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거실을 서성이던 박건호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이결이 사라졌다라….”
소파에 앉은 채로 중앙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과 팔찌를 응시하던 권정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경우에는 사라지기보단 떠났다는 것에 가깝군요.”
그 말에 맞은편에 있던 우서혁이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진 씨.”
민아린이 주방에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와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우진의 앞에 놔 주며 모인 이들에게 말했다.
“갑자기 불러서 죄송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요. 만약 이결 씨가 정말로 떠난 거라면….”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민아린 힐러.”
박건호는 입가를 매만지며 마지막으로 봤던 한이결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방에서 웃고 떠들 때만 해도 그에게서 떠날 낌새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급하게 떠나야 할 만한 사정이 생겼거나, 아닌 척 감쪽같이 속였거나. 둘 중 하나겠군.’
박건호는 시선을 돌려 우서혁을 살폈다. 그늘진 얼굴로 힘이 들어간 미간을 매만지는 우서혁을 보니, 저와 비슷한 생각 중인 게 뻔했다.
“…일단은.”
애써 아닌 척해도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민아린에게 박건호가 물었다.
“상황을 제대로 짚어 봅시다. 어디로 갈지, 얼마나 걸릴지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 겁니까?”
“없어요.”
“그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부분은 있습니까?”
이어진 질문에 민아린이 재차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려던 그때, 다른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때문이겠죠.”
권정한이 쓰게 웃었다.
“제 능력이면 비밀 따위 아주 쉽게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결 형도 아무에게 말하지 못하고 떠난 거고.”
“정한 씨….”
“잠깐, 권정한.”
잠자코 듣던 박건호가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네 말대로라면 한이결은…….”
“솔직히 다들 짐작하고 있으시잖아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김우진이 싸늘한 시선으로 권정한을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정한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뱉어 냈다.
“이결 형은 마스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을 떠난 겁니다.”
한이결의 경호 담당인 권정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천사연뿐이었다. 확신하는 권정한과 다르게 박건호는 영 믿기 힘들다는 태도를 보였다.
“너무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는군. 애초에 한이결과 마스터 사이가 그 정도로 나빠 보이지는 않던데.”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우서혁이 드물게 박건호에게 동의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떠났는지, 잠깐 개인적인 일을 해결하려고 나갔는지는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얼마 안 가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누구 한 명이라도 한이결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으니, 의견이 여럿으로 갈렸다. 별다른 해결책이 나지 않자 박건호가 답답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일단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더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 그럼….”
민아린이 박건호와 우서혁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일을 마스터께 보고드릴 건가요?”
“흐음.”
이번에는 박건호도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천사연의 비서인 우서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할 필요 있습니까?”
김우진이 메마른 음성으로 침묵을 깼다.
“한이결은 레퀴엠 소속이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우진.”
“맞아요. 소속이 아니어도 이결 형은 레퀴엠 길드에서 계속 지내 왔잖아요. 저희의 보호도 받고 있었고. 마스터도 알아 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아 둬야 할 부분이라고?”
권정한의 말에 김우진이 예민하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본인 입으로 한이결이 마스터에게 벗어나기 위해 떠났다고 떠들었으면서, 지금 보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우진 씨…….”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이결 형이야 무소속이지만, 우리는 달라요. 길드 내에서 벌어진 일은 마스터께 알려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한이결의 경호는 그쪽 아닌가? 여태 제대로 해낸 것 하나 없으면서 보고는 하겠다고? 경호가 아니라 감시자였나?”
김우진이 빈정대자 권정한이 처음으로 불쾌한 티를 내며 지지 않고 받아쳤다.
“이결 형에게 감시를 붙일 만한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스터께 보고한다고 배신자처럼 여기지는 마십시오.”
“둘 다 그만해.”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김우진과 권정한을 말리며 박건호가 우서혁을 돌아봤다.
“우서혁 비서가 결정하도록 하지. 그는 이게 일이니까. 어떤가, 우서혁 비서?”
“…….”
모두의 시선이 우서혁에게로 향했다. 갈등 어린 눈으로 팔찌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우서혁이 끝내 결정을 내렸다.
“이전에 한이결 씨에게 말했듯, 레퀴엠 소속이 아니니 보고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떠났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나쁘지 않군. 나도 굳이 얘기를 꺼내지는 않겠지만, 마스터가 먼저 한이결의 행방을 묻는다면 거짓 없이 답할 거다. 김우진, 마음은 알겠지만 우린 모두 레퀴엠 소속이다. 선을 지켜야 해.”
“……알겠습니다.”
입술을 깨물던 김우진이 침울한 기색을 나타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보고를 안 해도 한이결이 떠났다는 건 금방 알아챌 것 같군.”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가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 빈틈이 없는 천사연의 모습을 떠올리던 민아린은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
새하얗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종이 위를 훑고 지나갔다.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만년필이 서명란 위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천사연 외에 그 누구도 없는 대표실 내부는 간간이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거침없이 서류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췄다.
“…….”
잔잔한 눈빛으로 무언가 생각하던 천사연은 이내 무의식적으로 귓불에 꽂혀 있는 귀걸이를 매만졌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붉은 보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때, 서류 옆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천사연은 성가신 기색으로 번호를 확인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전화를 받았다.
[N89.]
“무슨 일이지?”
기계처럼 느껴질 만큼 차갑고 사무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전에 요청해 뒀던 시스템, 기억하십니까?]
“그래.”
[등록하셨던 아이템 중 하나의 위치가 크게 틀어져, 알려 드리기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시큰둥하게 답하던 천사연이 이어진 말에 눈가를 좁혔다.
“틀어졌다는 게 무슨 뜻이지?”
[설정해 뒀던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아이템이 감지되었습니다.]
“코드는?”
[N-39178입니다.]
어느 아이템의 코드인지 천사연은 바로 알아챘다. 하태헌이 가진 SS급 코트였다.
“…위치가 어디지?”
[중국에 있는 C급 게이트입니다. 정확한 좌표와 게이트 정보를 보내 드릴까요?]
“…….”
[N89? 듣고 있습니까?]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눈동자를 굴리던 천사연이 곧 입을 열었다.
“C-29835는? 변동됐나?”
[그 아이템은 변동 사항 없습니다. 레퀴엠 길드입니다.]
여자의 대답은 단호했지만, 천사연의 싸늘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경을 건드리는 불안한 감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저 착각이라 여기고 넘기기에는 심히 거슬렸다.
“파일 보내 놔. 받는 대로 확인하지.”
[그러죠.]
통화를 끝낸 천사연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스터?”
그가 갑작스럽게 대표실을 박차고 나오자, 앞에서 대기하던 수행원들이 당황하며 급히 뒤를 따라왔다.
23층으로 향한 천사연은 앞을 막아선 문을 잠시 바라보다, 도어 록에 기존 번호가 아닌 다른 번호를 빠르게 입력했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수행원에게 명령한 그는 구두를 신은 채로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재해처럼 들이닥친 천사연을 발견한 민아린이 놀란 얼굴을 했다.
“마스터?”
그녀의 말을 들은 김우진이 급히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을 모두 무시한 채로 천사연은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익숙한 팔찌를 손에 쥐었다.
피부를 찌르는 섬찟한 기운이 방 안에 가득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민아린과 김우진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김우진.”
“……예.”
“설명해.”
바싹 마른 입 안을 느끼며 김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천사연이 팔찌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느릿하게 숨을 뱉어 냈다.
“왜 대답을 안 하지….”
“…….”
“알고 있었을 텐데.”
긴장감으로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뒤돌아 서 있는 천사연에게서 불온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안절부절못하며 천사연과 김우진을 돌아보던 민아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스터, 그….”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다는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설명하려던 민아린을 다른 이가 막아섰다.
권정한이 커피가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나흘 전, 방에 핸드폰과 팔찌를 두고 떠난 한이결 능력자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 바로 보고하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여러 변명거리를 속으로 삼켜 낸 권정한이 깔끔하게 답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천사연은 곧 팔찌를 정장 재킷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내 명령을 잊었나?”
“아닙니다.”
등을 돌린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권정한과 김우진, 민아린을 차례로 훑어봤다. 수그러들지 않는 기운에 바싹 언 세 명을 조용히 응시하던 그가 이내 입꼬리 끝을 살짝 올려 웃었다.
“재밌군. 김우진이나 민아린 힐러는 예상했지만, 권정한 경호까지 같은 의견일 줄이야.”
“…죄송합니다.”
“너를 살리려고 사마엘을 순순히 따라간 한이결의 모습이 그 정도로 감동적이었나.”
바늘처럼 날카로운 말에 권정한은 반박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쓸데없는 짓이다.”
“…….”
“이렇게 매정히 떠나간 걸 보고도 아무것도 느낀 게 없나?”
천사연이 무의식적으로 귀걸이를 매만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내렸다.
“한이결은 상대를 진심으로 애정하지 않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남을 사랑하는 방법 또한 모르지.”
김우진을 보며 말하던 천사연이 이내 걸음을 뗐다. 방을 떠나가는 천사연을 향해 민아린이 다급히 물었다.
“마스터! 혹시 이결 씨를… 찾으실 건가요?”
“글쎄.”
잠시 멈춰 서서 냉소적으로 한마디 뱉어 낸 천사연이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제 발로 떠나간 놈을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