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이템을 입고 있던 후드 집업 주머니에 챙겨 넣고 응접실을 나오자, 마침 피아노 모양의 오르골을 보며 민아린과 대화를 나누던 클로에가 뒤를 돌아봤다.
“이야기는 잘 마무리했나요?”
클로에가 곧 내 옆에 있는 에드워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에디. 표정이 밝은 걸 보니 뜻대로 잘 풀렸나 보구나.”
“네에.”
내게 아이템을 주고 싶다는 에드워드의 의견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클로에가 장난기 어린 물음을 던졌다. 에드워드가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이결 능력자.”
우아하게 걸어와 내 앞에 선 클로에가 곱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왔다.
“에디가 아이템을 준 것처럼 저도 당신에게 보답할게요. 지금 이 순간부터, 아테나 길드 부마스터의 명예를 걸고 당신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잠시만요. 전…….”
“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죠?”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는 것처럼 클로에가 내 입을 막으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우리 에디와 당신을 납치한 그 범인에게 저도 빚이 있으니까요. 그자를 잡기 위해서, 꼭 돕고 싶군요. 이건 부탁 외에 제 사적인 감정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클로에가 살짝 낮은 음성으로 이어 말했다.
“길드로 돌아가면 범인에 대해 알아볼게요. 괜찮은 정보가 있으면 전해 주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클로에 부마스터.”
클로에의 심정을 이해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늘어나는 거니,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 대답에 흡족한 반응을 보인 클로에가 손을 놔주며 우리에게 말했다.
“다들 오신 김에 저녁 먹고 갈래요? 여기 호텔 주방장 실력이 꽤 괜찮던데. 어때요?”
“음, 아닙니다. 저는 괜찮지만 민아린 씨와 김우진은 말없이 나온 거라서요.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아쉬워라.”
“…….”
가벼운 태도인 클로에와 달리 에드워드는 정말로 아쉬운지 눈썹 끝을 내리며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허리를 숙여 에드워드와 악수했다.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오래 있을게요, 에드워드 씨.”
“네, 네.”
에드워드가 활짝 웃으며 급히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에드워드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에드워드는 부끄러워할 뿐,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가요, 민아린 씨. 김우진. 가까이 와.”
신발을 손에 들고 창문을 열었다. 클로에와 각자 악수를 한 민아린과 김우진이 내게 다가왔다.
“창문을 통해 날아가다니. 바람 능력은 정말 로맨틱하네요.”
로맨틱? 그런 감상은 처음이라 눈동자만 굴리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몸을 매끄럽게 감싸는 바람에 따라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창밖으로 나가 공중에 뜬 상태로 신발을 신고, 손을 뻗어 민아린과 김우진을 붙잡았다.
“그럼 이만 가 볼… 클로에 부마스터?”
클로에와 에드워드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려다가 말을 멈추었다. 어딜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클로에의 눈동자에는 빛 가루가 반짝이고 있었다.
“한이결 능력자, 그…….”
“예?”
“…….”
굳은 표정으로 눈을 여러 번 깜빡이던 클로에가 이내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
“…아니, 아닙니다. 미안해요. 제가 뭔가 착각을 해서.”
“착각이요?”
“가세요, 한이결 능력자.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마음 같아서는 더 묻고 싶었지만, 클로에의 다소 강압적인 태도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민아린과 김우진도 느꼈는지, 호텔에서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민아린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반응을 보이신 걸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레퀴엠 길드로 향하면서 클로에가 갑자기 달라진 이유에 대해서 고민했다. 클로에의 눈동자에 감돌던 그 빛. 기운 감별 능력을 쓴 건가?
‘갑자기 능력을 쓴 것도 이상하지만, 직후에 그토록 당황하다니. 뭔가 문제가 있던 게 분명하군.’
그리고 그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것 같고.
“…한이결. 그 여자, 뭔가 수상해.”
레퀴엠 23층 침실 방. 민아린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김우진이 손을 놓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심해.”
입고 있던 외투를 벗는 민아린에게 잠깐 시선을 던진 김우진이 목소리 크기를 한껏 낮췄다.
“돕겠다고 했지만, 너보다 친한 사람은 따로 있잖아.”
“나도 알아.”
김우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조심할게. 고마워, 김우진.”
나를 응시하는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에는 따듯한 신뢰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내 대답에 입꼬리 끝을 끌어 올려 살짝 웃은 그가 속삭였다.
“내일쯤이면 하이드가 강승건의 정보를 갖고 연락을 해 올 거야. 그때 맞춰서 이번에 알아낸 사마엘에 대한 내용을 넘겨주자.”
“그래. 대단한 건 없지만… 네 말대로 하는 편이 낫겠지. 정리해서 줄게. 네가 전해 줘.”
“알겠어.”
“이결 씨, 우진 씨!”
나와 김우진의 대화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거실에 나가 있던 민아린의 부름이 들려왔다. 방을 나가자 현관에 서 있던 민아린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일이 남아서 먼저 내려가 볼게요.”
“그래요. 조심해서 가요, 민아린 씨.”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자, 민아린이 키득거리며 방을 나갔다.
“김우진. 너는 훈련 없어?”
“오늘 하루는 쉬겠다고 했어. 네 간호를 할 생각이었으니까.”
아직 훈련생인데 그래도 되나? 뭐, 어린애도 아니고 그 정도쯤은 혼자 잘하겠지. 콧잔등을 긁적이며 고민하다,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대표실 좀 갔다 올게.”
“대표실? 설마 마스터 뵈러 가는 거야?”
“어.”
안에 들어 있는 액세서리 함 덕분에 살짝 튀어나온 후드 집업 주머니를 쓸어 만지며 말했다.
“전해 줄 게 있어.”
***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경호원이 눈인사하며 문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십시오.”
“…….”
저번과 같은 상황에 나는 천사연이 경호원들에게 무슨 언질이라도 따로 해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다시 한번 들었다.
불편한 마음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대표실로 들어서니,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천사연이 정면에 보였다.
“흐음.”
문을 닫고 그곳에 등을 기대고 서자, 뒤늦게 고개를 든 천사연이 아주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내 귀한 협력자.”
“…그 말 좀 그만해.”
저번처럼 협력자 운운하며 놀리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고급 가죽 의자를 빙글 돌린 천사연도 몸을 일으켰다.
일단 오기는 했는데, 도통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뜸 아이템을 들이밀 수도 없고. 괜히 목을 만지며 머뭇거리는데, 천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왔군. 줄 게 있었는데.”
“어, 뭐?”
천사연이 편히 앉으라는 뜻으로 손을 한번 휘저으며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천사연이 앞서 같은 주제를 꺼내 주니 나야 좋았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후드 집업 주머니를 만졌다.
“나도 줄 게 있…….”
“여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사연이 새빨간 상자를 코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엉겁결에 받자, 옆에 선 천사연이 상체를 숙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선물 받은 건데, 내 취향은 영 아닌 터라 난감하던 참이었지.”
열어 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이는 천사연의 행동에 리본을 풀어 상자를 개봉하니, 고급스러운 모양새의 초콜릿이 드러났다.
“선물 받은 거라며?”
“무슨 문제라도?”
정말로 모르겠다는 어투에 입술을 깨물었다. 휘청이던 마음의 추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나는 다소 거칠게 초콜릿 뚜껑을 닫았다.
“왜 닫지?”
“안 먹어.”
천사연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물었다.
“그러니까 왜?”
오늘따라 묻는 것도 많네. 울컥 치솟는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누가 줬는지 알지도 못하는 걸 어떻게 먹냐? 그리고 초콜릿 별로 안 좋아해.”
“초콜릿에 뭐가 들었을지 걱정하는 건가? 나쁘지 않은 마음가짐이긴 하다만, 이건 안전해.”
“너나 많이 처드세요.”
역시 괜히 왔다. 아이템을 주는 것 말고도 할 얘기가 있었지만, 차라리 나중에 다시 오는 게 낫겠다.
곧장 몸을 일으키려는데, 차갑고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붙잡아 강한 힘으로 나를 내리눌렀다.
“무슨 짓이야?”
“단 간식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천사연이 옆에 앉으며 테이블에 놓인 초콜릿 상자를 손등으로 툭 쳐서 저 멀리 밀어냈다.
“그래서, 여길 온 용건이 뭐지?”
순식간에 심기가 언짢아진 천사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달라진 태도에 황당한 건 내 쪽이었다. 왜 또 이 지랄이야? 지금 기분 나빠할 쪽이 누군데.
“용건 없어.”
“나한테 줄 게 있다고 했던가.”
“…….”
뻔뻔한 새끼. 역시 알면서 물어본 거잖아. 천사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는지 참 궁금하군.”
“하아….”
목 끝까지 올라온 욕을 삼켜 내며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발뺌해 봤자 천사연이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고.
‘아, 모르겠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천사연을 노려보며 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초록색 벨벳으로 감싸진 액세서리 함을 건네받은 천사연이 그것을 마치 장난치듯 한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 봤다.
“에디가 만든 아이템이군.”
“그래.”
“네게 뭐라도 줄 거라 예상하긴 했지. 그 지옥에서 멀쩡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네 덕분이니까.”
“내 것이 아니야.”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어내린 나는 설명을 이었다.
“아니, 내가 받은 건 맞긴 한데… 모르겠다. 일단 열어 봐.”
개떡 같은 내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천사연이 액세서리 함을 열었다. 에드워드에게 받았을 때 봤던 붉은색 귀걸이가 전등 빛에 반짝였다.
“이 정도 기운이면… S급 아이템인가.”
“맞아. S급 회복 아이템이야.”
“그래서?”
달칵.
다시 액세서리 함을 닫은 천사연이 빙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나한테 자랑하려고 보여 주는 건 아닐 테고.”
“아니, 뭐….”
“한이결.”
천사연이 내 턱을 붙잡아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내 능력을 알고 있잖아.”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바로 알아챘다.
천사연의 능력, 혈화. 피를 흘릴수록 강해지는 그 힘의 특성상, 회복 아이템은 오히려 상극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니라 하루가 멀다고 다쳐 오는 너한테 더 유용한 아이템 같군.”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나도 천사연에게 이런 아이템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다시 시간을 돌려 에드워드를 만난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 선택은 변함없었다.
“받기 싫으면 그렇다고 말해. 이해하니까.”
회복 아이템이 아닌, 그의 능력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바랐다면 그런 종류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흘린 피의 양이 많을수록 강해지는 혈화 능력을 도와줄 그런 아이템을.
“그냥 나는 이걸 주고 싶었어.”
어쨌든 천사연이 나와 에드워드를 구하러 온 것도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많이 다쳤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말을 듣던 천사연이 곧 턱을 놔주었다. 살짝 얼얼해진 턱을 매만지는데, 아래로 내려온 천사연의 팔이 순식간에 내 허리를 낚아채 확 끌어당겼다.
“헉…!”
“좋아.”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가깝게 다가온 천사연의 얼굴에 숨을 들이켜자, 그가 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특별히 받아 주도록 하지.”
“어, 받아 줘서 존나 고맙네. 근데 허리는 좀 놓으면 좋겠는데.”
천사연이 만족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허리를 살살 쓰다듬어 왔다.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난 귓불을 안 뚫어서, 귀걸이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네?”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급히 천사연의 눈치를 살폈다.
“글쎄. 그거까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냐?”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 섭섭하게.”
불길함을 감지하고 급히 천사연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었지만, 그럴수록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강해졌다. 질색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천사연이 속삭였다.
“네가 해 줘. 응? 이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