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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33)화 (133/394)

133화

34. 확인 단계 

본래 한 달여간 한국에 있을 예정이었던 클로에는 에드워드와 함께 아침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비행기에 타기 전에 내게 전화한 클로에는 미국에서 사용하는 번호를 따로 알려 주며 범인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 메신저로 연락하겠다고 말해 주었다.

[꼭 다시 만나요! 한이결 씨!]

에드워드가 밝은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 왔다.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에드워드 씨.”

통화가 끝나자, 때마침 나갔던 김우진이 돌아왔다. 손에는 이전에 게이트 정보를 받았을 때처럼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여기.”

내 앞으로 걸어온 김우진이 서류를 내게 넘기고는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었다.

“고마워.”

소파에 앉아 봉투 입구를 막아 둔 테이프를 떼어 냈다. 오늘은 방에 김우진 말고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김우진도 웬일로 분신을 꺼내지 않고 내 옆에 얌전히 앉았다.

“한이결, 네가 정리해 준 내용도 아까 전달해 뒀어. 하이드가 진전이 있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대.”

김우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마엘을 직접 만나면서 얻어 낸 정보를 김우진에게 하나도 숨김없이 말해 줬다. 능력을 발동할 때는 손가락을 튕기고, 검은 가면을 쓴 사람들을 부리며, 공간 이동이나 셔터 같은 구하기 힘든 아이템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도.

“자기도 양심이 있으면 이번에는 뭐라도 가지고 오겠지.”

“너무 그러지 마.”

시큰둥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김우진의 새하얀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일부러 시간 내서 도와주는 거잖아.”

“……그.”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던 김우진은 몇 번 눈만 깜빡이더니 슬쩍 잡힌 손목을 빼냈다. 내게서 시선을 돌려 앞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김우진의 귀가 유난히 붉었다.

얘가 또 정신을 못 차리네.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사마엘과 인형술사 쪽은 어려울 만하지. 인형술사의 이름도 빨리 알아내야 하는데.”

주변이 계속 위협받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정보를 얻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밝혀진다면 더 좋고.

머릿속으로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며 서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정장을 입은 강승건의 증명사진과 함께 개인 정보가 쭉 나열되어 있었다. 사진에 찍힌 강승건은 마지막으로 본 모습보다 좀 더 멀쩡했다.

강승건. 블런 길드 마스터. 32세. 강철우 의원의 외아들.

스스로 길드를 세우고 마스터 자리에 앉은 천사연이나 이주하, 홍시아와는 다르게, 블런 길드 마스터 자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블런 길드의 이전 마스터는 이승우라는 S급 능력자였다.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군.’

강승건이 잡혀 들어가 정신 치료를 받는 현 상황에, 마스터 자리를 차지할 다음 인물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능력자였다. 단순히 평가가 좋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나.

당사자는 현재 제이나 길드의 팀장 자리가 꽤 만족스러워서 거절하고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부분은 강승건이 이승우에게서 마스터 자리를 뺏어 오면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승우가 맡았던 2017년까지 블런 길드는 별다른 문제 없이 무난하고 평범한 길드였다. 오히려 수익 부분이나 전체적인 평가가 제이나보다 높았다. 이랬던 블런 길드는 2018년 3월, 강승건이 마스터 직에 오르면서 상황이 완벽하게 달라졌다.

2018년 6월을 기점으로 얼마 전에 있던 강남 사건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양손으로 세기 어려울 만큼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직원 폭행, 기자 폭행, 일반인 폭행은 기본이고 게이트 관리 소홀이나 길드 마스터 간의 막말 사건도 있었다.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같이 서류를 보던 김우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쓰레기 새끼.”

“좀 심하긴 하네.”

가볍게 대답하며 나열된 일들을 차분하게 훑어봤다. 강승건과 한이결이 만난 시점을 알지 못하니 아예 최근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편이 나았다.

“강남 사건.”

손가락으로 글씨를 매만지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내 손이 멈춘 것은 C13 구역 게이트 폭발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몰래 하태헌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다. 그때, 이 방에서 천사연을 만났고… 그를 따라 나갔었지. 게이트 이상 현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마치 비디오를 되감아 재생하듯, 그때 겪었던 모든 것이 세세하게 떠올랐다.

“한이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류만 멍하니 바라보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김우진이 어깨를 붙잡았지만, 기억은 끊기지 않고 계속됐다.

-이봐, 천사연 마스터. 이번에는 나도 정말 억울해!

강승건이 땀을 흘리며 천사연에게 변명했다. 그렇게 천사연과 대화를 시작하고….

-강승건 마스터.

천사연이 강승건을 몰아세웠다.

-C12 구역 사건도 제대로 정리 못 한 이 시점에서 C13 구역까지 터졌으니, 이번에야말로 본부의 징계를 피하기 힘들겠어.

C12 구역. 급히 손가락을 쭉 내렸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10월 12일, C12 구역 게이트가 터졌다. 급히 길드 관리 본부와 주변 길드에서 능력자들이 파견됐고, 그중에는 천사연 마스터와 레퀴엠 직원들도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며 불현듯 꿈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짙은 가스 냄새와 타오르는 불. 좁은 골목마다 번진 비명과 경사진 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아이. 나는 무심코 꿈에서 다쳤던 옆구리를 매만졌다.

-너지? 너 맞지? 시발, 그때. 그 냄새 나는 판자촌!

강승건이 말한 판자촌과 내가 꿈에서 본 장소가 일치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지?

“…김우진.”

“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김우진에게 물었다.

“나를 언제 만났어?”

“언제… 만났냐니?”

“한이결. 제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던 김우진이 겨우 대답했다.

“11월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 안 나. 10월이나 11월이었을 거야.”

그렇다면 10월 말이나 11월 초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10월 12일에 C12 구역 게이트가 터졌고, 그게 한이결과 천사연을 만나게 된 계기라면…….

“한이결, 잠깐만.”

김우진이 내 어깨를 붙잡아 억지로 돌려세우며 천천히 얼굴을 살폈다.

“김우진?”

“방금, 잠깐이지만 너 눈동자가 검게 변했던 것 같은데.”

녀석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착각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린 김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뭘 보고 그렇게 놀란 건진 모르겠지만 좀 진정해. 너 지금 얼굴도 너무 창백하고 식은땀도 흐르잖아.”

“식은땀?”

반사적으로 이마를 만진 나는 그제야 맺힌 땀을 알아챘다. 그뿐만 아니라 점차 두통이 심해지고 몸이 급격하게 지쳤다. 마치 온 힘을 다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괜찮아?”

“괜찮기는 한데….”

축 늘어지는 나를 품에 안은 김우진이 서류를 가져갔다.

“아직 덜 봤어.”

“이 상태로 어떻게 더 봐?”

서류를 테이블에 밀어 둔 김우진이 나를 안은 상태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워 김우진을 올려다봤다. 그가 양팔 사이에 나를 가두며 달래듯 말했다.

“일단 쉬어. 급할 이유 없잖아.”

“으음.”

앓는 소리를 흘리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확실히 누우니까 좀 편하긴 하네.

“내일 C12 구역을 가 봐야겠어.”

“같이 가.”

그곳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김우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안 돼.”

“왜?”

“사마엘이 또 나타날 수 있어. 널 데려가면 상황이 더 복잡해져. 혼자가 도망치기도 편하고.”

“하지만.”

“그리고 너 벌써 휴가를 이틀이나 썼잖아. 내일은 훈련하러 가야지.”

마지막 말에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휴가를 삼 일 연달아 쓸 수는 없는지, 눈썹 끄트머리를 내리며 잔뜩 시무룩해졌다.

“정말 괜찮겠어?”

“그래.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거긴 왜 가려는 건데?”

“…….”

이번에는 내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 이번 일은.”

“알겠어.”

말을 막아 낸 김우진이 나를 다시 눕혔다. 털썩, 다시 소파에 눕혀진 나는 지나치게 가까운 김우진과의 거리에 눈을 크게 떴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상체를 바싹 붙여 오는 김우진의 행동에 자세도 좀 불편했다.

“……김우진?”

코앞에 보이는 김우진의 번듯한 얼굴이 영 부담스러웠다. 무언가 갈등하는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던 김우진이 끝내 포기하듯 내 품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김우진의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는데, 녀석이 뒤늦게 웅얼거렸다.

“알겠으니까, 말하기 싫으면 억지로 하지 마.”

“말하기 싫은 건 아니고.”

“뭐가 됐든 나는 네 옆에 있을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처량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는 애원에 가까웠다. 조심스럽게 김우진의 등을 다독였다.

“김우진. 왜 그래?”

갑자기 우울해 보이는 게 영 이상했다. 뭔가 커다란 실패를 겪은 사람 같기도 하고. 걱정스러워서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내게 완전 찰싹 달라붙어 누운 김우진을 들어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을 하고서도 한참이나 내게 얼굴을 묻고 있던 김우진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겨우 드러난 녀석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든 상태로, 어쩐지 서러운 기운까지 느껴졌다.

“나, 그… 주방에 좀. 마실 거라도 가져올게.”

“그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김우진이 주방으로 걸어갔다. 누워 있느라 머리가 살짝 뻗친 김우진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미간을 긁적였다.

‘요즘 힘든 일이라도 있나? 권정한이 나 없을 때 괴롭히기라도 한 거 아니야?’

내버려 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워낙 예민해서 함부로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군가 싶어 보니 놀랍게도 하태헌의 전화였다.

“하태헌 씨!”

간만의 전화에 반가움이 차올라 재빨리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내 부름에 하태헌이 낮은 음성으로 답해 왔다.

[한이결. 어디지?]

“저 레퀴엠 길드입니다. 중국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하태헌은 곧바로 이어 말했다.

[할 얘기가 많으니 오늘 밤에 만나지.]

“오늘이요?”

어딘가 여유가 없어 보이는 하태헌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몇 시쯤에요?”

[편한 대로 해. 다만, 빨리 볼수록 좋겠군.]

“그럼 정각쯤에 괜찮으십니까?”

[알겠다. 그럼 호텔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네.”

통화를 끝내자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하태헌의 반응을 보건대, 아무래도 중국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듯하다.

하태헌을 만날 때마다 매번 긴장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심했다.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도 벌써 초조함이 밀려왔다.

‘서류도 마저 봐야 하는데.’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피곤한 숨을 내쉬다가, 한결 나은 안색으로 주방을 나오는 김우진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흔들리는 감정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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