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47)화 (147/394)

147화 

오른쪽 허리로 공격이 들어온다. 날카로운 창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김우진이 상대의 팔을 붙잡고 다리를 휘둘렀다.

“괜찮은 공격인데!”

상대방이 김우진의 발차기를 막으며 호쾌하게 외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김우진이 다시 한번 휘둘러지는 창을 피해 백 텀블링으로 거리를 벌렸다.

철컥!

완벽한 자세로 바닥에 착지하고는 쥐고 있던 아이템 총을 들어 올렸다.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고동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타앙, 오른쪽 어깨와 왼쪽 허벅지를 정확하게 노리고 날아간 총알이 창에 튕겨 벽에 박혔다. 씨익 웃은 상대방이 창끝으로 총알이 박힌 벽을 한 번 쳤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헉…….”

긴장한 채로 남자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김우진이 그 말에 거친 숨을 내뱉으며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 댔다.

“훈련 시작한 지 한 2개월 됐나? 몇 번 쉬기까지 했는데, 실력이 나쁘지 않아.”

“…감사합니다.”

칭찬에도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대답한 김우진이 손바닥에 부착한 아트 인벤토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총신 부분을 시작으로 손에 들고 있던 아이템 권총 전체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슬슬 훈련을 끝내고 게이트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군.”

그의 훈련 선생인 S급 창술사, 박혁준은 창을 어깨에 올리며 씩 웃었다.

“마침 다음 주에 일정이 하나 잡혔거든. 제이나 길드의 B급 게이트다. 어때?”

B급 게이트. 잠시 눈을 깜빡이던 김우진이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그래. 언제까지고 훈련만 할 수는 없잖아. B급이라 안전할 거고. 뭐, 어차피 이 정도 실력이면 다치기도 힘들 거다.”

재각성 이후 제대로 맡게 된 정식 일정이었다. 게이트를 처음 들어가 보는 건 아니지만, 억지로 따라 들어가서 팀원들에게 민폐만 끼쳤던 전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자신이 앞장서서 몬스터를 죽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사실 자신이야 훈련을 하든 게이트를 들어가든 별 상관없었지만….

‘한이결.’

분명 잘됐다며 기뻐해 주겠지. 그간 고생했다고 칭찬을 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흠?”

미묘하게 들떠 보이는 김우진의 모습에 박혁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김우진이 소속된 물리지원팀 팀장인 그는, 지난 2개월간 김우진을 직접 훈련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반응에 신선함을 느꼈다.

‘이런 까칠한 놈도 게이트 들어가는 건 좋아하네.’

새삼 그가 재각성을 한 유명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심지어 C급에서 A급이 된 거니, 조금이라도 빨리 게이트에 들어가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겠지.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네. 하긴, 아직 어리지.’

김우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를 이해한 박혁준이 흐뭇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김우진.”

“감사합니다.”

김우진이 담담한 얼굴로 악수를 받았다.

“출발 날짜는 이번 주 내로 공지해 주마. 그때까지 푹 쉬도록 해.”

“네.”

맞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든 박혁준이 먼저 훈련실을 나갔다. 가만히 서서 아트 인벤토리가 새겨진 손바닥을 엄지로 쓸어 만지던 김우진이 살짝 웃었다.

훈련으로 인해 어질러진 내부를 정리한 김우진은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23층 버튼을 누르려던 김우진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급히 엘리베이터 거울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기저기 뛰고 구르고 했더니 머리도 부스스했고, 얼굴이며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이 상태로는 절대로 한이결을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마음을 바꿔 24층으로 향한 김우진은 방을 들어가자마자 곧장 욕실로 향했다. 열심히 씻은 뒤에 옷을 갈아입으니 시간은 오후 1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

한이결은 별다른 일이 없으면 대부분 점심시간을 넘겨서 느지막이 일어나고는 했다. 오늘도 아마 자고 있거나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을 것이다.

배고플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김우진은 냉장고에 남은 식자재가 뭐가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침이니까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한이결이 잘 먹을 만한 게….

“토스트?”

버터를 두른 프라이팬에 식빵을 굽자. 단 걸 좋아하니까 설탕도 좀 뿌리고. 계란프라이나 베이컨을 올려도 좋겠다. 주스나 우유도 함께 주면 한 끼 식사로는 충분할 것이다.

생각을 끝낸 김우진은 거울로 마지막 점검을 한 번 더 한 후에 방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층 내려간 그는 이제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한이결의 방을 찾아갔다.

“한이결.”

거실로 들어서며 그를 찾았지만,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혹시나 해서 주방과 욕실을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한이결?”

설마 아직도 자나? 마지막으로 문이 닫혀 있는 침실로 걸어가 가볍게 노크했다.

“한이결, 자?”

평소라면 이쯤 일어나서 나왔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한참을 초조한 표정으로 침실 근처를 서성이던 김우진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들어갈게.”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침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한낮의 따스한 햇볕이 창문으로 비춰 들어오고, 깔끔하게 정리된 새하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한이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래도 또 간밤에 창문을 통해 외출한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들어와 볼걸.

‘그럼… 밥 먹고 오려나.’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점심은 이미 해결했겠지. 김우진은 밀려오는 씁쓸함을 애써 외면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돌아올 동안 다시 훈련실로 내려가서 훈련이나 마저 하고 있어야겠다. 도착하면 연락이라도 해 주겠지. 터덜터덜 침실을 나가려던 김우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

한이결이 사용하는 핸드폰이었다. 로헌 부마스터에게 직접 받아 왔다고 하던.

찝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매만지던 김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핸드폰 잘 들고 다니라니까. 이러다가 저번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팔찌?”

옆으로 시선을 옮긴 김우진은 곧 한이결이 언제나 끼고 다니던 팔찌를 발견했다. 핸드폰 옆에 자리한 팔찌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빛났다.

“이게 왜….”

팔찌를 손에 들고 내려다보던 김우진은 그 순간,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오싹한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발밑으로 피가 죄 빠져나간 것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무슨…….”

파리한 안색으로 팔찌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김우진의 머릿속으로 언젠가 나눴던 한이결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마스터가 네 위치를 알아냈어.

-천사연이 알아냈다고?

-한이결, 네가 끼고 있는 그 팔찌.

천사연은 아이템의 코드만 알고 있어도 소지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사실을 한이결도 알고 있다. 바로 김우진, 자신이 말해 줬으니까.

그래도 변하는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아낼 수는 없어서 그런지, 한이결은 잠깐 외출할 일이 생겨도 팔찌만은 절대로 빼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팔찌를 들고 있는 손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는 없어.

김우진의 눈가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싸한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에 발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좋은 오후예요, 이결 씨. 앗, 우진 씨도 계시네.”

김우진과 더불어 도어 록 번호를 알고 있는 민아린이었다. 신발장에 놓인 김우진의 신발을 본 민아린이 거실로 들어오며 재잘거렸다.

“오늘 힐러팀에 신입이 새로 들어왔는데, 딸기 찹쌀떡을 사 왔더라고요! 이결 씨가 좋아할 것 같아서 같이 먹으려고 들렀어요.”

박스가 든 봉지를 식탁에 내려 둔 민아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김우진이야 원래도 대답을 잘 안 했으니 이상할 것 없었지만, 한이결까지 그럴 리는 없는데.

“이결 씨, 아직 자요?”

침실 앞을 서성이던 민아린이 한 번 노크한 후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텅 빈 침대와 테이블 앞에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는 김우진을 발견했다.

“우진 씨?”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민아린이 김우진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 선 민아린은 한이결의 핸드폰과 손에 들린 팔찌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건 이결 씨 물건이잖아요? 우진 씨, 대체 무슨 일이…….”

불안함이 깃든 목소리로 묻던 민아린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

넋 나간 얼굴로 팔찌만 바라보던 김우진의 창백한 뺨 위로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무표정한 상태로 울기 시작하는 김우진의 모습은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놀란 민아린은 다급히 김우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우진 씨, 정신 차려 봐요!”

“헉… 으…….”

“우진 씨!”

팔찌를 꽉 움켜쥔 채로 김우진이 비틀거리자, 그의 기다란 속눈썹에 방울방울 맺혀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 한이결… 이결이가…….”

김우진이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숨을 헐떡였다. 울음이 섞인 젖은 목소리에는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여기를… 떠났….”

“이결 씨가 떠났다고요?”

더듬더듬 이어진 말에 당황한 민아린이 남겨진 핸드폰과 팔찌를 여러 번 돌아봤다.

“하, 하지만 갑자기 왜….”

팔찌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이결 씨가 팔찌를 빼고 어디 갔던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긴 하지만….’

물건 좀 두고 갔다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른 판단 아닌가.

하지만 한이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철저한 김우진이다. 그가 이럴 정도면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우진 씨. 일단 진정해 봐요.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해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도록.”

마른침을 삼킨 민아린은 초조함을 억누르고 김우진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손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바들바들 떨던 김우진이 민아린의 말에 천천히 입술을 뗐다.

“…팔찌는, 위치 추적이 가능합니다. 한이결도 그걸 알고. 그래서.”

“그래서 놓고 갔다는 건가요?”

민아린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위치 추적을 피하고자 아이템을 버렸다. 그렇다면.

“누구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민아린은 곧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김우진과 민아린의 시선이 부딪혔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