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38. 예언자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거리 시장.
체인징 아이템을 착용한 나와 하태헌은 인파에 휩쓸려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며 시장 중앙으로 향했다.
머리카락 색과 눈 색만 변한 나와 달리, 어제처럼 어린아이가 된 하태헌은 내게 안긴 상태로 작은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짧아진 혀 때문인지, 거의 ‘저쪼기다’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속으로 킥킥 웃으며 하태헌이 알려 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통역 아이템을 쓰지 않아 중국어가 가득 들리는 시장 속을 한참 동안 헤매 드디어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발견했다. 발음이 세고 목소리가 큰 중국인들 덕분에 얼얼해진 귀를 매만지며 하태헌에게 물었다.
“여기 맞습니까?”
“그래.”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새하얀 고양이를 따라왔다고 했죠?”
중국에 오기 전, 하태헌의 집에서 예언자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설명을 들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새하얀 고양이를 따라가다 보니 시장 구석에 있는 좁은 골목길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결코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게이트 내부에서 마주치는 몬스터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지.”
“몬스터….”
소설 ‘어비스’에서 하태헌이 예언자를 만나게 됐을 때와 상황이 똑같았다. 악취가 나고 더러운 물로 잔뜩 젖어 있는 골목길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혹시 모르니까 체인징 아이템은 조금 더 가서 빼는 게 좋겠어요.”
하태헌이 작고 동그란 얼굴을 끄떡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앞으로 올렸다.
‘……역시 술에 취했던 거겠지?’
하태헌이 어제 내게 했던 행동은 아무래도 술기운에 한 실수처럼 보인다. 원작에서도 하태헌이 취할 때까지 마신 장면이 나온 적 없어, 그런 술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SS급이긴 해도 이틀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데다, 맥주에 와인을 연달아 마셨으니 취했을 수도 있다.
굉장히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취해서 한 행동이라 기억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를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묻어 두는 편이 좋겠다.
“하태헌 씨.”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을 한참을 돌아다닌 나는 눈앞에 나타난 막다른 길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 길은 막혔는데, 어떡할까요?”
“이상하군. 저번에는 막혀 있지 않았는데.”
혹시 몰라 앞을 가로막은 벽을 손으로 만져 봤다. 축축하고 차가운 벽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평범한 벽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공간 제어 능력자가 건드린 것 같군. 아니면 아이템을 사용했거나.”
“으음.”
난감한데.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단단하게 막힌 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물웅덩이를 밟아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돌아보자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에서 신기할 정도로 빛이 나는 새하얀 토끼가 귀를 쫑긋거리며 두 발로 서 있었다.
“하태헌 씨, 저거 보세요.”
“토끼인가?”
“하태헌 씨가 만났다는 고양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상체를 일으킨 채로 코를 움찔거리던 토끼가 이내 나와 하태헌 쪽으로 조르르 달려왔다. 크기가 내 주먹 두 개 합친 것만큼 작은 토끼는 발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이내 막힌 벽에 이마를 기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딱딱했던 벽에 수면처럼 파동이 일며 토끼 머리가 쑥 들어갔다.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데, 벽 너머로 완전히 들어갔던 토끼가 쏙 하고 다시 튀어나왔다.
“……?”
토끼가 나를 응시하며 양 앞발로 열심히 자기 얼굴을 비볐다. 마치 세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기울이는데, 하태헌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경을 뜻하는 건가?”
“안경이요?”
“체인징 아이템을 벗으라고 하는 것 같군.”
진짜인가? 혹시나 해서 안경을 벗자 토끼가 눈을 반짝 빛내며 코끝을 더 열심히 씰룩였다.
내 품에서 벗어나 가슴팍에 달았던 브로치를 뺀 하태헌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보다 훨씬 커진 하태헌이 거침없이 벽 너머로 손을 밀어 넣었다.
“체인징 아이템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던 거였나.”
큰 무리 없이 그의 손이 벽 안으로 들어갔다. 앞장서는 하태헌을 따라 나도 벽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눈앞에 따스한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어두웠던 골목길과 상반되는 이곳은, 여러 개의 문과 함께 푸른 나뭇잎과 덩굴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태헌에게 사전에 들었던 설명과 더불어, 어비스에 나왔던 상황과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원작에서 그는 새하얀 고양이를 쫓아 도착한 골목길 끝에 있는 낡은 판잣집에서 예언자를 만났다. 공간 제어가 걸려 있는 벽도, 그 너머도 이번에 처음 와 보는 것이다.
이것 참. 난감함에 혀를 차며 하태헌에게 제안했다.
“일단… 방을 좀 살펴볼까요?”
“그러는 게 좋겠군.”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뭐가 됐든 계속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가까운 방문 앞으로 가자, 문 중앙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원 주변을 여러 개의 작은 삼각형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열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뒤에서 기다려.”
나를 등 뒤로 보낸 하태헌이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아 밀었다. 부드럽게 문이 열린 방 안은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싱그러운 풀과 나무가 잔뜩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붉은 열매를 먹던 파란 새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여긴 아닌 것 같죠?”
방문을 닫으며 문양을 한 번 더 살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방문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설마 이건…….’
불현듯 비슷한 생김새의 문양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종이를 손에 억지로 쥐여 주더군.
강남 사건 직후에 만난 박건호가 전해 준 종이. 거기에 그려져 있던 숫자 같기도, 문양 같기도 한 이상한 그림.
-난 어디까지나 전달을 부탁받았을 뿐이라.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워낙에 그림의 생김새가 독특해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문양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문양?”
걸음 속도를 높여 복도를 가로질렀다. 길게 이어진 복도 양옆으로 보이는 문과 문양들을 신중하게 살피며 걸어 나갔다. 급히 내 뒤를 따라오던 하태헌이 내 손목을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기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문양을 발견했다.
“한이결, 대체….”
“이겁니다.”
중앙에 별처럼 보이는 모양과 그것을 둘러싼 나뭇잎, 위로 숫자 8을 연상시키는 다섯 개의 그림.
“여기예요, 하태헌 씨.”
“한이결.”
“들어가 보죠.”
문고리를 잡은 내 손을 하태헌이 겹쳐 잡았다.
“기다려라. 함부로 열면 안 돼.”
“하지만….”
“뒤로 물러서. 이번에도 내가 열겠다.”
단호한 말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순순히 문고리를 넘기며 한 발 물러섰다. 잠시 망설이던 하태헌이 곧 문을 힘주어 열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열린 문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문을 좀 더 활짝 열자, 사아아 하는 풀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함께 새하얀 꽃잎이 나부꼈다. 코끝으로 아카시아 향이 스쳐 지나갔다.
하얀 꽃이 한가득 피어오른 나무 위로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보였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아닌 밖으로 향하는 문이었던 건가?
달칵.
등 뒤로 문이 저절로 닫혔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비경에 넋을 놓는데, 옆에 서 있던 하태헌이 돌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헉, 크윽….”
“하태헌 씨?”
입가를 가리며 몸을 비틀거리는 그를 급히 잡아 줬다. 미간을 찌푸린 하태헌이 헐떡였다.
“한이결, 조심…….”
“하태헌 씨!”
하태헌이 더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그를 품에 안으며 외쳤다.
“정신 차리세요, 하태헌 씨!”
어째서 내가 아닌 SS급인 하태헌에게 문제가 생긴 거지? 혹여 어디라도 잘못됐을까, 불안한 마음이 확 치솟았다. 입술을 깨물며 그의 상태를 침착하게 살폈다.
다행히 안색은 멀쩡했고 불안정했던 호흡도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저 잠들었을 뿐이니, 놀랄 것 없다.”
“……!”
낯선 목소리에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하태헌의 상체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들자 맞은편에 회색의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십니까.”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나.”
부드럽게 나온 대답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언자, 맞습니까?”
“그렇게도 부를 수 있지.”
“박건호 팀장님에게 종이를 준 사람도, 꿈에서 만났던 사람도… 모두 당신입니까?”
“그래.”
바람이 한 차례 더 불어왔다. 나부끼는 풀잎 사이로 로브가 펄럭였다.
“하태헌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말했듯이, 그저 잠들었을 뿐이다. 너와 내가 나눌 대화는 그 아이가 들으면 안 되는 것들이라.”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태헌의 품에서 옅은 분홍빛 날개를 가진 나비 한 마리가 사르륵 날아올랐다. 새하얀 손끝으로 날아가 내려앉은 나비에게서 반짝이는 가루가 흩날렸다.
“이 나비는 상대를 깊은 잠에 빠지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지.”
“SS급을 잠들게 할 정도로 강한 힘은…….”
“보통은 그렇지 않지. 하지만 이 아이는 내 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니 충분히 가능해.”
새하얀 손가락이 살짝 까딱이자, 나비가 다시 하늘 위로 높게 날아올랐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구나.”
“…….”
“따라와.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따라오라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하태헌을 놓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를 두려워하는구나.”
이해한다는 듯 웃음을 흘린 그가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길게 내려온 로브 자락 끝으로 새하얀 맨발이 살짝씩 드러나며, 새록새록 돋아나는 새싹이 보였다.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쉬워 보이면서도 아주 어렵지.”
하태헌을 안은 채로 앉아 있는 내 앞에 선 그는 상체를 살짝 기울이며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내가 너희를 해치지 않을 존재라고 믿음을 주면 따라오겠구나.”
“…어떻게 확신을 주실 겁니까?”
“그거야 쉽지.”
어딘가에서 새하얀 고양이와 토끼가 나타나 하태헌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우웅, 하태헌의 볼을 새하얀 앞발로 살짝 두드린 고양이가 다시 만나 반갑다는 듯이 울었다.
“한이결. 네가 읽은 책에서는 예언자에 관한 내용이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을 거다.”
“그게 무슨…….”
“그렇지? 그게 나를 앞에 두고도 예언자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는 이유고.”
그가 얼굴을 가렸던 로브 모자를 천천히 벗었다.
“어비스. 그 안에는 예언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하태헌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적혀 있지 않다. 그저 예언자를 만나고 난 이후를 보여 줄 뿐이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은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은발이 바람에 살랑였다.
“이제 나를 믿겠는가? 한이결. 아니, 권세현.”
별이 박힌 것처럼 빛 가루가 반짝이는 금색의 눈동자와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선명하게 드러난 다정한 눈빛에 손끝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