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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41)화 (141/394)
  • 141화

    36. 떠날 겁니다

    하늘을 가로지르다 잠시 고개를 들었다. 먹구름에 노란 달빛이 반쯤 묻혔다. 날씨가 영 안 좋다고 생각하며 이동 속도를 높였다.

    한참을 날아 도착한 테라스에는 반가운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이결.”

    “하태헌 씨.”

    하태헌이 한쪽 팔에는 담요를, 다른 손에는 머그잔을 들고 나를 맞이했다. 거실에서 흘러나온 불빛을 등지고 서 있던 하태헌은 난간을 지나쳐 테라스로 무사히 내려선 내 어깨에 담요를 걸쳐 줬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쌀쌀했던 터라 고맙게 받으며 내미는 머그잔을 들었다. 잔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핫초코가 담겨 있었다.

    솔솔 올라오는 초콜릿 냄새에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더 빨리 연락하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조금 늦었습니다.”

    “상관없다.”

    “여기에 잠깐 신발 벗어 놔도 됩니까?”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테라스에 신발을 벗어 두고 거실로 들어섰다. 따듯한 실내가 서늘하게 얼어붙은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며칠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거실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옷을 너무 얇게 입은 것 아닌가?”

    “그러게요. 외투라도 걸쳤으면 좀 나았을 것 같아요.”

    새벽 1시를 넘긴 늦은 시간이었다. 소파 옆 스탠딩 조명만 켜진 어두운 거실에 서서 하태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휴가는 언제까지입니까?”

    “2주 정도 남았군. 일부러 다른 휴가도 붙였다.”

    “귀한 휴가를 저한테 쓰게 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태헌의 따듯한 손이 차갑게 식은 내 뺨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다른 말이 듣고 싶은데.”

    다른 말?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음… 감사합니다?”

    그럭저럭 나쁜 답이 아니었는지 그가 대화 주제를 넘겼다.

    “정리는 잘하고 온 건가?”

    “어느 정도는요.”

    허전한 손목을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그런 나를 잠시간 응시하던 하태헌이 어째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가?”

    “저를 너무 못 믿으시네.”

    가볍게 장난치며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위치 추적 위험성이 있는 아이템은 뺐고, 사용하던 핸드폰도 두고 왔습니다. 챙겨 온 것은 하태헌 씨가 처음 줬던 핸드폰 말고는 없어요.”

    “레퀴엠 길드 직원은?”

    “예?”

    하태헌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가까운 사람이 꽤 있어 보이던데. 레퀴엠 길드에서.”

    뒤늦게 그의 말뜻을 알아챈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잠시 고민했다.

    “있기는 한데….”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사실, 떠나온 지금까지도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하태헌 씨에게도 말했듯이 실력 있는 정신계 능력자가 있어서요.”

    “예언자를 만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건가?”

    “…언젠가는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날 생각이긴 하지만,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해결할 문제들도 많고요.”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하태헌 씨도 무리하실 것 없습니다. 중국에 도착해서 예언자를 찾아가는 길만 알려 주셔도 괜찮아요.”

    “아니.”

    팔찌를 끼지 않아 텅 빈 내 손목을 하태헌이 감싸 쥐었다.

    “계속 함께할 거다. 예언자를 찾으러 가는 길도,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도.”

    “예? 그건….”

    “네가 또 무슨 사고를 칠지 가늠도 안 되니 차라리 곁에 두는 게 낫다.”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어색함에 목덜미를 쓸었다.

    “하지만 저는 예언자를 만난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뭐가 됐든, 휴가 기간에는 옆에 붙어 있어라. 휴가가 끝난 후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니까.”

    단호하게 말한 하태헌은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은 자고 아침에 움직이는 게 좋겠군. 옷을 빌려줄 테니 갈아입어.”

    “잠깐만요. 중국에 어떻게 갈 건지 설명 안 해 주실 겁니까?”

    “일단 자.”

    “하지만…….”

    “한이결.”

    냉정한 목소리에 몸이 절로 움찔 떨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는 기분이 굉장히 저조해 보였다.

    “…음, 네. 알겠습니다.”

    도움받는 처지에서 무작정 고집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태헌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급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을 생각이라면 제대로 대비하고 움직이는 편이 나아. 섣불리 행동해 봤자 놓치는 것만 많아질 거다.”

    내 손을 잡고 욕실 앞으로 이끈 하태헌이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보이는 옷과 속옷을 건넸다.

    “사이즈는 어느 정도 맞을 거다. 씻고 나와.”

    “감사합니다.”

    그가 기분이 어떻든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신경 써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심을 담아 인사하며 웃으니 하태헌이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태헌 씨?”

    “씻어라.”

    어리둥절해하는 내 등을 억지로 욕실로 밀어 넣은 하태헌이 쾅, 소리가 나도록 욕실 문을 닫았다.

    ‘진짜 무슨 일 있나?’

    당최 종잡을 수 없는 하태헌의 상태를 걱정하며 옷을 벗었다.

    ***

    다 씻고 젖은 머리카락까지 얼추 말리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PC를 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하태헌에게 다가갔다.

    “이거, 설마 저 때문에 새로 사신 겁니까?”

    스탠딩 조명의 노란빛이 어른거리는 하태헌의 얼굴을 보며 묻자, 그가 태블릿PC 화면을 끄고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그래. 문제 있나?”

    “아뇨, 그건 아닌데….”

    하태헌이 갈아입으라고 준 옷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파자마였다. 하얀 바탕에 연한 회색 체크가 들어간 파자마 소매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하지만 입을 일이 또 있을 것 같진 않아서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날 보며 묘한 웃음을 지은 하태헌이 침실로 걸어갔다. 웃음에 홀린 듯이 뒤를 따라가다 바로 앞에 보이는 커다란 침대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잠깐. 왜 자연스럽게 침실로 들어가는 거야?’

    그때야 실수로 잠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생수병 사건을 겪어 놓고 또 하태헌과 같은 침대를 쓸 생각은 없었다.

    “그, 저는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급히 뒷걸음질 쳤지만, 하태헌이 예상했다는 듯이 침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누워라.”

    “아니, 아닙니다. 저는 진짜 소파로도 충분해요.”

    “내가 손님을 소파에 재우는 인정머리 없는 놈으로 보이나?”

    인정머리 없는 놈?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너 인정머리 없긴 하잖아.’

    아무리 좋아하는 주인공이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냥 얇은 이불 하나만 던져 주셔도.”

    “남는 이불 같은 건 없다. 혼자 사니까. 그만 쫑알대고 가서 누워.”

    하태헌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지만, 선뜻 알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식은땀 나는 일을 두 번이나 겪고 싶진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멀뚱히 서서 눈동자만 굴리는 내 모습에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말 들어.”

    “…….”

    살다 살다 침대 앞에서 남자한테 저런 말을 들어 보는구나.

    “…알겠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주인의 말을 더 거역할 용기가 없었다.

    내가 침대로 걸어가 천천히 눕자, 방 불이 툭 꺼졌다. 먹구름 탓에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누군가와 침대를 써야 한다는 상황에 긴장감이 확 치솟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침대 바깥쪽에 자리를 잡았다. 침대가 제법 넓어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치자, 옆에 누운 하태헌이 처음만큼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고 어떻게 자냐는 거지.’

    꽤 늦은 시간이라 피로가 몰려왔지만, 눈이 감기지는 않았다. 등을 돌린 상태라 보이지 않는 하태헌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조금이라도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면 몸이 나도 모르게 움찔 떨렸다.

    그렇게 구석에서 바싹 굳어 한참 동안 눈동자만 굴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하태헌의 고른 숨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두운 침실은 매우 고요했다.

    천천히 숨을 깊게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하태헌은 내 쪽을 향해 모로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을 보아 정말로 잠든 모양이다.

    하긴. 잘 시간이 한참 지나긴 했지. 조심히 하태헌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잘난 이목구비는 선명하게 보였다.

    “…….”

    그러고 보니 이렇게 차분히 하태헌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흐트러진 앞머리 너머로 보이는 깔끔한 이마와 반듯한 미간, 정갈한 눈매와 곧은 콧대를 차근차근 살펴보며 새삼 내가 주인공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제대로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하태헌의 인생도 소설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것이다. 나와 엮인 이들은 모두 그랬으니까.

    그래도 잠이 든 하태헌의 표정이 꽤 평온해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오랫동안 하태헌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태헌과 같이 누운 이 침대가 편안하게 느껴지면서, 그제야 긴장 때문에 잊고 있었던 졸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예언자를 만나고 나면…….’

    앞으로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지 않았다.

    막 잠에 빠져들려는 그 순간, 이불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가 살짝 흔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뜨려고 했지만,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오는 따듯한 체온을 마지막으로 나는 온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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