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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38)화 (138/394)
  • 138화

      

    “흐음.”

    입가를 매만지며 나를 바라보던 박건호가 술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무래도… 취한 거 같지?”

    “같은 게 아니라 맞습니다.”

    “안 취했는데요?”

    뭐 얼마나 마셨다고 취해? 몸이 좀 뜨겁기는 하지만, 고작 이거 마시고 취할 만큼 주량이 약한 건…….

    ‘잠깐만. 지금은 한이결 몸이잖아.’

    약, 약한가? 그러고 보니 한이결 주량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꿀꺽.

    입에 든 마지막 술 한 모금을 삼켜 내며 슬쩍 잔을 내려놨다. 내가 하는 꼴을 조용히 지켜본 박건호가 픽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몸 상태를 이제 깨달았나 본데. 술도 약하면서 그렇게 막 마시면 쓰나.”

    “…….”

    술잔 채워 준 사람이 저딴 소리를 하다니. 원통함이 몰려왔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웬만한 술 종류와 브랜드는 다 외우고 어지간히 마셔도 버텨 낼 만큼 주량에는 자신 있었는데…!

    “눈빛 봐. 뭘 억울해하고 그래? 자자, 그러지 말고 더 마셔.”

    “박건호 팀장.”

    반쯤 비워진 잔에 다시 소주를 콸콸 붓는 박건호의 행동을 막으며 우서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하십시오. 진짜 큰일 납니다. 가뜩이나 지친 사람한테.”

    “취해도 재우면 되지. 그래도 성인에 A급인데, 너무 싸고도는 거 아닌가. 우서혁 비서?”

    “설마 여기서 재우려는 겁니까?”

    “여기가 어때서? 내 집만큼 안전한 곳도 찾아보기 힘든데.”

    “장난 그만 치십시오.”

    “으윽….”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피곤한 상태로 빈속에 소맥을 부어 넣은 터라 술기운이 엄청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이결 씨, 괜찮으십니까?”

    이마를 부여잡으며 상체를 굽히자 우서혁이 급히 어깨를 붙잡아 왔다.

    “네. 그냥, 좀 급하게 마시긴 했나 봐요.”

    “이런.”

    장난처럼 채웠던 술잔을 치운 박건호가 새 잔에 물을 담아 줬다.

    “놀릴 수도 없군. 정말 A급 맞나? 너무 허약한데.”

    “주량이랑 등급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당연히 상관이 있지. 이렇게 못 마시는 A급은 본 적이 없는데.”

    “한이결 씨는 예전에 몸살도 크게 앓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평범한 A급과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정도는… 아닌데요….”

    똑바로 말하려고 해도 혀가 자꾸만 느리게 움직여서 쉽지 않았다. 흐느적거리는 내 모습에 우서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운전할 테니, 이만 돌아갑시다.”

    “자, 잠깐만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속이 뒤집히는 감각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차 타면 큰일이 날 것 같아요.”

    일어서려다 실패한 내 몸을 품에 안으며 우서혁이 짜증이 담긴 눈으로 박건호를 노려봤다.

    “그렇게 보지 말지? 나도 진심으로 취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일단 한이결, 너는 물부터 좀 마시고.”

    박건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물 잔을 내밀었다. 눈을 감은 채로 더듬더듬 손을 뻗어 물 잔을 받아 마셨다.

    “일단 술기운부터 가라앉힙시다. 그다음에 길드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냥 자고 가지?”

    우서혁이 그 제안을 싹 무시하며 나를 번쩍 들어 소파에 눕혔다. 온몸이 뜨겁고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꾹 감은 두 눈을 손으로 눌렀다.

    ‘아, 창피해…….’

    아무리 지친 몸이라고는 해도 고작 술 좀 마셨다고 쓰러지다니. 전부터 느꼈지만, 이 몸뚱아리는 정말이지 쓸모가 없었다. 술을 열심히 마셔서 주량을 억지로 늘릴 수도 없고.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잠깐 쉬면 나을 것 같은데. 옆에 물 잔이라도 놔 줘. 계속 마시게.”

    주방에서 박건호와 우서혁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몽롱한 정신으로 가만히 누워 있으니 버티기 어려울 만큼 열기가 치솟았다. 결국 상체를 일으켜서 주섬주섬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애초에 술을 준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한이결 씨는 병실을 나온 지 얼마 안 된… 한이결 씨?”

    “한이결?”

    답답하다는 말투로 잔소리를 이어 가던 우서혁과 심드렁히 듣고 있던 박건호가 동시에 나를 불렀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반쯤 벗어 내며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예?”

    “옷은 갑자기 왜 벗으십니까?”

    “허.”

    한걸음에 달려오는 우서혁의 뒤에서 박건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들 이러지.

    “더워서….”

    “덥다고 해도 그렇게 막 벗으시면 안 됩니다.”

    “뭐 어때요. 남자끼리….”

    티셔츠를 마저 벗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휙휙 털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던 우서혁이 바지 벨트를 풀려는 내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감기 걸립니다.”

    “불편한데요.”

    “갈아입을 옷을 줘야겠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킥킥거리며 웃던 박건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러게 자고 가라니까, 우서혁 비서.”

    “하지만.”

    “그나마 대답할 이성이 있을 때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게 나을 텐데.”

    바지춤을 잡은 채로 멍하니 우서혁을 올려다보자, 갈등하듯 머뭇거리던 그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욕실이 어딥니까?”

    “이쪽으로.”

    ***

    우서혁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속으로 한탄하며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자, 한이결. 아― 해. 아.”

    “아….”

    치약이 묻은 칫솔을 든 박건호의 말에 한이결이 얌전히 입을 벌렸다. 발간 혀가 보이는 입 안에 칫솔을 넣어 주며 박건호가 짙게 미소 지었다.

    “착하네.”

    “그만하시죠.”

    보다 못한 우서혁이 한이결의 몸을 욕실 안으로 밀어 넣으며 욕실 문을 닫았다. 문을 등지고 선 우서혁이 박건호와 정면으로 마주 보며 말했다.

    “뭘 그만하라는 거지? 씻는 걸 도와주는 것뿐인데.”

    “한이결 씨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자고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선은 지키십시오.”

    “선? 무슨 선을 말하는 거지?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박건호가 뻔뻔한 태도로 팔짱을 끼며 픽 웃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우서혁이 속으로 혀를 차며 먼저 몸을 돌렸다.

    “재울 곳은 있습니까? 소파나 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침대에서 재워야지.”

    느긋한 대답을 들으며 우서혁은 소파에 앉아 눈가를 쓸어내렸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는 하루가 그에게는 적잖이 피곤했다.

    처음 한이결을 따라 C12 구역으로 갈 때만 하더라도 하루가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차 안에서 한이결이 돌아오도록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뻐근한 눈을 감자, 아까 낮에 봤던 한이결의 모습이 떠올랐다. 벽을 손으로 짚은 채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한이결을 발견했을 때, 우서혁은 박건호와 함께 보던 서류를 내버리고 급히 차 밖으로 달려 나왔다.

    -아니, 아닙니다. 이건….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부드러운 캐러멜색의 눈동자가 물을 머금고 보석처럼 빛났다. 박건호에게 의지한 채로 애처롭게 우는 얼굴에 우서혁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볼을 쓸었다.

    “…….”

    한이결의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을 잠시간 바라보던 우서혁은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바로 뒤를 돌아봤다.

    “한이결 씨.”

    “휘유.”

    눈에 띄게 당황하는 우서혁의 뒤로 식탁을 정리하던 박건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긴 한이결이 수건으로 대충 중요 부위만 가린 채로 욕실 밖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그 말에 우서혁의 매서운 눈길이 박건호를 향했다. 시선에서 혐오감을 읽어 낸 박건호가 드물게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급히 한마디 했다.

    “앞에 뒀는데.”

    “아.”

    그제야 욕실 문 앞에 걸어 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발견한 한이결이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겨우 눈을 돌린 우서혁이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뱉었고, 박건호는 아까 따라 놓은 술을 마치 물처럼 마셨다.

    “속옷은 사이즈 맞는 게 없어서 준비 못 해 줬는데. 어쩔 수 없지.”

    “박건호 팀장.”

    “뭐 어떤가. 바지 입잖아.”

    그사이 옷을 다 챙겨 입은 한이결이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저 여기서 자고 가요?”

    “원하는 대로.”

    천진한 물음에 박건호가 빙긋 웃었다. 저에게는 꼭 재울 것처럼 말하더니. 확연하게 달라진 태도에 우서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서혁 씨는요?”

    한이결이 멀건 낯으로 우서혁을 돌아봤다. 말투에서는 취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멍한 눈빛이나 뭐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가 평소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절대 한이결 씨를 여기에 혼자 두고 가지 않을 겁니다.”

    몇 번째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우서혁이 길게 내려온 한이결의 소매를 대신 접어 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좀 씻겠습니다. 남는 옷 좀 주십시오.”

    “속옷도?”

    놀리듯 하는 물음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박건호를 응시했다. 잠시간 침묵 끝에 박건호가 양손을 들어 올리고 먼저 항복하며 드레스 룸에서 옷을 꺼내 줬다.

    속옷과 더불어 편한 옷을 건네받은 우서혁이 씻는 사이, 박건호는 소파에 앉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는 한이결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머리 말리고 자, 한이결.”

    “음, 귀찮…….”

    박건호는 드라이기를 가져와 웅얼거리는 한이결을 다리 사이에 앉히고 대신 머리카락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뜨끈뜨끈한 열기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한이결이 본격적으로 졸기 시작했다.

    “잠들었습니까?”

    “반쯤은.”

    축 늘어진 한이결을 씻고 나온 우서혁이 이어받았다.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얌전한 모습에 박건호가 고개를 저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깨어나면 술을 조심해서 마시라고 해야겠군.”

    “동의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조는 한이결을 품에 안아 든 우서혁이 몸을 일으켰다.

    “눕혀야겠습니다. 침실이 어딥니까?”

    “이쪽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방문을 열자 새하얀 이불이 깔린 커다란 침대가 나타났다. 우서혁이 침대에 한이결을 눕히며 혀를 찼다.

    “혼자 살면서 이렇게 큰 침대는 뭐 하러 두는 겁니까?”

    “혼자 살아도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지. 오늘처럼.”

    “…….”

    말이나 못하면. 헛소리를 무시하며 이불을 끌어다 한이결을 덮었다. 그때, 부드럽고 푹신한 천의 감촉에 한이결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사님, 제가…….”

    “예?”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한이결이 곧 눈을 다시 감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이결을 향해 몸을 숙이고 있던 우서혁이 허리를 폈다.

    “뭐야?”

    “아닙니다.”

    그새 칫솔을 입에 물고 껄렁껄렁 걸어온 박건호의 물음에 우서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든 한이결로부터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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