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좀 비켜 주세요.”
“그래. 들어가서 마저 얘기하지.”
복도로 나가려는 나를 박건호가 실실 웃으며 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문을 닫았다. 얼렁뚱땅 방에 박건호와 우서혁을 들인 꼴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박건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서혁 씨 말처럼, 나갈 일이 좀 있습니다.”
“흐음.”
“속이려고 한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좀 중요한 문제라서요. 그러니까 막으신다 해도 전 가야 합니다.”
“안 막을 건데?”
“박건호 팀장.”
박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는 우서혁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턱 올리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솔직히 따질 건 제대로 따져야지. 우서혁 비서. 우리가 무소속인 한이결을 붙잡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위험합니다. 가뜩이나 병실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때. 한이결.”
우서혁의 말을 뚝 잘라 내며 박건호가 내게 눈짓했다.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건?”
“데려다준다고요?”
“그래. 근처까지 데려다주고 차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그럼 위험할 일도 없다고 보는데. 어떤가?”
“음.”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와 같은 마음인지 우서혁도 힐끔 박건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정말로 데려다주기만 하는 거 맞습니까? 따라오지 않을 거죠?”
“그래. 차 안에서 아주 얌전히 있도록 하지.”
그렇지 않아도 거리가 꽤 돼서 날아가기에 부담도 있던 터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길게 끌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서혁이 함께 가겠다는 말을 꺼내 왔다. 한가할 때는 백수 저리 가라 할 만큼 여유로운 박건호야 그럴 만했지만, 설마 우서혁이 함께 가겠다고 할 줄이야.
“바쁘지 않으세요?”
“무리할 필요 없는데, 우서혁 비서. 한이결과 가는 건 나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박건호가 깐족거리는 한마디에 우서혁이 불쾌한 낯으로 제 어깨에 있는 박건호의 팔을 쳐 냈다.
“하루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괜찮습니다.”
“눈치 없군. 우서혁 비서.”
“그쪽보다는 많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눈치가 있었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끼지 않았겠지.”
“눈치가 있으니까 끼는 겁니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물 흐르듯 싸우기 시작한 박건호와 우서혁 사이에 끼어들며 물었다.
“그럼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 목적지가 어디지?”
“C12 구역입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며 답하자, 잠시 우서혁과 시선을 맞추던 박건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C12 구역? 갑자기 그곳엔 왜 가겠다는 거지?”
“데려다만 주신다면서요? 이유를 물어보실 거면 그냥 혼자 가겠습니다.”
“이런. 내가 성급했군.”
성큼성큼 걸어와 뒤에서 어깨를 감싸 온 박건호가 달래듯 말했다.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거지? 난 환영이야.”
“놓으십시오.”
내게 찰싹 달라붙는 박건호를 억지로 떼어 낸 우서혁이 지친 기색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박건호 팀장의 말대로 한이결 씨는 길드 소속이 아니니, 마스터께 보고를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C12 구역은 그리 안전한 장소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안심할 수 있도록 자신 있게 웃자, 오히려 우서혁의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 차올랐다. 대체 왜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우리는 바로 차에 올라탔다. 낯익은 내부에 뒷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예전에 N23 구역 게이트에 갔을 때 탔던 차 맞습니까?”
“그래. 기억하고 있군.”
가볍게 답한 박건호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게이트에서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이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려갔었지. 기억하나, 한이결?”
“하하, 예….”
기억 안 나는데. 기절했었으니까. 대충 넘기며 창밖으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우서혁에게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2시간이 걸려 도착한 C12 구역은 예상대로 울퉁불퉁하고 정돈 안 된 골목길과 낡은 판잣집이 가득한 오래된 동네였다.
“그럼 갔다 올 테니까, 절대 따라오지 마세요.”
차에서 내려서 열린 조수석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우서혁과 박건호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래, 그래.”
“알겠습니다.”
차 핸들 위에 팔을 겹쳐 올린 채로 웃는 박건호와 보던 서류를 내려놓은 우서혁이 동시에 대답했다.
“…….”
어째 불안했지만 여기까지 태워다 줬으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하려던 말을 삼켜 내며 몸을 돌렸다.
“금방 오겠습니다.”
C12 구역으로 들어서는 계단 앞, 마치 미로처럼 얼기설기 엉켜 있는 판자촌을 보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일일이 발로 돌아다니면서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활용 범위가 넓은 바람 능력이 있는 것을 새삼 다행으로 여기며 경사진 계단 위로 몸을 날렸다.
서류에는 자세한 위치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어차피 꿈을 통해 이미 이곳을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불에 탄 흔적이 가장 심한 곳을 발견하고 곧장 내려와 주변을 둘러봤다.
끼익.
새까만 재가 잔뜩 묻어 지저분한 벽에 걸린 주소 판을 매만졌다. 3-17. 꿈에서 봤던 그 주소 판이 확실했다.
건물을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여러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벽에 손을 짚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달그락. 발끝에 차인 돌이 바닥을 굴렀다.
-여, 연아… 흑, 연아…….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로 바닥을 기던 한이결과, 그 앞에 쓰러져 있는 한이결의 동생. 눈앞에 펼쳐진 골목길 위로 꿈에서 봤던 장면이 선명하게 겹쳤다.
삐이이이―!
“으, 무슨….”
이명과 동시에 마치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강한 두통이 밀려왔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뒤틀리고 일그러졌다.
‘시발, 뭐야?’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쾅쾅 치고 들어오는 통증에 거칠어진 숨을 뱉어 내는데, 어디선가 짙은 탄내가 흘렀다.
“아…….”
뒤늦게 눈앞의 변화를 알아챈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뿌연 연기로 가득 차올라 있었고, 주변은 뜨거운 불과 피가 낭자했다. 꿈에서 봤던 광경과 굉장히 흡사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금방이라도 시들어 버릴 것처럼 가냘픈 목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분명 나는 이곳에 서 있는데, 눈앞에 또 다른 한이결이 보였다.
-도, 동생. 동생이라도… 제발…….
한이결이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에게 온 힘을 다해 빌었다. 천천히 얼굴을 들자, 뺨에 새빨간 피를 묻힌 채로 한이결을 응시하고 있는 천사연의 옆모습이 보였다.
건물을 태우며 타오르는 불의 뜨거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숨을 틀어막는 탄내와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섬뜩한 발소리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쳐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뚜벅. 꿈에서 봤던 그대로, 천사연이 한이결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검을 들어 올렸다. 정체불명의 피가 묻어 있는 검이 불빛에 번뜩였다.
키에에엑!
그대로 휘두른 검에 한이결을 덮치려던 몬스터의 몸통이 반절로 갈라졌다. 철퍽! 애벌레를 닮은 몬스터의 상반신이 아래로 툭 떨어지며 초록색 피를 쏟아 내자, 한이결이 공포 어린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 내는 천사연의 뒤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지루한 표정으로 한이결과 쓰러져 있는 동생을 한 차례 훑어본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힐러는?
-아직 몬스터가 많아 오지 못하고 아래에서 대기 중입니다.
-부상자다. 옮겨.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수행원 두 명이 한이결과 여동생을 각각 업었다. 그사이, 골목길에서 또 다른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동생을 업은 수행원에게 달려들던 몬스터가 천사연의 검에 머리가 잘려 나갔다.
벽에 기댄 채로 서 있는 내 옆으로 천사연이 지나쳤다. 멀어져 가는 천사연의 등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 뒤를 쫓아갔다.
구급차와 힐러가 대기 중인 곳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짙은 피 냄새에 몬스터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천사연은 계속 검을 휘두르며 속도가 늦어지지 않도록 도왔다.
“허억, 헉….”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떨렸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천사연과 한이결을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천사연 마스터!
-부상자다! 구급차로 이송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천사연 마스터!
바람에 흩날리는 화재 연기 너머에는 구급차와 함께 수많은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인터뷰 마이크를 들이미는 그들 사이로 낯익은 이가 뛰쳐나왔다.
-처, 천사연 마스터!
강승건이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어쩐지 급격히 흐려지는 시야에 거칠게 눈을 비볐다.
-어, 어때? 상황은? 괜찮은 거 맞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승건이 사색이 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가 보지 그래.
무성의한 천사연의 대답에 강승건의 입가가 불쾌하게 비틀렸지만, 뒤로 보이는 기자들을 의식하며 억지로 웃었다.
-무, 물론 가 봐야지. 그 전에….
천사연을 향해 성큼 다가선 강승건이 목소리를 낮췄다.
-천사연 마스터. 알겠지만 이번 일은 나는 몰랐던 거야. 어? 관리 본부에 말 좀 잘 해 줘!
-…….
-길드 측에서는 일정을 제대로 잡아 뒀는데, 클리어팀이 처리를…!
-거짓말.
열심히 내뱉어진 변명이 중간에 뚝 끊어졌다. 천사연과 강승건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향했다.
-거짓말이야.
수행원에게 업힌 채로 겨우 숨만 내쉬던 한이결이 일그러진 얼굴로 사납게 소리쳤다.
-일주일 전에 왔다가 그냥 갔잖아!
-무, 무슨…….
-이딴 곳은 관리 안 해도 된다면서, 으… 귀찮으니까 미루자고 말하는 거 다 들었다고!
헐떡이면서도 끝까지 말을 해낸 한이결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피로 질척하게 젖은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그 외침에 강승건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고,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또다시 가득 퍼졌다.
-그게 진짜입니까?
-맞아. 저 남자… 저도 본 적 있어요.
-나, 나도 본 것 같아!
-쓰레기 새끼!
-저 말이 사실일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일단 특종으로 내보내!
-강승건 마스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이결의 발언에 치료받고 있던 부상자들과 기자들이 웅성거리며 한마디씩 뱉어 내자, 주위가 금세 시끄러워졌다. 입술을 깨물며 기자와 피해자들의 원성을 듣던 강승건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로 고함질렀다.
-시발, 무슨 개소리야! 저딴 애새끼 말을 믿는 거야, 지금?
-강승건 마스터!
-이거 놔!
분노한 강승건이 능력을 쓰자 바닥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기자들 사이로 천사연의 수행원이 달려와 강승건의 두 팔을 붙잡았다.
한심한 눈빛으로 발악하는 강승건을 바라보던 천사연이 한이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표독스럽게 강승건을 노려보던 한이결의 갈색 눈동자와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삐이이이―!
“헉… 으…….”
그 순간, 또다시 이명이 들려오고 모든 게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강승건과 한이결, 천사연을 보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뱉어 냈다.
“…이결! 한이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한이결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리는 내 몸을 누군가 강하게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