 가로지르며 책의 이름을 훑어보던 그때였다. 바닥에 쌓여 있는 낡은 종이와 책 사이로 유일하게 아무 제목이 쓰여 있지 않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대충 봐도 평범하지 않은 책이었다. 주변에 가득 채워진 낡은 종이를 손으로 치워 내고 책을 들어 올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먼지들이 뿌옇게 날렸다.

    “뭐지?”

    몇 번을 돌려 봐도 제목은 보이지 않았다. 딱딱한 하드커버 표지는 피로 물들인 것처럼 온통 검붉은 색이었다.

    무슨 책인지 전혀 알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펼쳐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대충 훑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표지를 열었다.

    「57」

    첫 장 중앙에 써진 숫자였다. 57? 설마 장편 소설의 57권이라는 건 아니겠지. 이번 책도 재미가 없으면 지하로 내려가서 하태헌을 따라 운동하는 거 말고는 시간 때울 것도 없을 텐데.

    미간을 찌푸린 채로 페이지를 파라락 넘겨 아예 중간 부근을 펼쳤다. 새하얀 속지 위에 써진 검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자리가 좁아졌다. 나는 덤벼드는 상대를 베어 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버텨야 한다. 어떻게든.」

    검은 가면을 쓴 자들. 낯설지 않은 내용에 미간을 좁혔다. 납치됐을 때 겪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발, 제발. 속으로 간절히 빌며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몰려드는 적들 사이로 릴리스를 휘두르는….」

    “으, 윽…?!”

    홀린 듯이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 순간, 눈앞이 강하게 뒤틀리며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 차올랐다. 놀란 마음에 급히 책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마치 피부에 달라붙은 것처럼 쉽사리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흐… 허억….”

    일렁거리던 시야가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짙은 어둠이 아주 잠시 지나가고, 곧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피 냄새가 코끝으로 느껴졌다.

    “이게 무슨…….”

    방금까지 있던 거대한 서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이 소 떼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에는 불길이 치솟으며 수십의 시체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혼탁한 연기 사이로 비명과 피가 튀어 오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가파르게 뛰며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C12 구역에서 겪었던 환상이 또 시작되기라도 한 건가?

    ‘아니,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것은 그때와 다른 무언가의 힘이라는 것을.

    숨을 천천히 내쉬며 정면을 바라봤다. 날카롭게 빛나는 검날이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을 베어 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검의 주인은 천사연이었다.

    「몰려드는 적들 사이로 릴리스를 휘두르는 하태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천사연은 조금도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천사연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하태헌이 보였다. 본래라면 천사연이 가지고 있을 릴리스의 검을 사용하고 있는 그는 내가 구해 줬던 SS급 코트도 착용하고 있었다.

    목이 잘려 쓰러지는 시체를 밟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하태헌의 얼굴은 모든 감정이 잘려 나간 것처럼 보였다. 나를 볼 때면 따듯함을 담아내던 검은 눈동자는 다정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벗어날 방도가 있을까?」

    천사연이 초조한 낯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언제나 뭐든 꿰뚫어 보고 여유롭게 행동하던 그 천사연이 왜….

    「내 실수다.」

    천사연이 흰 뺨에 잔뜩 묻은 피를 대충 닦아 내며 거칠게 호흡했다.

    「내가 또 실수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불안정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천사연!”

    서둘러 천사연에게로 달려가 팔을 뻗었다. 그러나 내 손은 천사연을 붙잡지 못했다. 그제야 몸이 당장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불투명하고 흐릿한 것을 알아챘다.

    “어째서….”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양손을 내려다보는데, 비열한 조롱이 비명 사이로 들려왔다.

    「벌써 지쳤나? 천사연.」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솟구치는 불길 틈으로 걸어 나오는 이는 새하얀 가면을 쓴 사마엘이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적들과의 싸움으로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천사연이나 하태헌과는 달리, 그의 정장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아주 처절하군. 가엽게도.」

    사마엘이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리자 미친 듯이 달려들던 이들이 모든 행동을 멈췄다. 수십, 어쩌면 수백에 달하는 수의 지배당하는 이들을 사방에 둔 채로 천사연과 하태헌이 사마엘을 바라봤다.

    「그런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줄까 한다.」

    사마엘의 등 뒤로 높은 구두를 신은 인형 하나가 등장했다. 인형에게 붙잡힌 채로 끌려오는 이의 얼굴을 본 나는 비명처럼 외쳤다.

    “박건호 팀장님!”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심하게 다친 박건호였다. 인형이 거칠게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들게 하자, 그가 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를 쏟아 냈다. 박건호를 발견한 천사연의 검 끝이 일순간 흔들렸다.

    「재밌는 표정이야. 그래. 아주 재밌군.」

    「…….」

    「혹시나 궁금할 수도 있으니 알려 주도록 하지. 함께 있던 개새끼는 죽었다. 몸을 날려 이 친구를 살리더군.」

    날씨 얘기를 하듯 가볍게 이어진 말에 박건호가 힘겹게 눈을 떴다. 사마엘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살의와 더불어,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비참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마엘이 옆에 서 있던 검은 가면을 쓴 이에게 장검을 건네받았다. 새파랗게 벼려진 검날이 박건호의 목에 닿았다.

    「정말 눈물 나는 우정이야. 그렇지 않나?」

    장난처럼 검날을 박건호의 목 위로 툭툭 내리치던 사마엘이 창백하게 질린 천사연과 시선을 마주하며 밝게 외쳤다.

    「왜 그렇게 굳어 있지? 웃어, 천사연! 그날처럼!」

    “안 돼!”

    검날이 망설임 없이 박건호의 목을 자르고 지나갔다. 주인 잃은 몸이 아래로 떨어져 흙바닥을 굴렀다. 삐이이, 이명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흐으… 헉….”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입 안을 강하게 짓씹었다. 비릿한 쇠 맛과 함께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았던 정신이 아슬아슬하게 돌아왔다.

    「하하… 하하하! 하하!」

    사마엘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믿기 힘든 상황에 숨을 헐떡이는데, 끊겼던 천사연의 생각이 다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 둘만 보내는 게 아니었다.」

    검을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번에도 실패했군.」

    피에 잔뜩 젖은 검이 위로 들렸다. 나는 그것이 릴리스를 얻기 전 천사연이 사용하던, 치유 속도를 저하하는 S급 검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둘이나 죽었으니, 설령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빛이 사라진 검은 눈으로 그가 제 손목에 검날을 올렸다.

    「아무 의미가 없다.」

    천사연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챈 하태헌이 소리쳤다.

    「천사연!」

    깊게 베어진 손목의 상처에서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그 피가 지나간 모든 곳에 뜨거운 불이 솟구쳤다.

    「그만둬, 천사연!」

    하태헌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한 천사연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이토록 공격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기운의 흐름은 이미 한번 경험해 본 적 있었다.

    폭주 위험 단계. 식은땀을 흘리며 흐릿한 몸으로 어떻게든 천사연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 마, 천사연! 천사연!”

    목이 터져라 불러도 천사연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몸이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윽, 제발…!”

    바닥을 기며 저항했지만 모든 것이 점차 멀어져 갔다. 뒤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에 눈앞이 빠르게 집어삼켜졌다.

    “천사연!”

    천사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잿빛 하늘 아래에 선 천사연이 사마엘을 향해 몸을 날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새하얀 빛에 잠겼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아찔한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허억, 숨을 삼켜 내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에 나무로 된 바닥이 보였다.

    “세현아.”

    어느새 나는 서재로 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들고 맞은편에 서 있는 엘로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미안하구나.”

    식은땀을 흘리는 내게 엘로힘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다 치운 줄 알았는데, 하나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손에는 내가 봤던 붉은 책이 들려 있었다. 추가적인 설명이 없어도 방금 겪은 일이 저 책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뭡니까, 그 책은?”

    가쁜 호흡을 힘겹게 억누르며 묻자 엘로힘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읽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단다.”

    “…….”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적혀 있는 책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기억일 수도 있고, 과거의 기록일 수도 있지.”

    누군가의 기억. 과거의 기록.

    설마….

    “그 책에 써진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치닫는 불길한 생각에 급히 말했다.

    “어떻게 끝납니까?”

    “궁금하니?”

    엘로힘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담긴 뜻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제가 이곳에 남겠다고 하면, 알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천천히 붉은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무너졌다. 열기가 느껴지는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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