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정말 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걱정이 어린 물음에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반말해 주세요.]
“괜찮아.”
자꾸 깜빡하네. 권정한의 부탁에 괜히 머쓱해져 목덜미를 쓸었다.
“오늘 권지훈 마스터께서 부산으로 내려가신다며. 마중 정도는 해야지. 너 다쳤다고 서울까지 올라오셨는데.”
[마중 안 가도 이해하실 거예요. 사실, 지훈 형에게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경호를 한다고 제대로 혼났거든요.]
“그, 그래?”
병실에서 봤을 때는 사이좋아 보였는데.
“혼까지 날 정도인가?”
권정한도 결국은 천사연에게 이용당한 사람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원인은 사마엘이고.
[오냐오냐 자라서 세상이 쉬워 보이냐고 하던데요?]
예상보다 더 신랄한 말에 헛숨을 들이켰다. 기분 상할 만할 텐데도 권정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밝았다.
마땅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권정한이 봄날의 바람 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맞는 말이죠. 제가 배움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번처럼 무력감을 느낀 적도 처음이라서 신선하기도 해요.]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어.”
[고마워요, 형.]
내 위로에 깔끔하게 대답한 권정한이 말을 돌렸다.
[그럼 오늘은 방에 들르지 않을게요. 형도 가끔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래.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
[저는 낮에 마스터와 개인 면담이 잡혀 있어서 어차피 길드에 들러야 하니까, 무슨 일 생기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천사연 마스터하고 개인 면담? 갑자기?”
[일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마스터께도 당연히 혼나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 경호였으니까.]
누구한테 뭘 해야 한다고?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럼 푹 쉬세요, 형.]
“어? 응. 그래.”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 잠시 넋을 놓았다. 천사연에게 혼나야 한다니. 그런 끔찍한….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레퀴엠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새삼 다짐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이 시간에 혼자 있는 것은 아주 간만이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김우진이나 민아린, 권정한이 방을 찾아왔었으니까.
‘C12 구역.’
셔츠를 걸쳐 입으며 김우진에게 받았던 서류를 다시 펼쳐 들었다.
C12 구역 게이트 사건 이후, 블런 길드가 C 구역 서브 관리권을 레퀴엠에게 넘기고 여러 차례 시위가 벌어졌다.
더군다나 한이결이 천사연과 강승건을 처음 마주쳤을 확률이 큰 장소이니 반드시 가 봐야 했다.
‘정보로는 짐작하는 데 한계가 있기도 하고.’
핸드폰으로 위치를 검색했다.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거리였다. 평소라면 택시를 타고 갔겠지만, 편하게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니 좀 멀어도 날아가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쉽지, 차 타고 2시간 거리를 어느 세월에 가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때 운전할 수 있는 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어차피 한이결은 면허가 없으니 있어 봤자인가.
“하아….”
서류를 협탁 서랍에 넣어 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해 봤자 소용없는 문제이니, 이 시간에 차라리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았다.
창문으로 나가기 위해 신발을 챙기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혼자 밖에 나가려고 일부러 아무도 오지 말라고 일러둔 터라 노크 소리가 영 달갑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외치자, 현관문 너머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서혁입니다.”
우서혁? 나는 놀라서 급히 문을 열었다.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한이결 씨.”
“아, 음. 아닙니다.”
“다친 곳은 잘 치료받으신 것 같군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우서혁의 훤칠한 얼굴을 마주하자 미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눈썹 끝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젓는 내게 우서혁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갖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권정한 능력자를 계속 경호로 채용하겠다는 확인 서류입니다. 마스터께서 한이결 씨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명을 주셔서 들렀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또 뭐라고. 일 때문에 온 거였구나. 어색하게 웃으며 내용을 대충 훑어보는데, 우서혁이 잠시간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사실, 명령이 아니더라도 직접 전해 주려고 했습니다.”
“예?”
“한이결 씨. 정말로 권정한 경호를 계속 곁에 두실 겁니까?”
무슨 뜻으로 묻는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답하지 못하자, 그가 반듯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경호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저는 당신이 좀 더 제대로 된 경호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서류를 반으로 접으며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권정한이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쉽지 않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지, 권정한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권정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안일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죠. 범인의 능력을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까요. 더군다나 저는.”
“범인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까?”
내 말을 끊어 낸 우서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더 우려되는군요. 한이결 씨는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경향이 있으시니.”
“음…….”
어째 사고뭉치로 찍힌 기분이라 입가를 쓸어 만지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권정한은 괜찮을 거예요. 그 친구 능력이 워낙 쓸 만하기도 하고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지키는 데 필요한 능력이지.
단호하게 말하자, 나를 설득시키는 것을 포기한 듯 우서혁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경호이니 제가 더 관여할 수 없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어차피 이곳을 잠시간 떠날 계획이라 경호에 대한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내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우서혁의 마음은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런 내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우서혁과 시선을 맞췄다. 다가가기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의 서늘한 눈매가 지금은 굉장히 친숙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우서혁이 아주 느리게, 입꼬리 끝을 올렸다.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내심 속으로 놀라는데, 순식간에 다시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온 우서혁이 말했다.
“한이결 씨.”
“예?”
우서혁이 날카로운 질문과 함께 내 옷차림을 한번 훑어봤다.
“혹시 어디 나가십니까?”
아차. 어느 누가 봐도 외출하기 직전의 복장이었지만 일단은 모른 척했다.
“아뇨?”
눈을 접어 웃으며 뻔뻔하게 대답하자, 그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쁘지 않으세요, 우서혁 씨? 이만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이결 씨.”
그의 소매를 붙잡아 은근슬쩍 현관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리 범인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혼자 외출은 위험합니다.”
“에이. 외출이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아직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좀 더 휴식을 취하셔야….”
우서혁은 내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따라오면서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우서혁을 내쫓기 위해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데, 미처 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읏?!”
“어이쿠.”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내 몸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내게 손을 뻗었던 우서혁은 날 안은 상대를 발견하고는 눈가를 구겼다.
“조심해야지.”
“박건호 팀장님.”
웬일로 하얀 정장 셔츠를 입고 있는 박건호였다. 나와 우서혁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내 허리를 은근슬쩍 끌어당겨 안으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좀 어떤가, 한이결?”
“괜찮습니다. 팀장님은 어쩐 일로 여기를?”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슬슬 나가 봐야 하는데 우서혁에 이어 박건호까지 방을 찾아오다니. 이렇게 운이 나쁠 수가 있나 싶다.
“어쩐 일이긴. 붙잡는 나를 그렇게 매정히 떠나 놓고 연락조차 없으니 안달 나서 말이지.”
그제야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박건호도 다른 사람만큼이나 놀랐을 텐데. 연락 한 번 정도는 해 줄 걸 그랬나.
무신경했던 자신을 탓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서.”
“뭐, 그럴 것 같긴 했지. 사과는 할 필요 없다. 다친 곳은 제대로 치료했는지 확인하려고 온 거니까.”
“확인이요?”
질문에 박건호가 아닌 우서혁이 대답했다.
“마스터께서 한이결 씨와 에드워드 제작자를 길드로 데려오셨을 때, 저와 박건호 팀장이 마중 나갔었습니다.”
“그랬습니까?”
“한이결 씨는 심한 부상으로 기절하신 상태였습니다.”
“아주 너덜너덜하던데. 그 꼴을 보고 나니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
우서혁의 차분한 설명을 박건호가 가볍게 가로채며 내게 윙크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빨리 만나러 오려고 했는데, 마스터가 반성문을 쓰라고 하도 닦달하는 바람에. 오늘 겨우 다 써서 풀려난 참이지.”
“…….”
반성문이라는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학교도 아니고, 박건호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고? 설마 권정한도 불러 놓고 그런 거나 쓰게 하는 건 아니겠지? 천사연의 행동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천사연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데, 우서혁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언제까지 안고 있을 셈입니까? 그만 놓으십시오. 박건호 팀장.”
“아.”
그제야 아직도 내 허리를 안고 있는 박건호의 팔이 느껴졌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라울 정도였다. 질색하며 급히 팔을 쳐 내자, 박건호가 킥킥거리며 물러섰다.
“재미없기는. 말 안 했으면 계속 몰랐을 텐데.”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시죠.”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문밖을 가리켰지만, 박건호는 내 요구를 들은 척도 안 하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싫은데?”
“박건호 팀장님.”
“나 보내 놓고 우서혁 비서랑 뭐 하려고?”
하다 하다 별소리를 다 듣겠네.
“하긴 뭘 합니까? 두 분 다 나가 주세요.”
“안 됩니다.”
“우리 다 보내 놓고 혼자서 뭐 하려고?”
날 가운데 끼고 앞뒤로 서 있던 우서혁과 박건호가 맞춘 듯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째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박건호의 표정에 무심코 뒷걸음질 치려던 나는 뒤에 와 닿는 우서혁의 가슴에 멈춰 섰다.
“혼자 외출하시는 건 위험합니다, 한이결 씨.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오, 외출이라. 범인의 능력이 안 통하니까 이제 막 행동하겠다는 건가?”
“…….”
젠장. 둘 다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서.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