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37)화 (137/394)
  • 137화

    35. 불완전한 기억

    “한이결, 정신 차려!”

    “괜찮으십니까?”

    박건호와 우서혁이었다. 축 늘어진 팔에 겨우 힘을 줘서 박건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흐, 제가… 나오지 말라고 했…….”

    “지금 그게 중요해?”

    “얼굴 좀 들어 보십시오.”

    따듯하고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올렸다. 잔뜩 일렁이는 시야로 미간을 찌푸린 둘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하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우서혁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었다. 나는 그제야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알아챘다.

    “아니, 아닙니다. 이건….”

    내가 우는 게 아니야.

    ‘한이결이 울고 있다.’

    차마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젖은 숨을 내뱉었다.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박건호가 억지로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 가자.”

    내 팔을 어깨에 두른 박건호가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반쯤 들리다시피 부축을 받으며 차로 돌아와 뒷좌석에 몸을 뉘었다. 내 곁에 앉아 눈물을 닦아 주던 우서혁이 운전석에 앉은 박건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고민 중이야.”

    말과 달리 박건호는 망설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때까지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렀다.

    “그러지 마십시오.”

    거칠게 눈을 비비는 내 손길을 막아 내며 우서혁이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어린애 대하듯 눈물을 닦아 주는 우서혁의 행동 때문에 좀 부끄러웠지만,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피로했던 터라 고맙게 받아들였다.

    ***

    고장 난 것처럼 흐르던 눈물이 겨우 멈출 때쯤, 차가 어딘가에 도착했다. 우서혁이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내게 물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차 문을 열어 준 박건호와 먼저 내린 우서혁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기다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밖으로 나온 나는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저 멀쩡합니다.”

    “믿기 힘든 말을 참 쉽게 하는군.”

    가볍게 비웃은 박건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윽, 뭡니까?”

    놀라서 반사적으로 박건호의 목을 끌어안으며 항의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하며 걷기 시작했다.

    “아직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험하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예, 예.”

    우서혁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린 박건호가 주차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 주세요, 박건호 팀장님.”

    “가만히 있어. 도착했으니까.”

    낯부끄러운 자세에 내려가려고 버둥거리자, 박건호가 더 단단하게 붙잡았다.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멈춰 서고 밝은 그레이톤의 넓은 복도가 드러났다.

    “여긴…….”

    복도에 딱 하나 있는 현관문의 도어 록 키를 누른 박건호가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우리 집.”

    간단한 대답과 함께 박건호가 나를 내려 줬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먼저 들어간 그가 나와 우서혁에게 손짓했다.

    “들어와.”

    난감한 마음으로 우서혁과 시선을 나눴다. 갑작스럽게 오게 된 박건호의 집에 당황스러운 나와 달리 우서혁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

    어쩔 수 없나.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라 구두를 벗고 들어온 우서혁이 나를 억지로 거실 소파에 앉혔다.

    “한이결.”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 박건호가 물컵을 가져다줬다. 그렇지 않아도 갈증이 심했던 터라 감사히 받아 들며 물었다.

    “음,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도 됩니까?”

    “신경 쓰이나?”

    빙긋 웃은 박건호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길드까지는 너무 머니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사는 집이니 긴장 풀도록.”

    혼자 산다는 말에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굳혔던 어깨를 풀며 물을 마시자 우서혁도 그제야 지친 숨을 내쉬며 정장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었다.

    “감사합니다. 좀 이따가 돌아갈게요.”

    찬물인 줄 알았는데, 입술에 와 닿는 물이 꽤 따듯했다.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하자 박건호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냥 자고 가지? 남는 방도 많은데.”

    “그건 좀.”

    혼자도 아니고 우서혁까지 있는데… 너무 민폐지 않나? 내 생각과 같은지, 우서혁도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늦은 시간도 아니니 충분히 돌아갈 만합니다.”

    “혼자 가면 되겠군, 우서혁 비서. 근처에 지하철역도 있으니까.”

    “절대로 한이결 씨를 이곳에 혼자 두고 가진 않을 겁니다.”

    말을 짓씹듯 강하게 뱉어 낸 우서혁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어쨌든 일단은 쉬십시오, 한이결 씨. 아직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머쓱하게 입가를 매만지며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저를 발견했을 때, 어떤 상태였습니까?”

    아직도 C12 구역에서 봤던 그 모든 게 꿈인지 환각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내 질문에 잠시 서로 시선을 나눈 우서혁과 박건호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히려 우리가 묻고 싶군. 한이결,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건…….”

    우서혁이 목 끝까지 채웠던 정장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저희는 차에서 한이결 씨를 계속 기다렸습니다.”

    우서혁의 말을 박건호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이어받았다.

    “얼마 가지 않아 계단 아래로 내려오더군. 거의 기듯이 헉헉거리면서.”

    “…….”

    기듯이 헉헉거렸다니. 박건호를 노려보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다면 눈앞에 펼쳐진 한이결의 과거를 따라갈 때, 실제로 내 몸도 움직였다는 건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느끼며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우서혁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실 수 없습니까?”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당장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 답을 해 주기 애매했다.

    원치 않게 숨넘어가도록 우는 꼴을 보였으니 뭐라고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간신히 입을 뗐다.

    “사실 그, C12 구역에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기억이라.”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눈동자를 굴리던 박건호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런 얘기를 할 때는 필요한 게 있지.”

    “예?”

    주방으로 다시 들어간 박건호가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막 꺼내기 시작했다.

    “이리 와, 한이결.”

    박건호가 유리로 된 술병을 아일랜드 식탁 위로 올리며 씩 웃었다.

    “우서혁 비서도 오고 싶으면 오고.”

    술병과 맥주잔만 놓였던 식탁 위는 박건호가 분주하게 움직일수록 점차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샤인머스캣과 치즈에, 더불어 샐러드까지. 순식간에 안주를 만들어 낸 박건호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셋이서 마시기에는 좀 아쉽긴 한데. 준비해 둔 음식이 없어서 이게 한계군.”

    “잠깐만요. 갑자기 술이요?”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말할 때는 술만 한 게 없지.”

    소주, 맥주, 거기다 보드카까지? 재빠른 손놀림으로 빈 잔에 맥주를 따른 박건호가 나란히 앉은 나와 우서혁 앞에 한 잔씩 놔 주었다.

    “그, 박건호 팀장님.”

    “음?”

    박건호가 소주를 따서 본인 잔에 콸콸 따랐다. 설마 저걸 다 마시려는 건가?

    “분위기를 깨서 죄송한데, 구구절절 설명할 마음은 없는데요.”

    “상관없어.”

    마치 물을 마시듯 소주를 벌컥 들이켠 박건호가 내게 윙크했다.

    “밥은 다음에 먹고, 오늘은 가볍게 술이나 마시자고.”

    “술…….”

    거품이 일어난 샛노란 맥주를 보고 있으니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지쳤는데, 우습게도 그래서 더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지도 한참 됐네.’

    하태헌의 집에서 우연히 마신 와인 한 잔이 다였으니, 따져 보면 한이결의 몸이 된 후로 술을 제대로 마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 얼굴에서 마시고 싶어 하는 기색을 읽어 낸 우서혁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잔을 반대로 밀어냈다.

    “운전할 사람이 필요하니, 전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러든가. 자고 가라니까 하여간 앞뒤 꽉 막혀서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장소에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없습니다.”

    “말을 참 이상하게 하네, 우서혁 비서? 내 집이 위험하다는 건가?”

    또 싸우는 박건호와 우서혁을 내버려 두고 맥주를 힘껏 들이켰다. 적당한 탄산이 목구멍을 기분 좋게 간지럽히고, 갑갑했던 속이 시원해졌다.

    잔에 담긴 맥주를 모두 마시자, 우서혁과 말싸움을 끝낸 박건호가 신난 얼굴로 내 잔에 맥주와 소주를 섞어 따르기 시작했다.

    “더 마셔, 한이결.”

    “한이결 씨.”

    그간 쌓아 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술잔으로 손이 갔다. 미간을 찌푸리고 나를 지켜보던 우서혁이 중앙에 놓여 있던 안주를 죄 내 앞으로 밀었다.

    “천천히 마십시오.”

    “그래. 마시면서 얘기해 봐. 좋지 않은 기억이 뭐지?”

    소주와 맥주가 적절히 섞인 두 번째 잔도 모조리 마신 나는 참았던 숨을 뱉어 내며 대답했다.

    “…동생이, 있습니다. C12 구역에서 크게 다쳐서 지금은 치료받고 있어요.”

    다친 게 아니라 죽은 거지만, 솔직하게 얘기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박건호와 우서혁이 그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상대인지 확실치도 않고.

    “C12 구역에서 다친 거면… 설마 10월에 있었던 게이트 폭주 말인가?”

    “맞습니다.”

    박건호가 세 번째로 잔을 채워 줬다. 어째 소주 양이 방금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이번 잔도 시원하게 들이켰다.

    “알아볼 게 있어서 들렀는데, 그때 기억이 나서 조금… 감정적으로 된 것 같습니다.”

    “그렇군.”

    식탁 위로 어찌할 수 없이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축 처진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서 네 번째로 채워진 술잔을 입에 댔다.

    “우서혁 비서. 그쪽도 몰랐나?”

    “몰랐습니다.”

    샤인머스캣 한 알을 내 손에 억지로 쥐여 준 우서혁이 이어 말했다.

    “10월에 저는 마스터의 명령으로 일본에 갔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한이결 씨에 대한 정보는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 답에 놀란 건 내 쪽이었다. ‘어비스’에서 서술된 바로는, 한이결의 동생과 천사연이 연관 있다는 사실을 수행원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래서 우서혁도 당연히 동생에 대한 문제를 눈치챘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물론 방금 한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속으로 혀를 차며 술을 마시는데, 커다란 손이 옆에서 뻗어 나와 들고 있던 술잔을 휙 뺏어 갔다.

    “우서혁 씨?”

    “너무 급합니다.”

    못마땅한 얼굴로 술잔을 가져간 우서혁이 아까 쥐여 줬던 샤인머스캣을 눈짓했다.

    “안주도 드시면서 마셔야… 한이결 씨?”

    “예?”

    “얼굴이 좀 붉으신 것 같은데. 혹시 덥습니까?”

    “음? 그러게.”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덥냐고?

    “조금요…?”

    그렇게 신나게 떠들었으니 당연히 더울 만하지. 별걸 다 묻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우서혁에게 뺏긴 잔을 다시 가져왔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