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게이트 내부의 밤낮과 현실 세계의 밤낮이 다른 경우는 종종 있다. 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 이미 중국은 밤 9시를 넘어가고 있던 터라, 하태헌은 날이 밝으면 예언자를 찾아가자고 제안했다.
급한 대로 아무 호텔이나 잡고 방으로 들어와 하태헌을 내려 주자, 때마침 체인징 효력이 끝난 하태헌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쉽다. 귀여웠는데…….’
내 시선을 한참 벗어나는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제한 시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워낙에 잘 어울렸던 탓에 아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경을 벗어서 돌려주는 내게 하태헌이 말했다.
“예언자를 만났던 장소는 여기서 많이 멀지 않다. 아침이 되자마자 가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게이트에서 식사도 하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그런지, 피로와 함께 허기가 몰려왔다.
“뭐라도 먹어야겠군.”
내가 지쳤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하태헌이 곧장 룸서비스를 시켰다. 40여 분 만에 도착한 식사는 간단한 파스타와 볶음밥 등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아무래도 하태헌이 부족하지 않게 메뉴판에 적힌 요리 대부분을 주문한 듯했다.
쫄쫄 굶은 남자 두 명이니 먹어 치우는 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하태헌은 냉장고에서 맥주 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
생전 처음 보는 중식부터 낯익은 양식으로 테이블을 꽉 채운 요리들을 보며 포크를 들었다.
“나중에 갚을게요.”
호텔 방 결제부터 룸서비스까지. 중국 돈은 물론이고 카드도 없는 나는 그저 주는 대로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미안함에 한마디 하자 맞은편에 앉은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 없으니 제대로 먹기나 해라.”
“옙.”
그렇다면야 뭐. 어차피 하태헌에게 이 정도 지출은 간에 기별도 안 가겠지. 한가롭게 생각하며 맛있는 음식을 부지런히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종일 굶어서 배고팠던 나와 달리, 하태헌은 앞에 놓인 과일 샐러드만 몇 번 입에 넣더니 그 뒤로는 맥주만 계속 마셨다. 나한테는 제대로 먹으라고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음식을 앞에 두고도 시큰둥했다.
‘어디 아픈가?’
나 몰래 뭐라도 먹은 게 아닌 이상에야, 저 정도로 관심이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괜찮은지 묻고 싶었지만, 어딘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쉽사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 나도 내일 만나게 될 예언자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각자의 고민으로 조용해진 방 안은 식기 부딪히는 소리나 맥주 캔 내려놓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침묵 속에서 식사를 끝낸 나는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먼저 씻어도 되겠습니까?”
“기다려라.”
하태헌이 볼로 타이를 꺼내 툭툭 두드리자 허공에 깔끔하게 생긴 백팩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기울이는데, 그가 백팩을 내게 건넸다.
“옷과 속옷, 간단한 생필품이 들어 있다.”
“아….”
얼떨결에 백팩을 받아 들고 안을 살펴보니 정말로 편히 입을 수 있는 옷과 물건이 들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감동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감사합니다.”
하태헌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딘가 가라앉은 검은 눈으로 나를 잠시간 응시하던 하태헌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씻고 나와라.”
“……?”
뭐지. 방금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은데. 저번부터 자꾸 말을 하려다 마는 하태헌의 행동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평소처럼 직설적으로 하지, 왜.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제 의지로 말을 거두어들인 사람을 붙잡고 왜 말을 안 하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속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섰다.
***
샤워를 마치고 목욕 가운을 걸친 상태로 욕실을 나오자, 창문을 연 채로 밖을 바라보며 룸서비스로 딸려 온 와인을 마시고 있는 하태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테이블은 내가 씻는 사이 정리했는지, 와인 병과 잔을 빼고는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식사는 안 해 놓고 맥주에 와인까지 마시다니. 분명 하태헌은 술을 즐기는 타입이 아닐 텐데…. 이쯤 되면 뭔가 고민이 있는 게 확실했다.
“안 피곤하세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어 끝이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다가가자, 그가 다 마신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이틀째 거의 못 주무신 거 아닙니까?”
불현듯 떠오른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애써 생각 저편으로 밀어 넣으며 조심히 물었다. SS급이라 나처럼 힘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스럽기는 했다.
아무 답 없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던 하태헌이 곧 손으로 내 볼을 가볍게 쓸었다. 따듯한 체온에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먼저 몸을 돌렸다.
“쉬고 있어라. 씻고 올 테니.”
욕실로 들어가는 하태헌에게서 와인 병으로 눈길을 돌렸다. 맥주와 달리 와인은 꽤 괜찮아 보였다. 와인 병을 들고 진지하게 갈등했다.
마시고 싶었지만, 약한 주량으로 낭패를 봤던 기억 때문에 망설여졌다.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벨에 적힌 도수는 13도. 현재 몸 상태와 도수, 짐작되는 주량을 치밀하게 계산한 나는 한 잔 정도는 천천히 마시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유야 어찌 됐건 중국까지 온 데다, 여행 상대는 그 주인공 하태헌인데. 와인 한 잔 정도는 기분 좋게 비워 줘야 하지 않나.
마시겠다고 마음먹으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마개가 열려 있는 와인 병을 기울여 빈 잔에 채웠다. 일렁이는 붉은색 와인에서 특유의 향기가 퍼져 나갔다.
게이트에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다가 이렇게 각 잡고 휴식을 누리려니 지금껏 느낀 불안감이 조금은 옅어졌다.
그렇게 하태헌이 했던 것처럼 야경을 내다보다 와인을 홀짝이는데, 얼마 안 가 그가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욕실을 나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하얀 목욕 가운을 입은 하태헌은 젖은 앞머리를 모조리 넘긴 채로 입을 열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마셨습니다. 이대로 자기는 아쉽잖아요.”
아직 와인이 반절 정도 남은 와인 잔을 보란 듯 들어 올리자, 하태헌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수건을 침대 위로 던졌다.
“하태헌 씨도 더 마실래요?”
“그러지.”
웬일로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인 하태헌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빈 와인 잔에 술을 따랐다.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와인을 마시는 건 두 번째네요.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하태헌이 낯설고 어색했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친해지다 못해 중국까지 함께 왔다.
‘믿는다는 말도 두 번이나 들었잖아.’
이렇게 보니 하태헌과 내 사이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아니지. 괜찮아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괜찮을지도.
그도 그럴 게, 걱정된다고 중국까지 같이 와 주는 사이는 흔치 않다. 더군다나 상대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하태헌 아닌가.
알코올이 들어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내 다정한 하태헌의 태도 때문인지, 갑자기 그와 내 사이가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
“예?”
하태헌과 내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는 데 열중하느라 그만 말을 놓치고 말았다.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방 조명에 살짝 그늘진 얼굴을 한 하태헌이 담담한 목소리로 재차 답했다.
“너와 했던 건 다 기억한다.”
다 기억한다고? 잠시 눈을 깜빡이며 말을 되새기다, 문득 떠오른 일을 입에 꺼냈다.
“하태헌 씨, 그럼 혹시 D17 구역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합니까?”
“물론이다.”
“그때, 지하 여신상을 해치우고 난 뒤에 갔던 방에서 발견한 바닥 문양이요.”
한동안 바빠서 거의 잊고 살았지만, 사실은 하태헌과 진작에 한 번쯤은 짚고 싶었던 내용이었다.
“SS급 코트를 얻었을 때처럼, 그 문양 아래에도 아이템이 있는 건 아닐까 해서요. 어떤 것 같으세요?”
“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군.”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듣던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숨겨진 아이템을 꺼내려면 코트 때처럼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할 겁니다. 이 부분도 예언자를 만나면 물어보려고 해요.”
“예언자….”
내 말을 따라 중얼거린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예언자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
“제게 말해 줄 수 없습니까?”
그와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기대감이 내게 한 번 더 용기를 심어 주었다. 이러다 궁금해서 숨넘어가겠다고.
간절함을 담아 그를 바라보자, 잠시간 나와 시선을 맞추던 하태헌이 손을 들어 내 눈꼬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꾸만 눈꼬리를 만지는 하태헌의 손길에 한쪽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웠다. 그의 손을 잡아 막으며 재차 입을 뗐다.
“…말 안 해 주실 겁니까?”
“글쎄.”
“하태헌 씨.”
“너는 그냥 내 옆에 잘 붙어 있으면 된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부터 자꾸만 저 소리를 하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된다.”
그가 내 손을 마주 잡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쓸어내렸다.
“대답해라, 한이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단호한 목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무래도… 대충 얼버무리는 건 통하지 않을 것 같군.
난감한 감정이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꼬리를 접어 살짝 웃었다.
“알겠습니다.”
“…….”
“절대 떨어지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이제 말 좀 해 봐라. 예언자에 대한 정보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속마음을 숨기며 최대한 무해하게 웃던 그때였다. 계속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나를 응시하던 하태헌이 천천히 상체를 숙여 왔다.
“하…….”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눈꼬리에 부드러운 것이 가볍게 닿아 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내가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하태헌이 내게서 몸을 돌렸다.
“……?”
“그만 마시고 이만 자는 게 좋겠군.”
자연스럽게 내 와인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 둔 그가 열린 창문을 닫았다. 그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볼을 가볍게 두드리는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이결.”
“아… 음, 예?”
“입 벌려.”
이, 입? 뜬금없는 요구에 반사적으로 입을 살짝 벌리니, 그 사이로 딱딱한 것이 쑥 들어왔다. 뭔가 했더니 치약이 발린 칫솔이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바로 출발할 거다.”
“아아, 네…….”
“시장을 지나야 하니 체인징 아이템을 한 번 더 착용해야겠군.”
“그렇군요…….”
하태헌의 말이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지만, 일단 되는대로 대충 대답했다. 현실감 없이 붕 뜬 상태로 하태헌과 나란히 욕실에 서서 양치질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옆 침대에 누운 하태헌이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내게 한마디 했다.
“눈 감아라.”
“…….”
그의 말대로 눈을 질끈 감자, 침대 사이 협탁에 놓인 전등이 마지막으로 툭 꺼지며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반쯤 묻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 그거… 뭐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