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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44)화 (144/394)
  • 144화 

    로헌이 소유한 C급 게이트 중 하나인 D23 구역. 차를 타고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곳은 중앙에 자리한 게이트 입구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역을 둘러보는 내게 하태헌이 말했다.

    “관리인에게 잠깐 자리를 비우라고 말해 뒀다. 돌아오기 전에 출발하지.”

    하태헌이 차에서 내린 루크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닫힌 게이트에 기운을 흘려 넣었다. 우웅, 게이트가 미약하게 진동하며 천천히 열렸다.

    D23 구역 게이트는 등급이 낮은 만큼 내부가 그렇게 크지 않고 몬스터의 숫자도 적었다. 싱그러운 풀과 잎으로 가득한 게이트 안쪽은 평범한 숲속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루크 씨?”

    게이트 출구를 찾아 움직이려던 나는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루크를 발견했다. 뭔가 싶어서 다가가니, 그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조그마한 생물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뭐지? 토끼인가?’

    생김새는 새하얀 토끼와 비슷했지만, 몸이 지나치게 작고 흐물거렸다.

    “뭡니까?”

    그제야 바로 뒤에 서 있는 내 존재를 알아챈 루크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게이트 숲에서만 볼 수 있는 생명이에요. 주러나팔바와 비슷하게 생겨서 이름도 주러난이라고 합니다.”

    “귀엽네요.”

    귀엽긴 한데, 너무 작고… 흐물거려서 길 가다 밟기 딱 좋아 보인다. 갑자기 든 걱정에 발아래를 슬며시 살펴봤다.

    “상태가 굉장히 좋은 숲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자주 볼 수 있는 아이들은 아니에요. 운이 좋네요.”

    루크의 손등에 기어올라 살결을 톡톡 두드리던 주러난은 어느새 네댓 마리로 늘어나 있었다. 그가 손을 살짝 흔들자 끽, 하는 소리를 내며 와르르 도망간다.

    몸을 일으켜서 멀어지는 주러난을 웃으며 바라보는 루크의 얼굴은 사람을 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해 보였다.

    “기분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 말에 루크가 살짝 빗겨 나간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실 와 보고 싶었던 게이트 중 하나가 이곳입니다. 위험하지 않은 생물도 많고 쓸 만한 몬스터 재료도 구할 수 있어서요.”

    “잘됐네요.”

    이렇게 게이트 내부 생명체에 관심이 많은 제작자는 흔치 않은데. 친해지면 여러모로 도움받기 좋겠다. 다분히 속물적인 생각을 하며 의도를 담아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천천히 이동할 테니까 루크 씨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따라오세요.”

    “가, 감사….”

    루크가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며 급히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나와 루크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하태헌이 내 옆에서 소리 낮춰 말했다.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에이, 오해십니다. 제가 뭘요.”

    “당장 바른대로 말해.”

    불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별거 없어요. 그냥 제작자랑은 친해지면 좋으니까 그럴 뿐이죠. 실력도 꽤 있어 보이는데.”

    “흐음….”

    하태헌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내 말을 어느 정도 수긍했는지 고개를 돌려 커다란 나무를 살펴보는 루크의 등을 바라봤다.

    “직원 말로는 루젤 제작자와 함께 그쪽 업계에서 제법 알아준다고 하더군.”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하태헌의 팔을 붙잡자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루젤이 왜 우리를 돕는 건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그래도요. 아이템까지 새로 제작할 정도인데. 사실 좀 놀랐습니다.”

    잠시 해야 할 말을 고르듯 눈을 깜빡이던 하태헌이 붙잡힌 팔을 부드럽게 빼내며 손을 잡아 왔다. 그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멀뚱히 잡힌 손을 내려다보는데, 머리 위로 설명이 이어졌다.

    “루젤 제작자는 원래 블런 길드 소속이었다. 강남 사건 이후에 강승건 마스터가 잡혀 들어가고 길드가 축소하면서 해고될 사람 중 한 명이었지.”

    “실력 있는 제작자인데 해고한다고요?”

    “그래. 원래 제작 부서까지 둔 길드는 많지 않다. 들어가는 돈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니까. 블런 길드는 그걸 감당하지 못해서 제작 부서를 아예 해체한다더군.”

    하긴 그렇겠구나. 예전에 하태헌과 들렀던 레드 마켓처럼 음지에서 활동하거나 루크처럼 무소속인 제작자가 많은 이유도 그래서인가.

    단순히 법을 피해서 다양한 제작을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루젤 제작자는 이전부터 우리 길드로 오고 싶어 했다는군. 내가 블런에 소속된 여러 제작자 중에서 데려올 만한 사람으로 루젤을 선택했고, 마스터께서 그 의견을 존중했다.”

    “그걸 루젤이…….”

    “계약할 때 마스터께서 알려 준 것 같더군. 그 후로 내게 빚진 걸 갚겠다고 여러 번 말했었고.”

    손바닥으로 그가 착용하고 있는 장갑의 매끈한 가죽과 함께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하태헌의 커다란 손에 꼭 맞게 들어간 내 손이 보였다.

    “저 때문에 좋은 기회를 써 버리신 것 아닙니까?”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고 중국을 가야 한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 루젤 제작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전까지는 필요 없다고 여겨 잊고 있었던 기회이니 신경 쓸 것 없어.”

    무심하게 덧붙인 한마디에는 나를 배려하는 하태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씁쓸함을 숨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

    “이건요?”

    “레드 스펠리온 록입니다. 전갈 몬스터 중 하나로, 꼬리에 독이 있어서 쏘이면 열이 오르고 구토를 해요. 그래도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닙니다.”

    “저건요?”

    “웜 고스트라고, 별다른 힘이 없어서 잡기 쉬운 대표적인 몬스터예요. 체액은 간단한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약으로 제작할 수 있습니다.”

    일렬로 늘어놓은 몬스터 시체를 가리키며 묻는 내 말에 루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능력으로 만들어 낸 새까만 검을 툭툭 흔들어 몬스터 피를 털어 낸 하태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나와 루크를 응시했다.

    새하얀 천 장갑을 끼고 유령처럼 불투명하게 생긴 웜 고스트를 이리저리 만져 보던 루크가 벨트에 차고 있던 작은 가죽 가방에서 샘플 병을 꺼내 들었다.

    “아이템 가방입니까?”

    “네.”

    어딘가 익숙한 생김새의 가죽 가방이다. 가방을 집중해서 살펴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설마 리웨이 제작자가 만든?”

    “맞습니다.”

    1초도 안 될 만큼 짧은 순간에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루크가 재빨리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웨이. 하태헌과 레드 마켓에 가서 만났던 나이 든 제작자. 사파이어 꼬리나비 날개 4장을 대가로 인벤토리 가방을 얻었었다. 그 가방은 차수연이 잘 쓰고 있고.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리웨이 제작자가 만든 아이템 가방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혹시 경매에서 구매하셨나요?”

    “아닙니다. 저는… 그러니까, 리웨이와 인연이 좀 있어서. 음. 그래서 직접 받았습니다.”

    “오.”

    그 꼬장꼬장하고 반짝이는 것에 환장한 리웨이와 친분이 있다고? 꽤 괜찮은 정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리웨이의 제작 능력이 탐났는데….’

    리웨이는 워낙에 숨어 다니는 데다 반짝이는 물건, 그중에서도 희귀한 게 아니면 거래를 받아들이지도 않아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제작자였다.

    나중에 거래로 내걸 만한 물건만 준비되면 루크를 통해 리웨이를 찾아가는 방법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저 능력만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런 예상치 못한 친분을 갖고 있었다니. 정말로 친해지면 나쁜 것이 없는 상대다.

    머릿속으로 여러 계산을 끝낸 나는 루크에게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활짝 웃었다. 그러자 루크는 이번에도 놀란 기색으로 급히 얼굴을 돌렸다.

    “하아.”

    팔짱을 끼고 내가 하는 짓을 구경하던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크가 몬스터 시체로부터 재료를 모두 얻어 낸 것을 확인한 우리는 계속해서 출구를 향해 이동했다. D23 구역 게이트는 하루 정도만 걸어가면 출구에 도착하고도 남을 만큼 크기가 작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비교적 나무뿌리가 적은 땅에 자리 잡은 하태헌은 아주 능숙하게 나뭇가지를 모은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빠르게 만들어진 모닥불 근처에 있는 굵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루크가 지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괜찮으세요, 루크 씨?”

    “괜찮습니다.”

    나와 하태헌은 이 정도 일정으로는 쉽게 지치지 않았지만, 루크에게는 조금 벅찼을 것이다.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며 반대편에 있는 고목나무의 거대한 나무뿌리로 걸어가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오지.”

    SS급 코트를 꺼내 입은 하태헌이 말했다.

    C급 게이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계를 소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별다른 전투 능력이 없는 제작자가 동행하기 때문이겠지. 멀어져 가는 하태헌의 등을 바라보다 시선을 위로 올렸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달이 보였다. 작고 새하얗게 보이는 현실의 달과는 다른, 커다랗고 새파란 달이 떠 있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게이트 내부라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처음 천사연을 따라 SS급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게이트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여전히 적었다.

    이곳이 그저 누군가의 창작물일 뿐이고, 본래 몸으로 돌아갈 방법만 알아낼 수 있다면 미련 없이 떠날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이 고민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어쩌면 여기는 ‘어비스’라는 정체불명의 소설 속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다. 칼에 찔려 죽은 내가 관 속에서 꾸는 백일몽 같은 꿈일 수도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현시점에서는 예언자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현재의 내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답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존재.

    푸른 달빛이 섞여 몽환적인 색으로 가득 차오른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나무뿌리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정찰을 나갔던 하태헌이 돌아왔다.

    “별일 없었습니까?”

    “그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사르륵 흩어졌다. 내게 걸어온 하태헌이 옆에 앉았다.

    “잠을 적게 자서 피곤할 텐데.”

    “조금요. 그래도 심하진 않습니다.”

    루크는 어느새 깊게 잠들어 있었다.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로 자는 루크를 바라보다 하태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하태헌 씨. 함께 와 주셔서.”

    다소 뜬금없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건네지 못할 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신 것도 물론 감사하고요. 하태헌 씨에게는 전부터 이래저래 도움받은 게 많았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갚겠습…….”

    “필요 없다.”

    어색함에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열심히 뱉어 낸 말을 하태헌이 뚝 끊어 냈다.

    이렇게 냉정하게 거절하다니. 예상보다 훨씬 쌀쌀맞은 그의 태도에 절로 기분이 축 늘어졌다. 아니, 그래도 나 정도면 나름 쓸 만하지 않나? 속으로 꿍얼거리며 뻘쭘하게 웃었다.

    “예, 뭐… 필요 없으시면….”

    “한이결.”

    하태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건 계약이 아니다.”

    “그래도….”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야.”

    “예?”

    “믿는다고 말했을 텐데.”

    “…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입술만 달싹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볼이 뜨거워졌다.

    믿는다는 말. 유독 하태헌에게 들으면 적당히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진심이 담겨 있어서 그렇겠지.

    한참 동안 눈도 못 마주치던 나는 손으로 붉어진 목을 겨우 가리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하태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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