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비숍 소매로 만들어진 새하얀 블라우스가 피부에 부드럽게 닿아 왔다. 엘로힘이 준비해 준 상의와 바지는 놀라울 만큼 몸에 딱 맞았다.
“엘.”
옷을 갖춰 입자마자,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엘로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날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불편하지는 않고?”
“네. 좋습니다.”
엘로힘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쓸며 시선을 맞춰 왔다.
“이곳은 기온이 항상 일정하니, 이 정도만 입어도 춥거나 덥지 않을 거다.”
그 말에 벽면을 따라 크게 나 있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듯한 햇볕이 비추는 바깥은 확실히 봄날 날씨처럼 따듯하고 평온해 보였다.
“방은?”
옅은 베이지색의 방 내부는 넓은 창문과 침대, 기본적인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꽃병에 꽂힌 새하얀 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방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지낼 곳이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편히 말하거라.”
앞으로 지낼 곳이라. 그 말에 목덜미를 쓸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것처럼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린 엘로힘이 화제를 돌렸다.
“하태헌. 그 아이는 네 바로 옆방이다. 지금은 바다를 보러 간 것 같다만. 너도 궁금하면 가 보렴.”
“바다요? 여기 바다가 있습니까?”
“그래.”
집 중앙에 있는 거실로 나를 잡아끈 엘로힘이 구석에 있는 나무 문을 가리켰다.
“저 뒷문으로 나가면 사과나무가 있단다. 그 사과나무를 넘어 조금 더 걸어가면 바다가 보일 거다.”
별게 다 있네.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려는데, 엘로힘이 그보다 먼저 내 손을 잡아 왔다.
“혹시나 해서 당부하는데, 세현 아이야.”
“예?”
“사과나무는 조심하거라.”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선뜻 답하지 못하고 눈가를 좁히는 내게 엘로힘이 이어 말했다.
“가까이 가거나 구경하는 건 얼마든지 괜찮다. 하지만 열매를 만지는 것은 안 된다.”
“사과 말입니까?”
“아니. 열매.”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사과나무의 열매면 그게 사과 아닌가?
“당연히 함부로 따거나 먹는 것도 금지란다. 알겠니?”
“예에….”
굳이 경고하지 않아도 남이 소유한 나무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로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놔주었다.
“재밌게 놀다 오거라. 다녀오면 같이 식사를 하자.”
문밖으로 따라 나와 손까지 살랑살랑 흔드는 엘로힘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사과나무. 사과나무라.’
엘로힘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얼마나 걸었을까, 꽤 거리가 되는데도 훤히 보일 만큼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허.”
그제야 왜 엘로힘이 그렇게 신신당부했는지 깨달았다. 성인 남성 열 명이 팔을 벌려 안아도 다 못 채울 만큼 거대한 나무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홀린 듯이 다가가 황금색 열매를 자세히 훑어봤다. 겉모양만큼은 사과와 똑 닮은 그것은 찬란하게 빛나며 묘한 향을 풍겼다.
넋을 놓고 무심코 손을 뻗으려던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만질 뻔했다.
‘미친, 괜히 금지한 게 아니었구나.’
한번 경각심이 들자, 방금까지만 해도 탐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던 황금색 사과가 굉장히 기이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장소였지만, 그만큼 이질적이고 비정상적이었다. 신체 능력이 범인 이상인 SS급을 단번에 재우는 나비부터 하늘을 나는 귀 넷 달린 여우, 황금색 사과가 열리는 나무까지.
엘로힘도 단순히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자라기에는 묘한 구석이 많았다. 찝찝함에 이마를 긁적이며 나무를 지나쳤다.
미리 설명을 들은 대로 나무 뒤로 이동하니, 절벽 아래로 모래사장과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능력을 끌어 올려 바람을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하태헌 씨.”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하태헌을 발견했다. 그도 옷을 새로 받았는지 블라우스보다 좀 더 각지고 뻣뻣한 흰 셔츠에 짙은 고동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별로다.”
내 질문에 그가 곧장 답했다. 왜 별로인지 알 것 같아서 어색하게 웃었다.
“예언자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놈들은 가까이 두면 위험하다.”
…어째 엘로힘만 노리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이곳이 싫으시면 먼저 가셔도….”
“좀 걷지.”
은근슬쩍 내밀어 보는 제안을 싹둑 자르며 하태헌이 걸음을 옮겼다. 그와 어깨를 맞대고 모래사장을 걸으며 입을 열었다.
“하태헌 씨도 오면서 보셨습니까? 사과나무요.”
“그래. 기운이 심상치 않아서 가까이 가 보지는 않았다.”
오. 역시 SS급은 다르구나. 새삼 놀라며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황금으로 된 사과가 엄청 많이 달려 있더라고요. 그것 외에도 이상한 게 잔뜩 있어서… 마냥 평화로운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거다. 일단 여기 주인부터가 보통이 아니니까.”
“하태헌 씨.”
셔츠 소매를 살짝 붙잡으며 부르자 그가 멈춰 서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예언자가 알려 줬습니다. 제 바로 옆방이 하태헌 씨 방이라고.”
“그렇군.”
“방문을 잠그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곧장 저한테 오세요. 늦은 밤이라도 괜찮으니까요.”
“뭐?”
“아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마음 편히 놓고 지내기에는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게 불안했다. 경계심을 늦추지 말자는 의도로 한 제안이었는데, 어째 하태헌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혹시 자존심 상한 건가? 고작 A급인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나는 오해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급히 덧붙였다.
“물론 저도 무슨 일이 생기면 하태헌 씨 방으로 찾아가겠습니다.”
“허…….”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하태헌이 소매를 붙잡고 있는 내 손목을 잡아챘다.
“차라리 방문을 잠그고 있어라. 뭐가 들이닥칠 줄 알고 열어 둔다는 거지?”
“에이, 제 능력 아시잖아요. 도망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문 잠갔다가 하태헌 씨가 못 들어오는 거보다는….”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함께 자는 게 낫겠군.”
“엇.”
그런가? 그럴싸한 계획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한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하지만 침대가 하나뿐인데요?”
“이제 와서 그걸 신경 쓰나? 벌써 두 번이나 같은 침대에서 자 놓고.”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 하태헌 씨 집 침대는 크잖아요. 여기는 1인용이고.”
“껴안고 자면 되겠군.”
…남자끼리 그건 조금. 한 침대 쓰는 것도 불편한데 껴안고 자는 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 떨떠름한 내 반응을 알아챈 하태헌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두 번 다 껴안고 잤는데, 뭐가 문제지?”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
어쩐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대답이 궁핍해졌다.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갖은 고민 끝에 시무룩하게 말했다.
“고민해 볼게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나를 비웃은 하태헌이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하태헌과 함께 한참 동안 모래사장을 거닐며 바다를 구경했다.
***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나무 식탁 위로 요리가 담긴 접시가 정갈하게 올려졌다. 파릇한 연어 샐러드를 하태헌 앞에 놔 주며 엘로힘이 빙긋 웃었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해 봤는데, 마음에 들면 좋겠구나.”
“예?”
식탁 위에 가득 준비된 요리를 차근히 살펴봤다. 각종 샐러드와 과일, 수프,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케이크.
“제 건 케이크입니까?”
“단 요리 좋아하지 않니?”
“좋아하긴 하는데….”
그건 디저트로 먹었을 때고. 식사는 좀 정상적인 음식으로 하고 싶은데.
하지만 엘로힘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얻어먹는 처지에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먹으려는데, 하태헌이 한숨을 쉬며 수프를 내 앞으로 밀어 줬다.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케이크로 식사를 때울 수는 없다.”
그 말에 엘로힘이 뒤늦게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허당기가 있군.
빈속에 케이크를 집어넣을 뻔한 나는 하태헌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며 수저를 들었다.
“이 집과 주변을 간단하게 설명해 줄까 하는데.”
뜨겁게 달군 찻물을 컵에 따르며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뒷문에 있는 사과나무처럼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종종 있으니 말이다.”
조심해야 하는 것들? 엘로힘 몰래 맞은편에 앉은 하태헌과 시선을 교환했다.
“식사하며 편히 들으렴.”
식탁 옆을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선 엘로힘은, 면바지 아래로 새하얀 발목과 발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맨발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였다.
“공간 제어 아이템이 가동되고 있는 이 집은 총 4층으로 이뤄져 있단다. 1층은 거실과 주방, 침실이 있고 2층은 서재, 3층은 천장이 유리로 된 휴식 공간이지. 밤에 한 번 올라가 보렴. 아름다운 은하수를 볼 수 있단다.”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가던 엘로힘이 이번에는 반대로 아래를 가리켰다.
“지하에는 간단하게 준비된 훈련실이 있다. 여러 운동 기구가 있으니까 몸을 풀고 싶으면 내려가서 편히 쓰도록 해.”
“음, 혹시 집 안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일단은 없구나.”
개운하지 않은 대답에 하태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수프를 떠먹으며 생각했다.
‘일단은, 이라니. 나중에는 생긴다는 건가?’
뭐가 됐든 우선은 넘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불편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밖은 어떻습니까?”
“밖은 집보다는 조심해야 하지. 그래도 많지는 않단다. 첫 번째로는 뒷문에 있는 사과나무.”
엘로힘이 들고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두 번째는 들어올 때 통과했던 공간 이동 벽. 낯선 이들이 함부로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 놨으니,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나갈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면 된다.”
하태헌과 다시 한번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곳에 갇혔다는 건가? 7일 동안 지내며 고민해 보라더니, 실상은 이거였나.
곁에 남겠다는 하태헌을 어떻게든 보냈어야 했다. 괜히 나 때문에 갇히게 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마지막 세 번째. 여기서 지내다 보면 다양한 동물들을 볼 텐데, 그 아이들이 겉보기에는 순해 보여도 꽤 강하니까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조심하렴. 그래도 다들 착하니까 못되게 굴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
밝은 목소리로 설명을 끝낸 엘로힘이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 하태헌을 바라봤다.
“혹시 질문 있니?”
“…아뇨.”
조심해야 할 게 천지라는 건 알겠다. 한숨을 삼켜 내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