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손에 들린 와인 병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땀에 젖어 미끄러운 손바닥이 혹여 와인 병을 놓칠까, 재차 힘주어 잡으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늦은 밤, 몇몇 전등 빛만 남기고 소등한 집 안에 불온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허락은 곧바로 떨어졌다. 서재 문을 부드럽게 열자 붉은 카펫과 티 테이블, 소파가 차례로 보였다. 책장 앞에 서서 책을 보던 상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웬일로 먼저 찾아와?”
“…….”
“뒤에 숨긴 건 뭐지?”
장난기 깃든 목소리에 머뭇거리며 들고 온 와인 병과 와인 잔 두 개를 눈앞에 꺼냈다. 탁, 펼쳤던 책을 덮은 그가 책장에 책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찾아온 것도 놀라운데 술까지 가져왔다라….”
은은한 전등 빛에 백금발이 보석처럼 빛났다. 서재를 가로질러 천천히 내 앞까지 걸어온 그가 손에 들린 와인 병을 뺏어 들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이 온 것보다는 낫네.”
“…괜찮으신 거면.”
“물론 괜찮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먼저 술을 마시자고 청했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나.”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안은 그가 소파로 몸을 이끌었다. 스크류 캡 형식의 마개를 손쉽게 열어 낸 그는 능숙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잔에 와인을 따랐다.
“뭐 해?”
멀뚱히 서서 점차 채워지는 와인 잔을 바라보는 날 향해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앉아.”
그 말에 우습게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데.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소파에 앉았다. 오늘따라 입고 있는 정장이 몸을 휘감은 뱀처럼 느껴졌다.
“자, 그럼….”
두 와인 잔에 와인을 모두 따른 그가 맞은편에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은회색 눈동자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그…….”
식은땀으로 차갑게 식은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고민했다. 서재에 침묵이 내려앉자 한가로운 얼굴로 와인 잔을 이리저리 돌리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없으면 나가.”
“아닙니다.”
본래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은 남자다. 급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사님. 제가 오늘….”
“응.”
“석재가 다쳤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내가 그렇게 명령했으니까.”
막힘없이 나온 대답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라.”
뼈가 도드라진 기다란 손가락이 와인 잔을 툭 때렸다. 티잉, 맑은 소리와 함께 잔에 담긴 와인이 잘게 흔들렸다.
“이유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일을 못했으니 벌을 받을 뿐이지.”
“부상이 심합니다.”
“알아.”
심드렁한 상대의 태도에 초조함이 일기 시작했다.
‘침착해.’
성급하게 행동해 봤자 이로울 것 하나 없다. 다시 한번 마른 입술을 핥았다.
“담당 의사가, 오른쪽 다리를 평생 절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안됐네.”
내 입술을 잠시간 바라보던 그가 곧 와인 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사님.”
“고작 그 말 하려고 온 건가? 박석재 수술받게 해 달라고?”
턱을 매만지며 나를 비웃은 그가 곧 명령했다.
“이리 와.”
“…….”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그에게 걸어갔다.
“더 가까이.”
소파 옆에 멈춰 선 내 손목을 잡아끈다. 벌린 다리 사이에 나를 세운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혀 시선을 맞춰 왔다.
이후는 굳이 명령을 듣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나는 다리를 굽혀 바닥에 꿇어앉았다.
“옳지.”
그런 내가 기특하다는 양 새하얗고 차가운 손이 이마를 쓸어 왔다.
툭, 투둑. 서재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창문을 모두 적실 정도로 쏟아지는 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세현아.”
접힌 다리가 희미하게 저릴 때쯤, 드디어 매끈한 입술이 열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최대한 순종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예.”
“와인은 왜 들고 온 거야? 뇌물?”
“아닙니다.”
“귀엽기는 한데.”
튀어나온 뼈로 울퉁불퉁하고 흉터가 가득한 손이 억세게 턱을 붙잡아 왔다. 강한 악력에 고통이 밀려왔다. 신음을 삼켜 내며 미간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어째 몸 팔러 온 것 같은 느낌도 나고. 안 그래?”
“죄송합…….”
“아냐, 사과하지 마. 네가 나한테 몸 파는 게 어때서? 오히려 재밌지.”
정말로 재밌는지, 그가 퍽 즐거운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괜찮네. 석재 덕분에 이렇게 고분고분한 모습도 오랜만에 보고. 앞으로 자주 벌을 줘야 하나?”
“이사님.”
“농담.”
엄지손가락이 눈썹을 지나 볼을 타고 내려와 입술에 닿아 왔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입술을 쓰다듬던 그가 물었다.
“어쩌지, 세현아.”
“…….”
“고작 와인으로는 석재를 용서해 줄 마음이 들지 않는데.”
“……제가.”
냉정한 말에 온몸이 다시 긴장했다. 바싹 굳어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흐음.”
“그러니까 석재가 수술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엄지손가락이 입술을 벌리고 들어왔다. 단단한 이빨을 지나쳐 혀를 누르고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대신 벌을 받는다…….”
내 말을 따라서 중얼거린 그가 엄지손가락에 이어 검지 손가락을 입 안으로 넣었다.
“난 너한테 너무 약한 것 같아, 세현아.”
“흐, 으….”
“다음번은 와인으로는 부족할 거야.”
손가락이 순식간에 네 개로 늘어났다. 크게 벌린 턱이 뻐근하게 당겨 왔다. 제멋대로 입 안을 휘젓는 손가락에 눈가가 일그러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진짜 옷이라도 벗어야 할 텐데.”
구역질을 억지로 삼켜 내는 게 점점 힘에 부쳤다. 다급히 그의 허벅지를 붙잡으며 시선을 올렸다. 그러나 상대는 봐주는 것 없이 단호했다.
“제대로 해야지.”
“…….”
낮은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굳은 혀를 억지로 움직였다. 딱딱한 손가락을 핥고, 빨아들이듯 깊게 삼켰다. 내 행동에 눈앞의 이가 만족스러운 듯이 나긋하게 웃었다.
***
흐릿한 시야로 새하얀 빛이 가득 차올랐다. 몽롱한 정신에 두 눈을 깜빡이다, 콧잔등을 툭 두드려 오는 손길에 시선을 올렸다.
“Good morning.”
“……!”
아침 햇살에 어울리는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박건호의 얼굴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기겁하며 반대로 몸을 돌렸다가, 이번에는 잔뜩 피로한 우서혁의 얼굴을 마주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 우서혁 씨.”
“일어나셨습니까?”
그제야 박건호와 우서혁 사이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옆으로 길게 누워서 느긋하게 구경하던 박건호가 장난기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숙취가 있지는 않고?”
“괜찮, 큼. 괜찮습니다.”
잠긴 목에 헛기침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침실에서 편한 옷을 입고 있는 박건호와 우서혁을 보자 어젯밤에 술을 마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디 가서 함부로 술을 마시면 안 되겠더군, 한이결.”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는 내 꼴이 꽤 웃기는지 박건호가 킥킥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디까지 기억나지?”
“씻고 나서 팀장님이 머리 말려 준 거까진 대충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그 정도면 양호하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엄연히 따지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든 거지, 술에 취해서 기억이 끊긴 건 아니었으니까.
‘앞으로는 술을 마실 때 주의해야겠어.’
지친 상태에서 안주 없이 급하게 마셔서 취기가 빠르게 돈 것도 있지만, 한이결은 A급치고 술에 굉장히 약한 편이기도 했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주량을 알아내서 다행이었다.
“아픈 곳은 없습니까?”
나를 따라 침대에서 내려온 우서혁이 물었다.
“멀쩡합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를 살펴봤다. 항상 반듯하게 머리를 넘기고 정장을 입던 우서혁이 지금은 머리도 내리고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새로웠다.
“한이결 씨?”
내가 아무 말 없이 계속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굉장히 피곤해 보여요.”
“잠을 못 자서 그렇습니다만, 하루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박건호를 돌아봤다. 긴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 하는 박건호는 우서혁과 달리 아주 상쾌해 보였다. 아무래도 나와 박건호가 푹 자는 동안 우서혁만 깨어 있던 모양이다.
“나는 자라고 했어. 거절한 건 우서혁 비서야.”
어깨를 으쓱이며 변명처럼 말하는 박건호에게 물었다.
“그보다, 어쩌다 셋 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던 겁니까? 남는 방이 있다면서요.”
“죄송합니다. 박건호 팀장이 곧 죽어도 한이결 씨 옆에서 잠을 자겠다고 해서.”
“내 침대에서 내가 자겠다는데.”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내 말에 픽 웃은 박건호가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 문을 열었다. 그를 뒤따라 거실로 나오며 시계를 확인했다. 막 아침 9시 30분을 지난 시각이었다.
“아무튼 재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미안하면 오늘 좋은 곳에서 식사라도?”
“그건 다음에요.”
박건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이후의 일정이 모조리 틀어졌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다시 정리하며 박건호가 건네는 물 잔을 받았다.
“아침 먹고 길드로 돌아가도록 하지. 우서혁 비서. 커피?”
“마시겠습니다. 아침 준비도 돕도록 하죠.”
“그래 주면 고맙겠군.”
미리 맞춘 듯이 척척 움직이는 박건호와 우서혁을 멍하니 보며 물을 마셨다.
참, 평소에는 눈만 마주쳐도 그렇게 싸워 대면서 이럴 때는 또 합이 기가 막히게 맞는단 말이지.
‘그러고 보면 이전에 N23 구역 게이트에서 전투할 때도 지금과 비슷했었지.’
사이만 좋으면 쓸 만한 콤비가 됐을 텐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다 마신 물 잔을 내려놨다.
“저는 뭐 도울 거 없습니까?”
“흠. 도울 거라…. 근데 한이결. 듣자 하니 요리를 엄청 못한다고 하던데.”
“예?”
소매를 걷으며 주방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막아서며 박건호가 빙긋 웃었다.
“양파 하나도 못 썬다고 민아린 힐러가 얘기해 주더군.”
“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건 맞지만, 그래도 칼 하나는 잘 다룰 자신 있….”
“여긴 나와 우서혁 비서로 충분하니 가서 씻어.”
“잠깐…!”
내 어깨를 붙잡고 주방 밖으로 밀어낸 박건호가 친히 욕실 문을 열어 줬다. 얼떨결에 욕실로 들어와 버린 나는 거울에 비친 멍청한 한이결의 모습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