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37. 떠났습니다
이른 아침을 맞이한 나는 불편한 자세로 자는 루크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루크 씨.”
“아…….”
다행히 금방 잠이 깬 그는 나를 보더니 움찔 몸을 떨었다.
“피곤하시겠지만, 곧 출발해야 해서요.”
“네. 괜찮습니다.”
벗어 뒀던 체크무늬 셔츠를 다시 입으며 루크가 일어났다.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모닥불을 발로 밟아 정리하는데, 근처를 둘러보러 나갔던 하태헌이 돌아왔다.
“준비 끝냈으면 출발하지.”
평소와 다른 바가 없는 하태헌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 내게 믿는다고 말하던 하태헌의 진지한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그와 전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가 어쩐지 어색했다. 내 자연스럽지 않은 태도는 루크를 추슬러서 다시 출구를 향해 이동하는 내내 이어졌다.
“저, 한이결 씨.”
“예?”
선두에서 잠자리처럼 생긴 C급 몬스터 두어 마리를 죽이고 있는 하태헌을 지켜보던 루크가 슬쩍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혹시 하태헌 부마스터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
어찌 보면 루크가 처음으로 내게 건넨 질문이었는데, 하필 이런 내용이라니. 허탈하게 웃으며 일단은 모른 척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사이가 조금… 그래 보여서.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뻔뻔하게 부정하자 루크가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니 어째 양심이 좀 찔렸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해 줄 생각도 없었다.
‘믿는다는 말 하나에 이렇게 휘둘리는 것도 웃기긴 하지….’
한숨을 삼켜 내며 앞장서는 하태헌을 뒤따라 계속 움직였다. 그나마 어제 많이 걸어 둬서 출구까지 남은 거리가 멀지 않았다.
“한이결 씨도 무소속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놀랍게도 루크가 다시 질문을 건네 왔다. 이번에는 나에 대한 거라 반가운 마음을 담아 답했다.
“맞습니다. 루크 씨도 무소속이라고 하던데.”
“제작자는 아무래도 다른 능력자보다 소속의 필요성이 덜하니까요.”
“그래도 이번에 게이트에 들어와서 몬스터를 직접 보고 필요한 재료를 추출하고… 굉장히 즐거워 보이시던데요.”
내 말에 루크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길드에 들어가면 원할 때마다 게이트를 들어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끼익. 키엑.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를 타고 무언가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새들이 날아오르면서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 무언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흙바닥, 반짝거리는 가루를 흘리며 공중을 떠다니는 곤충들.
이 모든 것을 차례로 둘러본 루크가 콧잔등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올 때마다 욕심이 나긴 하는데, 어딘가에 소속돼서 일한다는 게 영 맞지 않아서요.”
“루젤과는 다르군요. 그분은 꽤 전부터 길드 소속으로 활동해 왔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루젤과 저는 많이 다릅니다. 사이는 좋지만… 음. 네. 그렇죠.”
루크가 하려던 말을 급히 끊어 내곤, 카키색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당신도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소속된 곳을 위해 일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그제야 루크가 내게 뭘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무소속이니, 나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고 여기는 거겠지.
소속이라. 씁쓸함을 느끼며 루크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느 정도 공감은 합니다만, 제가 길드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금 멀리 떨어진 하태헌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길드는 아니지만, 소속되어 일했던 곳이 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나왔지만… 다른 곳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물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그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명령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쉽게 발을 뺄 수 있는 무소속이 편하긴 했으니까.
“그럼 루크 씨는 한 번도 길드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신 겁니까? 의뢰만 받고?”
“예. 웬만한 재료들은 경매나 레드 마켓에 다 있으니까요. 직접 게이트 내부를 둘러보는 것도 좋긴 한데, 그거 하나만 보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단체 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나는 문득 불편함 없이 이어진 대화에 고개를 기울였다.
‘낯을 가리는 줄 알았는데.’
먼저 말도 거는 것을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게 호감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걸까? 기대하며 저번과 같이 활짝 웃어 봤지만, 이번에도 루크는 시선을 회피했다.
***
하태헌이 눈앞을 가리고 있는 무성한 수풀을 치워 내자, 굳게 닫힌 게이트 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그림자가 진 게이트 출구는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옆으로 쩍 벌어졌다.
“여기서 아이템을 사용하면 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내 질문에 뒤따라온 루크가 답해 줬다.
게이트 좌표는 건드린다 해도 아주 잠시간 바뀔 뿐, 다시 본래대로 돌아온다고 한다. 우리가 중국으로 떠나고 나면 루크도 좌표가 돌아온 게이트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갈 것이다.
“아 참, 하태헌 부마스터. 전해 줄 게 있습니다.”
“뭐지?”
루크가 가죽 가방에서 황급히 무언가를 꺼냈다. 카키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는 작은 브로치와 검은 뿔테 안경이었다.
“아이템인가.”
“네. 이건 루젤이 함께 챙겨 준 쪽지입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하태헌이 펼쳤다. 뭐라 적혀 있는지 보기 위해 하태헌에게 바싹 다가갔다.
「두 분 얼굴이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는 건 아니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좌표 변동 아이템은 나중에 돌려주겠다고 했으니, 이건 제가 따로 준비한 깜짝 선물이에요.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루젤이.」
깜짝 선물?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하태헌은 루크에게서 받은 브로치와 안경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체인징 아이템인가 보군.”
“맞습니다.”
“체인징 아이템이면….”
일정 기간 겉모습을 바꿔 주는 아이템이었다. 가볍게는 머리카락 색이나 눈 색부터, 남자에서 여자로 혹은 어른에서 아이로 변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다만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아서 구하기 꽤 까다로웠다.
“확실히 사용하는 편이 안전하겠군.”
잠시 고민하던 하태헌이 코트 안쪽, 정장 재킷 가슴 부근에 브로치를 달았다. 그러자 파지직, 하는 전기 튀는 소리와 함께 그의 키가 순식간에 작아졌다.
“하태헌 씨!”
키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작아진 하태헌이 보였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동그래진 얼굴은 치명적일 정도로 귀여웠다. 커다란 옷에 파묻히듯 감싸진 하태헌은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성별 전환은 아무래도 외형이 별로 달라지는 게 없으니, 어려지는 게 낫다는 건가.”
“미친…….”
턱을 매만지며 제 모습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하태헌의 행동에 심장이 아파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휘청이는 몸을 겨우 추슬렀다. 그 사납던 눈매가 저토록 크고 순해지다니…. 마치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모습에 현기증이 일었다.
“유지력은 어느 정도지?”
“브로치와 안경 둘 다 2시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재사용은 6시간 걸리고요.”
“고맙군. 루젤에게도 인사 전해 주도록.”
어린애 목소리로 의젓하게 말한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내려온 소매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무릎을 접어 앉아 그의 소매를 대신 접어 주었다.
“다 좋은데 옷이 너무 불편하군.”
“이대로는 못 움직이겠네요. 제가 안아 드릴까요?”
자꾸만 꿈틀대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담담한 척 물었다.
불만스럽다는 듯이 뚱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하태헌이 결국 안아 드는 것을 허락했다. 바지까지 커진 터라 한 걸음 걷자마자 자빠질 게 뻔했으니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열 살배기 아이처럼 작아진 체구의 하태헌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하태헌을 번쩍 들어 올린 나는 그를 한쪽 팔로 안았다.
“안경은 네가 끼면 되겠군.”
뿔테 안경을 건네받아 착용하자, 찌릿한 정전기가 머리와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된 겁니까?”
“그래. 검은색으로 변했군.”
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시선을 올리자, 본래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변한 것이 보였다.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변했겠지. 검은 머리카락과 눈이라. 확실히 내게는 이쪽이 익숙했다.
내가 접어 준 소매로 삐죽 튀어나온 작고 새하얀 손으로 하태헌이 자신의 인벤토리 아이템에서 검은 볼로 타이를 꺼내 들었다.
“마셔라.”
하태헌이 내민 것은 루젤이 미리 챙겨 줬던 마비 물약이었다. 병에 담긴 연한 하늘색 물약을 단번에 들이켜자 마치 벌에 쏘이듯 따끔한 고통이 혀와 목구멍에 스쳐 지나가면서 묵직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윽…….”
불편한 느낌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하태헌도 영 찝찝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우리에게 루크가 알 만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희석하긴 했어도 일단은 몬스터 독이니까요. 오렌지 주스 같은 걸 기대하시면….”
그야 그렇긴 하지. 마비된 몸은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눈꺼풀도 느릿하게 움직였다. 괜히 입맛만 다시는데, 그사이 좌표 변환기를 꺼내 든 하태헌이 빨간 버튼을 눌렀다.
기잉―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아이템이 잘게 떨렸다. 동시에 검푸른 색으로 일렁이던 게이트 출구에서 붉은빛이 아주 잠깐 깜빡였다.
“정상적으로 작동된 겁니다. 이제 가시면 돼요.”
“여기까지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루크 씨.”
게이트를 등지고 루크에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자 그가 쑥스럽게 웃으며 악수를 받아들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죠.”
“예. 조심히 가세요, 두 분 모두.”
혹여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서 하태헌을 힘주어 안으며 천천히 게이트 출구로 몸을 집어넣었다. 보통의 게이트 출구와는 달리, 스파크가 여러 차례 튀며 아릿한 고통과 속이 뒤집히는 메스꺼움이 일었다.
확실히 마비약을 먹지 않았으면 상당히 힘들었겠군.
눈앞을 가득 채웠던 검푸른 연기가 사라지고, 어둠이 깔린 축축하고 지저분한 골목길이 나타났다. 어딘가 갑갑한 공기를 느끼며 하태헌에게 물었다.
“제대로 도착한 건가요?”
“그래.”
벽에 연결된 파이프에서는 새하얀 증기가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구석에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에서는 쥐 여러 마리가 뛰어다녔다.
“길드가 아닌 갱단이나 사냥꾼이 소유하고 있는, 등급이 낮고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게이트다. 중국은 이런 게 많지.”
마비약의 효력이 점점 사라지면서 코를 찌르는 듯 역한 냄새가 점차 심해졌다.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이게 무슨 냄새입니까?”
“마약이다. 일반적인 마약과 몬스터에게서 추출한 환각 체액을 합쳐 낸 냄새야.”
마약이라니. 가지가지 하는군. 질색하며 급히 능력을 끌어 올렸다.
“일단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겠어요.”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르자 어둠에 잠긴 작은 도시 너머로 가지각색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 채워진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가까운 거리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빈부 격차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하태헌이 자그마한 손으로 큰 도시를 가리켰다. 혹여 추울까, 하태헌의 코트를 잘 여며 준 후에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