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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42)화 (142/394)
  • 142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샌가 새하얀 꽃이 가득 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이유도 모르고 하염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내 앞에 보석처럼 빛나는 보랏빛 포도가 풍성하게 달린 포도나무가 나타났다.

    “와…….”

    보기만 해도 달콤해 보이는 커다란 포도에 절로 감탄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포도를 매만지자, 하늘 높은 곳에서 새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독수리?”

    화창한 햇빛을 가리는 커다란 독수리가 공중을 한 바퀴 둥글게 돌고는 곧 포도나무로 내려왔다. 가장 굵은 나뭇가지 위로 우아하게 착지한 독수리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멋있다.”

    날 향한 금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머리 부근은 하얗고 몸체는 새까만 깃털로 덮인 독수리는 마치 기지개를 켜듯 날개를 한번 펄럭인 후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치 만져 달라는 듯한 온순한 태도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쓰다듬어 주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을 다시 한 번 더 깜빡였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넋 놓고 계속 만지작거리던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어딘가 하태헌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독수리의 금안이 다시 나를 향했다. 독수리와 시선을 맞춰 서로를 바라보는데, 어딘가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

    “……?”

    놀라서 주변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나와 독수리뿐이었다.

    “……이결.”

    “설마….”

    독수리의 부리 아래 털을 길게 쓸어 만져 주며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어째 나를 보는 독수리의 눈빛에서 한심함이 느껴졌다. 하태헌이 자주 저러는데.

    “한이결.”

    “하태헌 씨?”

    정말 이 독수리가 하태헌인 거야? 아니, 어쩌다가 독수리로….

    “일어나, 한이결.”

    “예?”

    그 순간, 발밑이 훅 꺼지며 시야가 뒤집혔다. 나뭇가지를 박차고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마지막으로, 눈앞이 어둠에 뒤덮였다.

    ***

    “한이결.”

    “으음… 독수리….”

    “독수리?”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웅얼웅얼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파고들었다. 뜨끈뜨끈하고 부드러운 무언가에 볼을 비비는데, 귀를 은근하게 만져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읏…….”

    간지러운 듯하면서도 오싹한 감각에 절로 등이 떨렸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젓자 누군가가 목을 울려 낮게 웃었다.

    “일어나.”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니 옅은 구릿빛 피부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더듬더듬 눈앞의 살을 매만지다가 머리를 들자, 덤덤한 표정을 한 하태헌의 얼굴이 보였다.

    “헉…!”

    마주친 검은 눈동자에 기겁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서다 뒤늦게 맨몸 상태인 하태헌을 알아챘다.

    “하, 하태헌 씨?”

    “이제야 일어나는군.”

    옆으로 길게 누워 턱을 괸 채로 나를 구경하던 하태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얼마 못 자서 피곤하겠지만, 곧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아, 음. 네. 괜찮습니다.”

    본능적으로 가슴으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하태헌의 얼굴에 고정하며 대답했다. 내 얼빠진 반응에도 그는 별 신경 쓰지 않으며 몸을 일으켜 침대를 내려왔다.

    다행히 속옷만 입고 있었던 저번과 달리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는 하태헌은 협탁 위에 걸쳐진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으며 말했다.

    “나와. 아침 먹고 움직이도록 하지.”

    “예.”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하태헌의 뒤를 따라 침실을 빠져나온 나는 그제야 왜 안겨서 자고 있었는지 물어보는 것을 깜빡했음을 알아챘다.

    이제 와서 말을 꺼낼 수도 없고. 부스스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잠결에 내가 먼저 껴안은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태헌이 날 어린애 취급한다 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다. 이마를 짚은 채로 끙끙거리는 나와 달리 기분이 꽤 좋아 보이는 하태헌이 물이 담긴 컵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씻고 아침 먹은 후, 곧바로 길드로 갈 거다.”

    “로헌 길드 말입니까?”

    “그래. 지하 연구실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바싹 마른 입 안을 물로 적시며 물었다.

    “만날 사람이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중국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미리 말해 뒀으니 시간에 맞춰 가면 되겠군.”

    나는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6시도 안 된 이른 시각이었다.

    “로헌 소속인 겁니까?”

    “작년에 블런 길드에서 우리 쪽으로 넘어온 제작자다. 실력이 꽤 쓸 만하지.”

    블런 길드에서 넘어온 제작자라…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어비스 소설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예상하는 제작자와 하태헌이 말한 제작자가 동일하다면, 이 계획은 믿을 만했다.

    이해했다는 내 답에 하태헌이 욕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씻고 나와라. 외출복은 욕실 앞에 뒀다.”

    ***

    로헌 길드 주차장에 도착한 나와 하태헌은 직원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하 3층을 누른 하태헌이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 가죽으로 된 하프팜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양손을 가득 채운 흉터가 가려지는 것을 보며 어비스에서 읽었던 그의 과거를 기억해 냈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각성한 SS급 능력자. 저 흉터는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개미 떼처럼 몰려든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능력을 확인하고 다듬는 과정에서 생겨난 노력의 흔적이었다.

    SS급의 능력과 기운은 대단히 강했지만, 그만큼 위험했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거대한 힘을 제대로 컨트롤하기 위해 하태헌은 많은 일을 겪었다.

    ‘소설에서는 이주하를 만나기 전까지 길드 관리 본부 훈련소에서 치료도 마다하고 능력을 단련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

    그 기간은 대략 3개월. SS급은 표본도 적은 데다 국내에서 두 번째로 등장한 SS급이라 도움받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그럼 천사연은?’

    비교적 최근에 각성해서 능력자의 존재가 낯설지 않고, 다양한 전용 시설을 이용한 하태헌도 본인의 능력에 익숙해지기까지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천사연은? 어린 나이에 레퀴엠 길드를 세웠다고 그랬으니, 적어도 능력 각성은 그 이전에 했을 텐데.

    가슴 한구석에 싸한 냉기가 감돌았다. 어비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천사연의 삶이 어땠을지… 처음으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이결?”

    “예?”

    멍한 정신 사이로 하태헌의 부름이 들려왔다. 급히 숙였던 고개를 들자, 문이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하태헌이 보였다.

    “안 내리고 뭐 하지?”

    “아. 죄송합니다.”

    황급히 복도로 빠져나오며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천사연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하태헌을 따라 불투명한 유리로 된 연구실 문을 열었다.

    “윽!”

    “바닥 조심해라.”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상자에 걸려 넘어질 뻔한 내 몸을 하태헌이 붙잡았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채워진 방은 어둡기까지 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안쪽으로 걸어가니 새파란 불빛과 함께 발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그리고 이걸 꼽아. 아니 아니, 파란 선 말고 붉은 선!”

    “이거?”

    그와 동시에 하태헌이 벽에 달린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에 달린 전등에 불이 켜지며 어둡던 연구실 내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어어, 부마스터?”

    그제야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여자가 끼고 있던 커다란 고글을 이마로 밀어내며 달려 나왔다. 와장창, 여자의 몸에 부딪혀서 바닥으로 떨어진 망치가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구불구불한 카키색 머리카락을 높게 틀어 올려 묶은 이국적인 외모의 여자였다. 콧대와 볼을 채운 주근깨로 인해 쾌활하고 명랑한 인상을 풍겼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녀가 어비스에서 등장한 로헌 소속 A급 제작자와 동일 인물인 것을 알아챘다.

    “정신없어서 몰랐어요. 아, 이분이 한이결 능력자인가요?”

    “안녕하세요.”

    지저분한 녹색 점프슈트에 대충 손바닥을 닦은 여자가 씩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 유명한 한이결 능력자를 만나다니, 영광이에요. 어서 와요. 전 편하게 루젤이라고 불러 주세요.”

    “반갑습니다, 루젤 씨.”

    “아하하, 씨는 무슨. 그런 거 안 붙여도 돼요.”

    맞잡은 손을 힘차게 흔든 루젤이 나와 하태헌에게 손짓했다.

    “들어와요! 부마스터가 부탁했던 기계는 곧 완성돼요. 참, 동생이 도와주고 있는데. 괜찮죠?”

    루젤이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무언가가 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했다. 최대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안쪽 방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앉은 채로 검은 담요를 뒤집어쓴 남자가 보였다.

    “루크! 그렇게 숨어 봤자 소용없어.”

    루젤의 말에 머뭇거리며 담요를 내리는 남자의 행동에 눈을 깜빡였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숨은 거였어? 고작 구석에서 담요 좀 뒤집어쓴 거로는 가려지기 어려운 덩치였다.

    루젤과 똑같은 카키색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루크가 낯을 좀 가려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루크라고 불린 남자는 나와 하태헌의 눈치를 살피며 루젤의 뒤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하태헌에게 속삭였다.

    “저 루크라는 남자도 로헌 소속인 겁니까?”

    “아니. 내가 알기로 그는 무소속이다.”

    역시. 어비스에서도 루젤만 등장했을 뿐, 루크는 나오지 않았다.

    ‘뭐, 동생이 있다는 설명이 간단하게 한두 줄 적혀 있었을 수도 있긴 한데.’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생긴 아이템을 들고 이리저리 매만지던 루젤이 하태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전에 설명 없이 데려와서 죄송해요. 저 혼자서는 시간 내로 완성하기가 어려워서요. 그래도 실력은 좋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같은 제작자인가?”

    “네. 루크도 A급이에요. 분야는 좀 다르지만.”

    콧잔등을 찡그리며 장난스럽게 웃은 루젤이 루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합성 전문이라면 루크는 추출 전문이죠. 몬스터에게서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얻어 내는 데 천재적이에요.”

    흥미로운 설명을 들으며 거대한 상아를 들고 움직이는 루크를 살펴봤다.

    “아무래도 몬스터 시체를 직접적으로 다뤄야 해서 합성보다 힘들고 위험한 분야예요. 그래서 전문가가 많이 없어요.”

    “내가 의뢰한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건가?”

    “음, 아뇨. 그보다는 아이템을 안전하게 이용하는 데 필요해요.”

    확실히 체크무늬 셔츠 위로 보이는 어깨도 넓고 키도 꽤 컸다. 일반인과 신체가 별반 다를 바 없는 비공격형 능력자임에도 힘이 꽤 좋아 보였다.

    쿠웅, 무거운 상아를 바닥에 내려놓은 루크가 굽혔던 상체를 펴며 슬쩍 내게 시선을 보냈다. 마주친 카키색 눈동자에 빙긋 웃어 주자 그가 황급히 얼굴을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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