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33. 마음이 담긴 선물
기절하듯이 자고 일어나니, 초조한 얼굴로 병실을 돌아다니는 김우진과 사과를 깎고 있는 민아린이 보였다.
아직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모르는 둘의 모습을 누운 채로 바라보며 우선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제때 약을 먹어서 그런지,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약….’
불현듯 지난밤 천사연이 내게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아무리 약을 먹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지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아, 젠장.’
계속 생각하고 있으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만하자. 그냥 단순히 환자한테 약을 먹였을 뿐이잖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조심히 상체를 일으켰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김우진과 민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달려왔다.
“한이결!”
“이결 씨!”
“좋은 아침.”
어색하게 웃으며 품에 안겨 오는 민아린을 마주 안아 줬다. 김우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걱정 많이 했어요.”
“전 괜찮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하자 민아린이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와 포옹을 끝내고 김우진에게 손짓했다.
“너도 이리 와, 김우진.”
내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김우진이 머뭇거리며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김우진을 민아린한테 했던 것처럼 힘줘서 끌어안았다.
나랑 마찬가지로 품에 들어온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은 김우진이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렸다.
“뭘 또 울고 그러냐.”
“…….”
김우진의 양어깨를 붙잡고 장난스럽게 타박하자, 김우진이 제법 매서운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민아린이 옆에서 웃으며 손수건을 김우진에게 건네줬다.
“다시, 는 못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겨우 울음을 멈춘 김우진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시무룩한 음성으로 이어 말했다.
“정신계 능력자니까…….”
“아.”
그제야 둘의 마음이 이해됐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민아린 씨.”
“네?”
“사실 범인의 능력이… 제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민아린과 김우진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찌푸린 민아린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결 씨. 정한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분명….”
“맞습니다. 권정한 씨의 감정 제어 능력이 통했었죠.”
“혹시 범인이 권정한 씨보다 등급이 낮을 가능성은요?”
“그건 아닐 겁니다. S급 강승건 마스터에게도 능력이 통했으니까요. 제가 느끼기에는 SS급입니다.”
S급인 권정한의 능력은 통했지만, SS급인 사마엘의 능력은 통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으음, 이런 경우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역시 그런가. 한숨을 삼켜 내며 생각을 정리했다.
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은 이미 두 차례나 겪어 본 상황이었다. 그때마다 곁에 천사연이 있었고.
‘천사연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성격도 나쁘고 수상한 점도 많은 놈이지만, 그만큼 남들보다 아는 게 많은 것은 확실했다. 물어본다 해서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 제가 범인의 능력에 당할 걱정은 접어 두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아닌 다른 분들이 더 위험하겠죠. 에드워드 씨처럼요.”
“이결 씨 주변에 있는 사람이 능력에 당하면… 이번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또 벌어질 수 있겠군요. 아니면 이결 씨를 공격할 수도 있고요.”
“네.”
민아린의 말에 공감하며 마지막으로 들었던 사마엘의 말을 떠올렸다.
-다음에 또 뵙죠, 한이결 능력자.
이번에는 운 좋게 도망쳤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사마엘도 더 철저하게 준비하겠지.
결국 달라진 것은 없었다. 사마엘이 나를 계속 노리는 이상, 경계심을 늦출 수 없다.
“민아린 씨.”
그렇지만, 일단 지금은 한숨 돌리는 정도는 해도 되겠지. 침대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권정한 씨는 어떻습니까?”
나와 에드워드가 떠나가고 민아린에게 바로 치료를 받았을 테지만, 그래도 걱정되긴 했다. 민아린이 살짝 미소 지었다.
“정한 씨도 병실에서 휴식 중이에요. 물론 건강은 무사히 회복했어요.”
“다행입니다.”
입고 있는 환자복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씻고 가 볼까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김우진, 너는?”
“갈게.”
“그럼요.”
대답이 곧장 돌아왔다. 나는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
권정한이 사용하고 있다는 병실로 가까이 다가가자,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남자 둘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문 앞에 서서 가볍게 노크하자,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한이결 능력자.”
문을 열어 준 이는 권정한이 아니었다. 잠시 멍하니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본 나는 곧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권지훈 마스터.”
“저를 기억하고 있군요. 오랜만입니다.”
“물론입니다.”
권정한의 사촌 형이자 사계 길드의 마스터, 권지훈이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나와 악수를 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정한이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거든요.”
“한이결 능력자님.”
권지훈의 안내에 따라 병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권정한이 밝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권정한 씨.”
“많이 걱정했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걱정했습니다.”
내 앞까지 단번에 걸어온 권정한이 눈썹 끝을 아래로 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호인데, 지켜 드리지 못하고…….”
“그런 말씀 마세요.”
어린 나이에 이런 험한 일을 겪게 만든 내가 더 미안했다. 쓰게 웃으며 권지훈을 돌아봤다.
“권지훈 마스터께도 사과 말씀 드립니다.”
“아닙니다.”
새 찻잔에 블랙커피를 따르고 각설탕을 세 개를 넣은 권지훈이 내게 잔을 건넸다.
“정한이는 한이결 능력자의 경호원입니다. 한이결 능력자를 제대로 지켜 내지 못했으니, 동생 잘못입니다.”
“맞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조심하겠습니다.”
굳은 목소리로 말한 권정한이 잠시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제게 앞으로도 경호를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를 더는 믿기 힘들다 하셔도 이해합니다. 그래도 저는 곁에서 계속 돕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호를 하겠다니…. 오히려 당장이라도 그만둘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을 겪었으니 두려울 게 당연했다. 권정한이 원한다 해도 보호자인 권지훈이 말릴 거라고 예상했고.
“하지만 권정한 씨. 이번에 겪었듯, 굉장히 위험합니다. 비슷한 일이 분명 또 일어날 겁니다.”
“그렇다면 더 자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새로 데려오는 것보다는 경험자인 제가 더 낫지 않을까요?”
“…….”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을 강하게 어필하는 권정한의 모습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맞는 말이긴 한데….
“한이결 능력자.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긴 합니다만, 괜찮다면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한이의 능력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권지훈의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났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나로서도 거절하기 힘들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권정한 씨. 경호를 맡겠다고 먼저 말해 주셔서. 저야 언제든 환영합니다.”
꾸며 낸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솔직히 욕심부리자면, 권정한의 능력이 탐났다. 그가 있으면 사마엘의 능력으로부터 주변이 조금은 안전해질 테니까.
긴장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던 권정한이 안도 어린 숨을 내쉬었다.
“근데 권정한 씨. 천사연 마스터는 별다른 말 없었습니까?”
내가 허락했다 한들, 천사연이 안 된다고 하면 의미 없을 텐데. 내 질문의 뜻을 곧장 알아챈 권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께서는 한이결 능력자님만 괜찮다고 하면 경호를 계속해도 상관없다고 답하셨어요.”
천사연답군.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민아린이 입가를 가리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럼 경호는 정한 씨가 계속 맡아 주시는 거죠? 잘됐네요!”
좋아하는 민아린과 달리 김우진은 여전히 시큰둥했지만, 크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름 잘 해결된 건가.
“한이결 능력자님.”
“예?”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데, 권정한이 나를 불렀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어딘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전부터 느꼈는데, 제게 말을 편히 해 주실 수 없나요?”
“말을 편하게요?”
지금도 편한데?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자, 권정한이 덧붙여 설명했다.
“제가 4살이나 어린데,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주셔서요. 저는 한이결 능력자님과 좀 더 친해지고 싶은데.”
“그, 그렇습니까? 그럼 음, 어떻게….”
부탁이라기보단 어딘가 요구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호했다. 당황하는 내게 권정한이 순진무구한 눈을 했다.
“반말해 주시면 안 되나요? 저는 이결 형이라고 부를게요.”
“딱히 상관은 없긴 한데요….”
“반말이요.”
“없긴 한데….”
권정한의 화법에 제대로 걸려든 나는 미처 고민해 보기도 전에 말을 놔 버리고 말았다. 얼떨결에 반말하니, 권정한은 활짝 웃었고 반대로 김우진은 얼굴을 왕창 일그러뜨렸다.
“혀, 형? 형이라니?”
경악하는 김우진에게 권정한이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 맞죠. 제가 더 어리니까.”
“그, 그래도 일로 만난 사이에서 무슨 형이라고 해? 아니, 합니까?”
“이결 형이 허락도 했는데 안 될 이유가 있나요? 김우진 선배님은 이결 형과 동갑이셔서 허락이 있어도 못 하시겠지만.”
명백하게 놀리는 말에 김우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금세 험악해진 공기에 민아린과 권지훈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을 했다.
“김우진 선배님도 형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왜 또 말리는 건 나 혼자냐고. 한숨을 내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해, 둘 다.”
“…….”
“네.”
김우진이 내 눈치를 살피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것에 비해, 권정한은 아무 잘못 없다는 양 냉큼 대답하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 뻔뻔한 태도에 슬쩍 권지훈을 돌아봤다.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권지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원래 저런 성격이라는 건가. 그전까지는 나름 숨긴 건가 보군.
‘경호를 계속 맡기는 것도, 말을 놓은 것도… 어째 걸려든 기분인데.’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을 해 봤자지만. 김우진의 등을 토닥여 주며 밀려오는 피로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