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밤에 3층을 올라가면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엘로힘의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침대 바로 옆에 나 있는 창문틀에 걸터앉아 어둠이 내려앉은 유리 너머를 바라봤다. 몽환적인 빛을 내며 꽃밭을 뛰어다니는 여러 동물과, 은하수가 넓게 펼쳐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내 지난 삶이 얼마나 단조롭고 팍팍했는지 새삼 느껴졌다.
3층은 천장이 모조리 유리로 되어 있다고 했으니 훨씬 멋있을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올라가 봐야겠다.
한참을 앉은 채로 창밖을 구경하는데,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쉬는 데 방해했구나.”
“아닙니다.”
방을 찾아온 이는 엘로힘이었다. 은발을 하나로 단정히 내려 묶은 그가 정갈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아름답지?”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다 안다는 듯이 그가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와 내가 꿈에서 처음 만났던 장소도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기억하니?”
“기억합니다.”
가슴이 벅찰 만큼 시원하게 트인 초원과 새파란 하늘. 나무 향을 품은 볼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떠올랐다.
“너는 그곳을 만들어 낸 게 내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예?”
“그때도 말했듯이, 나는 그저 네 꿈에 찾아갔을 뿐이야. 그 절경을 만들어 낸 건 내가 아니라 너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저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장소고요.”
“충분히 가능하단다. 그곳은 꿈속이니까.”
내 어깨를 붙잡은 엘로힘이 상체를 살짝 숙여 시선을 맞춰 왔다. 가까이서 보이는 그의 금안이 화려하게 빛났다.
“꿈은 본인도 미처 몰랐던 바람이나 생각이 실현된다. 그만큼 대단하고, 위험하지.”
방금까지 느꼈던 평온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엘로힘을 바라보는데, 그가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줬다.
“이게 뭡니까?”
“사탕.”
이번 사탕은 꿈과는 달리 새하얗고 상쾌한 향이 풍겼다. 자기 전에 갑자기 사탕이라니.
“먹어야 하나요?”
“물론이지. 이왕이면 지금 내 앞에서 먹어 줬으면 좋겠구나.”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흠.”
잠시 입가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엘로힘이 사탕을 가리켰다.
“이곳은 전체적으로 내 힘이 짙게 깔려 있단다. 그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하지.”
“하태헌 씨를 잠들게 만든 나비처럼요?”
“그래. 하지만 그 나비와 다르게 네게는 나쁜 영향을 준 것 같구나.”
그가 하려는 얘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감이 왔다. 사탕치고는 지나치게 새하얀 것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것도 먹으면 꿈을 꿀 수 있습니까?”
“아니. 그 반대다.”
엘로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현아. 너는 그동안 다양한 꿈을 꿔 왔다. 그 몸의 기억만이 아닌, 네가 가진 기억도.”
“…….”
“그러니 이미 알고 있겠지. 원치 않은 꿈을 꿨을 때, 현실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을.”
“엘, 당신의 힘이 꿈을 꾸도록 만든다는 뜻이군요.”
“그래.”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탕을 입에 넣었다. 엘로힘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사탕은 보기와 달리 아찔할 만큼 싸하고 독한 맛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매일 하나씩 줄 테니 꼭 잊지 말고 먹도록 해라.”
“일주일 동안만요?”
“안타깝게도 그렇단다. 네게는 꿈이 필요해. 하지만 7일간은 그런 걱정 없이 편히 쉬도록 하렴.”
둥글고 딱딱했던 사탕은 입에 넣기가 무섭게 녹아내려 사라졌다. 내가 사탕을 다 먹었다는 것을 눈치챈 엘로힘이 다정한 손길로 등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좋은 밤 되렴, 아이야.”
방을 나선 그가 인사를 보내며 문을 닫았다. 다시 혼자 남겨진 나는 복잡해진 마음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지만,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꿈이라. 지금까지 꿨던 한이결의 과거를 뜻하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이결의 몸에 들어오고 난 후로 꿨던 꿈을 차근차근 되짚어 봤다.
제일 처음 떠올린 과거는 한이결이 떠나가는 천사연을 울며 붙잡는 장면이다. 그 후는 천사연과 사이좋게 티타임을 즐기는 모습이고.
어비스에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라, 깨어나서 굉장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설마 내 과거의 꿈도 중요한 건 아니겠지?’
어쩐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엘로힘이 내게 처음 건넸던 사탕은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를 먹고 한이결의 기억을 꿈으로 만났으니, 분명 나머지도 같은 힘을 지녔을 텐데.
입술을 깨물며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진 작은 전등 빛만 은은하게 켜져 있는 어두운 방. 갑자기 이곳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하아….”
엘로힘의 말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쓰러지듯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닫힌 방문이 또다시 열렸다. 나갔던 엘로힘이 돌아온 줄 알았는데, 방으로 들어선 이는 놀랍게도 하태헌이었다.
“하태헌 씨?”
“…누가 왔다 갔나?”
눈가를 좁히고 복도와 방 안을 살펴본 하태헌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복도에서 누군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 예언자가 다녀갔습니다.”
“뭐?”
엘로힘이 들렀다는 말에 하태헌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사탕을 줘서 먹었다는 얘기까지 하면 난리가 나겠군. 급히 거짓말을 덧붙였다.
“딱히 뭘 하지는 않고, 잘 자라고 인사만 나눴어요.”
“쯧.”
방 너머를 노려보며 혀를 찬 하태헌이 문을 닫고는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풍기는 기세가 워낙에 사나워 앉은 상태로 몸을 뒤로 살짝 뺐다.
“올라가.”
“네?”
깔려 있던 이불을 걷어든 그가 턱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흉흉한 눈빛에 주춤거리며 침대 안쪽으로 물러나자, 하태헌이 당연하다는 듯이 위로 올라왔다. 그 뻔뻔한 모습에 기겁하며 어깨를 붙잡아 막았다.
“잠깐만요, 하태헌 씨.”
“뭐지?”
“왜 올라오세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했는데, 하태헌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었다.
“불안하면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런데요. 침대에는 대체 왜….”
“같이 자겠다고 했잖아.”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전 고민해 보겠다고 했는데요?”
“시끄럽군. 눕기나 해라.”
구석으로 밀려난 베개를 다시 끌어당긴 하태헌이 나를 억지로 눕혔다. 어이없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문을 잠그지도 않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자겠다는 거지? 잠든 사이에 예언자나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습격할 가능성이 있다.”
“문 잠그겠습니다.”
“고작 저런 평범한 문을 잠근다고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나?”
“…….”
바다에서 대화 나눌 때는 그런 반박 하지 않았잖아. 배신감이 치솟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도망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자던데, 웃기지도 않군. 자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게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음…….”
역시 주인공이라 그런가, 말솜씨가 장난 아니다. 아니면 내가 피곤해서 쓸 만한 반박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건가?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항복하며 순순히 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대자, 하태헌도 구겼던 미간을 피고 전등을 껐다. 방 안에 빛이 모조리 사라지니 창문 너머로 하늘을 가득 채운 별 무리가 더욱 선명해 보였다.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운 하태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이내 굳게 감았다. 그 모든 행동이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누워 있는 하태헌을 응시하다 소리 낮춰 불렀다.
“하태헌 씨.”
“…말해.”
“저를 왜 믿으시는 겁니까?”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알려 준 것이 없었다. 내 정체도, 예언자를 찾는 이유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건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태헌은 나를 받아들이고 친구라고 말해 줬다. 물론 오래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고맙고 미안했다.
하태헌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그의 검은 눈동자가 밤하늘처럼 아름다웠다.
“네가 보여 준 지난 선택을 믿는 거다.”
“지난 선택이요?”
“제 안위는 아주 쉽게 버리면서, 남은 기어코 지켜 내더군. 몇 번이고.”
“…….”
“그랬던 너니까, 무엇을 하든 타인에게 해를 끼칠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말을 멍하니 들었다.
처음이었다. 나를 이렇게 평가해 주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어쩐지 하태헌의 눈을 보기가 힘들어 시선을 내렸다. 얼굴로 피가 확 몰렸다. 부디 어둠이 붉어진 얼굴을 가려 주기를 바랐다.
“믿으니까, 이제부터는 타인보다 자신의 안위를 좀 더 챙겼으면 하는군.”
“노력하겠습니다.”
“못 믿겠군.”
“방금 1초 전에 믿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거랑은 별개다.”
뭐라는 거야. 황당함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키득거리며 웃자, 하태헌이 이불을 올려 어깨까지 덮어 줬다.
“그만 떠들고 자라.”
“알겠습니다.”
어차피 더 물어볼 질문 거리도 없었다. 다시 눈을 감은 하태헌의 수려한 얼굴을 한번 본 후에 따라 하듯 눈을 감았다.
하태헌이 내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게 돼서 기쁜 마음과 함께, 며칠 후에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이 공존했다.
‘그렇다고 예언자와의 거래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결국 하태헌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으면서 거래도 성공시키고 싶은 내 욕심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아는데도.
목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억지로 삼켜 내며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하태헌은 조금의 움직임 없이 누워 있었다.
잠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와 거리를 더 좁혔다. 맞닿은 팔에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제야 불안으로 일렁였던 속이 조금은 편해졌다. 더불어 낯설게 다가왔던 방 안도 어느새 괜찮아 보였다.
이게 바로 주인공 효과인가. 말솜씨도 대단한데 사람이 가진 불안증도 잠잠하게 해 주다니.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며 쏟아지는 잠을 받아들였다. 하태헌에게 당부했던 것처럼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려면 깨어 있어야 하는데도, 해일처럼 밀려드는 졸음을 떨쳐 내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하태헌이 옆에 있으니까… 괜찮겠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태헌이니까.
분명 괜찮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