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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50)화 (150/394)

150화 

예언자를 따라가자 넓게 펼쳐진 초원 위에 세워진 작은 집이 보였다. 나무로 된 문 너머에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큰 내부가 있었다. 아무래도 집 전체에 공간 제어 능력이 적용된 듯했다.

“자.”

응접실로 나를 안내한 예언자가 테라스 창문을 열며 내게 손짓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테라스 난간 너머로 꽃밭에 누워 있는 하태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면 안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네.”

“걱정하지 마라. 길게 붙잡을 생각은 없으니까.”

빙긋 짓는 웃음에 따라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혔다. 테라스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에 서로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찾아올 거라고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네가 마음먹은 순간부터.”

막힘없이 나온 대답은 그만큼 단호했다. 말뜻을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린 내게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 예언자가 따듯하게 데워진 꽃 차를 앞에 놔 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 같더군.”

잔에 담긴 연한 다홍빛 찻물 위로 붉은 꽃잎이 살랑이며 떠다녔다.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옷걸이에 건 예언자가 내게 시선을 보냈다.

“알고 싶은 부분도, 알아야 할 부분도. 네가 원한다면 모두 답을 줄 수 있다.”

“…….”

“다만 대가가 필요하지.”

역시 그런가.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제가 뭘 드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긴장했다는 것을 눈치챈 예언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대가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을 거다. 엄연히 따지면 거래니까. 내가 가진 정보와 네가 가진 정보를 교환하는 거지.”

“글쎄요. 저는 당신에게 거래로 내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섣부른 판단인 것 같구나.”

로브에 가려져 있던 새하얀 블라우스를 드러낸 예언자가 쇄골 부근 단추를 채우며 이어 말했다.

“너는 내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어. 나는 그중 두 가지를 대가로 요구할 거란다.”

“그게 뭡니까?”

“흠, 일단은.”

블라우스 단추를 목 끝까지 깔끔하게 채운 그가 내게 새하얗고 큰 손을 내밀었다.

“인사부터 할까? 내 이름이 궁금하지 않니?”

“아.”

그제야 너무 성급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엘로힘. 간단하게 엘이라고 부르면 된다.”

“엘.”

영어라기엔 미묘한 발음이었다. 악수를 끝낸 그가 내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혹시 불편하지 않다면 너를 세현이라고 부르고 싶구나. 한이결이라는 이름은 이미 충분히 불리고 있으니까. 물론 같이 온 이가 없을 때만. 어떤가?”

“…그럼 상관없습니다.”

“좋다.”

엘로힘은 마치 내가 어린아이인 것처럼 대했다. 그러고 보니 하태헌에게도 ‘아이’라고 불렀지. 아마 하태헌을 향해 ‘아이’ 운운하는 이는 그가 유일할 것이다.

“그럼 인사도 나눴으니 이제 대가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엘로힘이 만졌던 머리카락을 괜히 한번 쓸며 고개를 들었다.

“내게 두 가지만 준다면, 네가 묻는 모든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단다.”

“그 두 가지가 뭡니까?”

“일단 첫 번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살짝 웃었다.

“너의 시간을 내게 줬으면 좋겠구나.”

“시간이라면…….”

“70일 동안 내 곁에 머물거라. 그게 대가다.”

70일이라니.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도 금방 돌아갈 마음은 없었지만,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태헌 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를 따라와 준 하태헌은 휴가가 끝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질문의 뜻을 바로 알아챈 엘로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당연히 보내야지. 이곳에 올 때 썼던 아이템을 다시 사용하면 한국 게이트로 나갈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대체 하태헌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해라, 한이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이곳에 오기 전, 호텔에서 하태헌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더불어 예언자를 만난 후로 줄곧 보이던 이상한 모습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엘로힘에게 물었다.

“설마 하태헌 씨도 이 제안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 줄 수 없구나. 타인과 나눈 거래 내용은 철저하게 비밀이라서.”

“…….”

알고 있구나. 하태헌이 왜 자꾸만 붙어 있으라고 말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막막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혼자 돌아가라는 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꽃병을 든 엘로힘이 가볍게 답했다.

“그렇겠지.”

볕이 들어오는 테라스 앞 작은 탁자로 꽃병을 옮긴 그가 노란 꽃잎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지금 바로 결정하라고 하지는 않겠다. 여러모로 갑작스러울 테니까. 그러니 이곳에서 저 아이와 7일 정도 머물러 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렴.”

“7일 뒤에 제가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붙잡지 않으마. 하지만 그건 그다지 좋은 판단은 아닌 것 같구나.”

엘로힘은 내가 이곳에 머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두 번째 대가는 첫 대가를 주겠다고 대답하면 그때 말하겠다.”

빛을 받아 더욱 생기 있게 보이는 꽃을 잠시간 바라보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하태헌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근처에 처음 보는 동물들이 여럿 보였다. 어디서 모여든 거지? 인기척에 고개를 든 꽃사슴 한 마리가 나를 잠시간 바라보고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하태헌 씨.”

엘로힘이 곧 깨어난다고 했는데. 두 눈을 감은 하태헌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옆에 앉았다. 근처에서 새하얀 토끼와 고양이가 뒤엉켜 장난을 치고 새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샛노란 꽃송이가 가득 핀 꽃밭에 누워 있는 하태헌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 같았다. 그의 이마를 간지럽히는 꽃을 조심히 치워 주며 쓰게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예언자를 만난다고 모든 걸 쉽게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77일이나 여기서 지내게 될 줄이야.

내가 이곳에 남는다고 말하면 하태헌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엘로힘을 만나기 전부터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그토록 신신당부했던 것을 보면 이해시키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파삭.

하태헌의 단정한 얼굴을 보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는데,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게 뭐지?

피이.

청아한 울음소리를 낸 정체불명의 동물이 다시 풀잎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고는 조금 이따가 다시 슬쩍 몸을 내민다.

아무래도 가까이 오고 싶은데 무서워서 눈치만 살피는 것 같았다.

“흠.”

잠시 고민하다가 동물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짐짓 관심 없는 척하자, 파삭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피이이.

손끝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아 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동물이 용기 내 코끝으로 내 손을 건든 것이다. 그제야 무성한 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동물의 생김새가 훤히 드러났다.

여우를 닮았지만 기다란 귀가 네 개였으며, 온몸이 온통 하얗고 반짝거렸다. 크기는 족제비와 비슷했다. 무엇보다 평범한 동물이라기엔 몬스터와 비슷한 기운을 풍겼다.

몸을 뒤로 힘껏 빼고 코만 내민 채로 냄새를 맡던 동물은 내가 가만히 있자 안심이 들었는지,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한이결.”

피익!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나와 동물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줄다리기가 끝이 나며 동물이 꼬리를 바싹 치켜세웠다. 제대로 놀란 동물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

날 수도 있어? 허탈한 심정으로 멀어지는 동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하태헌 씨.”

누운 채로 나를 바라보던 하태헌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따라 노란 꽃잎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된 거지?”

하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이 영 불쾌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물었다.

“예언자의 힘입니다.”

“…역시 심상치 않은 놈이군.”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가 곧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일부러 나만 기절시킨 건가?”

“음, 어, 아마도요?”

목을 쓸어 만지며 어물어물 대답하자 하태헌이 한층 더 형형해진 눈빛을 한 채 내게 몸을 붙여 왔다.

“제대로 대답해라, 한이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

코앞에 보이는 하태헌의 얼굴에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지난밤, 호텔에서 그의 입술이 닿았던 눈가가 어쩐지 간지러웠다.

“예언자와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무슨 얘기?”

“그건 말해 드릴 수가…. 하태헌 씨도 제가 물어봤는데 대답 안 하셨잖아요.”

“…….”

다행히 이 부분은 그도 찔리는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알아내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하태헌 씨.”

“말해.”

“일주일 정도 여기서 예언자와 지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건 예언자도 동의한 사항입니다.”

사실은 내 말에 동의한 게 아니라 엘로힘이 먼저 제안한 거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 좀 더 나아 보였다. 어쨌건 내 의지로 받아들인 거니까.

“강요는 아닙니다. 하태헌 씨는 먼저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저는 여기서 좀 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머쓱하게 웃으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내 말을 뚝 끊어 낸 하태헌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는데, 그새 잊었나?”

“하지만 일주일이나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상관없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니까.”

예상보다 더 단호하게 답한 하태헌은 곧 입을 맞췄던 눈가를 엄지로 매만져 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알겠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클로에의 힘을 빌려서 혼자 올 걸 그랬다. 일주일 후에는 그를 배신하게 될 텐데.

“한이결?”

복잡한 감정을 미처 숨기지 못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하태헌이 돌연 나를 거칠게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하는데, 뒤쪽에서 바람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다.”

엘로힘의 목소리였다. 나를 품에 숨긴 채로 잔뜩 경계하는 하태헌에게 그가 손짓했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따라와라. 일주일 동안 지낼 곳을 안내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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