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나와 루크의 모습을 구경하던 루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구석에 놓인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이거 받아요.”
가볍게 던져진 것을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손바닥에 잡힌 것은 차가운 음료수 캔이었다. 내게 했던 대로 똑같이 하태헌에게 음료수를 던져 준 루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에 팔을 턱 올렸다.
“완성되면 부를 테니까 그때까지 일단 쉬고 있어요. 오른쪽 방이 그나마 자리가 좀 있을걸요?”
“그러지.”
잔뜩 쌓인 물건들로 가려졌던 오른쪽 방을 찾아 들어가자, 그나마 발 디딜 곳이 보이는 작은 휴게실이 나타났다.
내 어깨를 붙잡아 소파에 앉힌 하태헌이 테이블에 음료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졸리면 더 자라. 이따 깨워 줄 테니.”
“아닙니다.”
아무래도 하태헌은 내가 얼마 못 잔 게 영 신경 쓰이는 듯했다. 실제로 수면 시간이 4시간을 겨우 채울 만큼 짧긴 해도 이런 곳에서 잠들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은 터라 웃으며 거절했다.
“전 괜찮습니다. 게다가 루젤의 말대로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럼 대화 좀 하지.”
갑자기 대화? 어째 불안한데. 그냥 얌전히 자는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눈을 굴리자, 하태헌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검은 눈동자를 예리하게 빛냈다.
“도망갈 구석 찾지 마라.”
“하하….”
젠장. 눈치는 빨라서. 딱딱하게 굳은 입가를 매만졌다.
“도망이라뇨. 그냥 주변을 둘러본 것뿐입니다. 근데 갑자기 무슨 대화를…….”
“중국에 도착한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거지? 예언자에게로 바로 갈 건가?”
아아. 난 또 뭐라고. 예언자가 있는 장소로 안내해 줄 사람은 하태헌이니, 궁금할 만도 했다. 긴장을 조금 풀며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리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니까요.”
“가깝다면?”
“그럼 바로 가야죠. 한가로운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차분하게 하태헌의 상태를 살폈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그는 중국에 다녀온 뒤로 예언자에 대한 말을 꺼낼 때마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며칠 전, 중국에서 막 돌아온 하태헌과 통화했을 때가 떠올랐다. 어딘가 여유가 없어 보이던 목소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태헌 씨. 혹시 중국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
“예언자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다거나…….”
이번에는 하태헌이 내 시선을 피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예언자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착각이다.”
그 말을 믿겠냐고.
“잠시 통화를 좀 하고 오지.”
의심을 담아 노려보자 하태헌이 얄팍한 핑계를 대며 휴게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
쌩하니 나가는 뒷모습에 어이없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먼저 대화하자던 사람이 누군데 지금…….
허탈한 심정으로 숨을 길게 내쉰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얼굴을 젖혔다. 하태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같이 온 것은 실수였나. 불안함이 마음속에서 퍼져 나갔다.
잔뜩 복잡해진 머리를 느끼며 새하얀 형광등이 달린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하태헌이 다시 온 줄 알고 고개를 돌리자, 당황으로 크게 뜬 카키색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는 루크의 모습에 나도 급히 일어서서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나가 있을까요?”
“아, 아닙니다. 그냥 놀라서…….”
내게 꾸벅 인사한 루크가 후다닥 휴게실 구석으로 움직였다. 이제 보니 그곳에는 시험관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시험관대가 놓여 있었다.
“이것도 몬스터에게서 추출한 재료입니까?”
어설픈 움직임으로 시험관대를 정리하는 루크에게 질문하자, 어깨를 움찔 떤 그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답했다.
“네. 음, B급 포이즌 리자드예요. 턱 아래에 이렇게….”
들고 있던 시험관을 다시 관대에 꽂은 루크가 손으로 허공에 물방울 모양을 그리듯 휘저었다.
“둥근 형태의 혹이 있어요. 독이 담겨 있는데, 침샘과 연결되어 있어서 잘못 물리면 마비와 환각을 보게 되죠.”
“오.”
“그래도 죽을 정도로 위험한 독은 아니에요. 그냥 마비랑 환각을 조금… B급 몬스터치고 안전한 편이죠.”
루크가 반쯤 높은 톤으로 설명을 이어 가며 시선을 자연스럽게 내 얼굴로 옮겼다. 처음으로 제대로 눈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여러 물질이 섞여 있는 독에서 마비 물질만 뽑아낸 게 이 파란 액체입니다. 신체에 주는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아이템으로 제조할 수 있어요.”
“그렇군요.”
힘 있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생기 있게 반짝이는 카키색 눈동자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신체에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몬스터 독은 포이즌 리자드 말고 몇 없어서 구하기 쉽지 않은 재료인데, 루젤의 말로는 로헌 길드에서 특별히 힘써 줬다고 들었…….”
“……?”
거침없이 나오던 말이 갑자기 흐려졌다. 신나게 말하다가 중간에 이성이 돌아왔는지, 루크가 급히 내게서 얼굴을 돌리며 시험관 두 개를 뽑아 들었다.
“루크 씨?”
“죄, 죄송…. 저는 그럼 가 볼…….”
어물거리며 두어 번 허리를 꾸벅꾸벅 숙인 루크가 들어왔을 때처럼 허겁지겁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스치듯 본 발갛게 달아오른 루크의 귀를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신기하네.”
저 정도로 낯가리는 사람은 처음 본다. 김우진보다 더하네. 뭐, 김우진은 낯은 가려도 저런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간 여러 제작자를 만나 봤지만 독특하기로는 제일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신선해서 좀 재밌기까지 했다. 시간만 충분했으면 친해지려고 노력 정도는 해 봤을 텐데, 좀 아쉬웠다.
***
“좋아요.”
루젤의 부름에 하태헌과 함께 연구실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그녀가 화면에 영상 하나를 틀었다.
“이게 완성된 게이트 좌표 재설정 아이템이에요. 이름은 뭐, 루젤 1호라고 대충 부르기로 하죠.”
루젤이 손에 들고 있는 둥그런 기계가 영상에도 비쳤다.
“윗부분에 이렇게 버튼이 세 개 박혀 있어요. 빨간색이 ON 버튼, 파란색이 OFF 버튼이에요.”
설명에 이어 그녀가 허리에 착용하고 있던 작은 가죽 가방에서 약물이 든 기다란 병을 두 개 꺼냈다.
“추가로 이것도. 희석된 마비약입니다. 게이트를 빠져나갈 때 필요하실 거예요.”
약물의 색은 거의 투명에 가까운 옅은 하늘색이었다. 하태헌이 아이템과 병을 건네받는 것을 보며 구석에 서 있는 루크를 잠시 바라봤다.
“이제 원리와 사용법을 알려 드릴게요.”
달칵. 화면 하단 부분을 누른 루젤이 그것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러자 새하얀 보드가 붙어 있는 뒷면이 나타났다.
“여기 이렇게… 보통 게이트는 입구와 출구가 있잖아요?”
검은 칠판 펜으로 타원을 각각 위에 두 개, 아래 두 개씩 그린 루젤이 첫 번째 타원 옆에 글을 썼다.
“이게 입구고, 두 번째가 출구예요. 게이트 내부는 입구, 출구 둘 다 따로 존재하지만, 바깥은 그렇지 않죠.”
그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내부에서는 입구와 출구가 각자 다른 장소에 있지만, 게이트 바깥에서는 입구와 출구가 동일하다는 뜻이었다.
“그게 게이트 입구와 출구에 설정된 좌표가 동일하기 때문이에요. 이 아이템이 그 좌표를 바꿔 줄 거고요.”
“좌표 설정은 되어 있는 건가?”
“네. 의뢰하면서 말씀하셨던 좌표로 입력해 뒀어요. 게이트 내부 출구 앞에서 아이템을 작동시키면 다른 위치에 있는 게이트로 나올 수 있어요.”
팔짱을 끼고 보드에 몸을 기댄 루젤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물론, 억지로 좌표를 변경하는 거라서 나갈 때 몸에 부담이 좀 있을 거예요. 그래서 마비약이 필요한 거죠.”
“심할 정도인가?”
“음… 글쎄요. 개인마다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약을 먹으면 어느 정도 버틸 만할 거예요.”
그 대답에도 하태헌의 굳은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루젤이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부마스터는 SS급이라서 마비약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건너실 만큼 문제없으실걸요?”
“문제는 내가 아니다.”
“그럼….”
“한이결이 문제지.”
“예?”
하태헌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언급에 놀라서 황급히 그를 돌아봤다.
“몸이 많이 약해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잠깐만요.”
“몸이… 약하다고요? 한이결 능력자 A급 아니에요?”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루젤의 목소리에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몸이 약하다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평가에 창피함이 밀려왔다.
“보통 A급이랑 다르다. 툭하면 쓰러지고 기절하는…….”
“그만, 그만하세요. 하태헌 씨!”
주변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는 하태헌의 팔에 매달리며 말을 끊어 냈다. 그러나 이미 들을 만큼 들은 루젤은 세상 다시없을 팔불출을 보는 눈빛으로 하태헌을 바라봤다.
“네, 한이결 씨도… 괜찮을 거예요. 애당초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니고. 정 불안하시면 다른 약을 더 챙겨 드릴까요?”
“그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냉큼 달라고 대답하는 하태헌의 입을 틀어막으며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찝찝한 표정을 한 루젤이 루크에게 손짓했다.
“그럼 루크라도 데려가시겠어요? 게이트 내부까지만요. 제가 가고 싶지만, 내일까지 제작해야 하는 아이템이 남아 있어서요.”
“저희는 정말로 괜…….”
“루크! 괜찮지?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던 루크가 어깨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리 봐도 같이 가기 싫어 보이는데. 정말 이래도 되나?
내 근심을 알아챈 루젤이 보드의 그림을 지우며 가볍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루크가 정말 싫었으면 거절했을 테니까. 어차피 아이템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확인도 해야 해요.”
“그런 거라면….”
뚱한 얼굴로 날 응시하는 하태헌의 입에서 손을 치우며 루크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살짝 웃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루크 씨.”
“…네.”
역시나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들어갈 게이트는 정했나요, 부마스터?”
“그래. 바로 출발하지.”
“잘 쓰고 갖다 주세요. 물약 먹는 거 잊지 말고요.”
루젤이 이마에 올려 뒀던 고글을 다시 내려 쓰며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