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김우진이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외출복과 신발을 신고 침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맑은 하늘에 달이 노랗게 빛나고, 아래로 자동차 소음과 야경이 넓게 펼쳐졌다.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호텔 옆 골목으로 날아가자, 주차된 차 옆에 서 있는 하태헌이 보였다. 항상 차 안에서 기다리더니… 오늘은 왜 밖에 나와 있지?
“한이결.”
공중에 떠 있는 나를 발견한 하태헌이 아주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렸다. 그 모습에 어째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하태헌 씨.”
하태헌이 내 허리를 붙잡고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하태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몸조심해서 다녀온 거 맞습니까?”
“그래.”
찬찬히 눈앞에 보이는 하태헌의 모습을 살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피부가 살짝 거칠어진 것을 제외하면 이전에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한이결, 너는.”
“예?”
“별일 없었나?”
내심 안도하고 있다가 이어지는 질문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음, 어. 그게…….”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자 하태헌이 날렵한 눈썹을 꿈틀거렸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내 행동을 귀신같이 알아챈 하태헌이 허리를 붙잡은 두 손에 힘을 줬다.
“윽!”
“한이결.”
마치 아이를 혼내는 듯한 엄한 목소리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아릿한 허리의 감각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는 내게 하태헌이 느릿느릿 말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대화가 더 길어질 것 같은데.”
“하, 하하….”
“바로 출발하지.”
하태헌이 나를 차 안에 휙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조수석에 앉게 된 나는 찍소리도 못 하고 그대로 차에 실려 하태헌의 집으로 향했다.
***
하태헌의 집에 도착한 나는 얌전히 거실 소파에 몸을 붙였다.
‘여기가 익숙하게 느껴질 줄이야.’
하태헌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부터 열었다. 와인에 이어 우유까지 얻어먹었던 지난 기억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에도 뭔가를 주려고 그러나?
“먹어라.”
하태헌이 건넨 것은 투명한 그릇에 한가득 담겨 있는 생딸기였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받아 든 그릇을 무릎 위에 올려 두며 하태헌을 바라봤다.
“먹어.”
“…….”
별로 배 안 고픈데…. 하지만 그렇게 말대꾸할 용기는 없었다. 꼭지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딸기를 하나 입에 넣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이번에도 다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해라.”
“으음.”
“내가 중국에 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질문을 들으니 먹던 딸기가 목에 턱 막혔다. 작게 콜록거리는 나를 향해 하태헌이 이어 말했다.
“중간에 연락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태헌이 불신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이건 좀 억울한데.
“일이 좀 있었습니다.”
설명해 주려고 마음먹은 것을 알아챈 하태헌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혀로 마른 입술을 한번 훑었다.
“절 노리고 있던 정신 지배 능력자가 접근해 왔습니다.”
“뭐?”
앗. 너무 바로 본론부터 꺼냈나?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하태헌의 반응에 급히 덧붙였다.
“그, 그런데 잘 해결됐어요!”
“하나도 놓치지 말고. 모조리 설명해, 한이결.”
뒤늦게 웃어 봤지만 역시 통할 리가 없었다. 짓씹듯 뱉어 낸 하태헌의 말에 딸기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 두며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클로에 부마스터에게 어린 동생이 있습니다. 제작자고, 제가 일전에 신세를 졌던 사람입니다.”
하태헌이 이해할 수 있게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드워드와 권정한을 살리기 위해 사마엘을 따라갔고, 천사연이 구하러 올 때까지 다행히 잘 버텨 냈다고 말하며 가장 중요한 사실을 꺼냈다.
“제게는 사마엘의 정신 지배 능력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건가?”
“확실합니다. 사마엘이 본인 입으로 말했어요. A급이 확실한데도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물론… 그래도 위험한 건 여전합니다.”
“그렇겠군. 이번 일처럼 타인을 이용할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으니까.”
“맞습니다.”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말을 해도 될까. 내가 망설이자 하태헌은 재촉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자면요.”
눈을 감자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권정한과, 단검에 베여 피가 흐르는 에드워드의 목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뿐이 아니었다. 곁에 머무는 이들이 나 때문에 다치고 피를 흘리는 모습은 몇 번이고 있었다.
“사마엘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 상대가 제가 아는 사람만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
“생판 모르는 남이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으니까.”
죽여서라도.
“오히려 네 주변인이 방해된다는 거군.”
“네.”
나는 얼굴을 들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태헌 씨. 계약을 지켜 주세요.”
“계약?”
“저는 예언자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 말에 하태헌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만나셨잖아요.”
애초에 만나지 못했으면 얘기가 여기까지 길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확신을 담아 재촉하자, 하태헌이 답답한 숨을 길게 내쉬며 소파에 등을 붙이고 말했다.
“말해 주면?”
“하태헌 씨.”
“예언자를 만나러 갈 건가?”
생각 못 한 질문에 눈가를 찌푸렸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저는.”
“방금 물어본 건 계약과 상관없다. 이건 그저….”
하태헌이 말을 끝맺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그와 내 사이에 침묵이 길어지자, 버티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그저?”
“그저, 친구 사이에서 흔히 하는 걱정이지.”
친구? 잔뜩 경계하던 나는 친구라는 단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친구…요?”
나랑 하태헌이? 주인공이랑 내가 친구라고?
“제가 어떻게 하태헌 씨와 친구가 됩니까?”
당황스러운 마음에 말투가 마치 따지는 것처럼 튀어 나갔다. 하지만 하태헌은 별로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저를 믿으세요?”
나는 하태헌을 이전부터 믿어 왔지만, 하태헌은 달랐다. 물론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행동들은 누가 봐도 수상한 데다, 하태헌은 성격상 남을 쉽게 믿지 않으니까.
내 예상대로 하태헌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림자가 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린 하태헌이 곧 나를 바라봤다.
“믿어.”
오랫동안 고민하던 태도와 달리 나온 대답은 단호했다. 덕분에 할 말이 없어진 것은 나였다. 지금까지 잘만 대화했으면서, 갑자기 하태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
걷잡을 수 없이 얼굴로 피가 몰렸다. 보지 않아도 목과 얼굴이 엄청나게 붉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며 손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한이결.”
“크흠. 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묘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하태헌이 멈췄던 말을 이었다.
“굴업도 섬 게이트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나? 내가 널 믿는다면 솔직하게 대답하겠다고 했었지.”
몸에 열이 올라서 그런가. 갑자기 엄청 더워졌다. 티셔츠의 목 부근을 붙잡아 펄럭이며 열을 식혔다.
“다시 묻지. 예언자를 만나러 갈 건가?”
“…네. 그러니까 정보를 모으는 거죠.”
최대한 냉정하게 대답했지만 어째 어린애의 투덜거림처럼 들렸다.
“만나서 뭘 하려는 거지?”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뜨끈뜨끈한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제 말해 주세요, 하태헌 씨. 예언자를 어디서 만났습니까?”
“…….”
하태헌의 반듯한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나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 예언자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
막 새벽 5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나는 거실과 이어진 테라스 창문을 열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바래다주지.”
“아닙니다.”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나부꼈다. 나처럼 바람에 앞머리가 흔들리는 하태헌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날씨도 좋으니 날아가겠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있고요.”
테라스 난간 위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함께 D8 구역으로 코트를 얻으러 갔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바람에 걸치고 있던 셔츠가 펄럭거렸다. 달빛이 비친 하태헌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제 목적은 그때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천사연에게서 벗어나는 것?”
“벗어나서, 죽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천사연 곁에 있으면 죽는다는 건가?”
“아무래도 더 위험하기는 하죠.”
소설 ‘어비스’에서 한이결은 천사연을 지키고 대신 죽는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죽는지는 알 수 없다. 한이결의 죽음은 주인공인 하태헌의 삶과 큰 연관이 없었으니까. 죽었다 해도 하루만 지나면 잊힐 정도로 존재감 없는 하찮은 악역. 딱 그 정도였지.
지금은 소설 내용과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다. 천사연이 위험한 상대인 것은 여전하니까. 더는 휘둘리고 싶지도 않고.
“예언자를 만나러 직접 가겠다면, 나도 따라가겠다.”
“예?”
“핸드폰 하나 마음대로 만들지도 못하면서 중국은 어떻게 가겠다는 거지? 천사연 몰래 떠나려던 것 아닌가?”
“그렇긴 한데요….”
본래 계획은 클로에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급히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계산기를 두드린 뒤에 미소를 지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서, 천사연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이려면 클로에보다 하태헌이 더 믿을 만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을 하태헌이 해결해 준다면 클로에의 힘은 다른 때 빌려 쓸 수 있다.
‘나쁘지 않은데.’
작은 기회 하나라도 소중한 상황이었다.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하태헌 씨를 믿어 보죠.”
“언제 갈 거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 당장 떠나고 싶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이틀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알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운을 사용하자 몸이 둥실 떠올랐다.
“일정은 괜찮으신 겁니까?”
“한동안 휴가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제때 연락이나 해.”
“연락은 처음에 주신 핸드폰으로 하겠습니다.”
하태헌이 내민 손을 붙잡고 천천히 테라스 밖으로 움직였다. 멀어지는 거리에 따라 하태헌과 맞잡은 내 손이 점점 느슨해졌다.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하태헌 씨.”
“그래.”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하태헌의 손을 놓으며 몸을 돌렸다. 새벽을 맞이하기 직전의 가장 어두워진 하늘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