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눈앞으로 온몸이 금빛 털로 뒤덮인 새가 지나갔다.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리고, 시원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주변을 둘러보는 내 머리카락을 싱그러운 산바람이 흐트러뜨렸다.
“여긴….”
낯선 공간에 멀뚱히 서서 앞을 바라보는데, 뒤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야, 한이결.”
깜짝 놀라 급히 뒤를 돌아봤다. 흙과 초록빛 새싹으로 반절이 묻힌 커다란 돌 위,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많이 놀란 것 같구나.”
짙은 회색의 거친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짙은 그림자로 얼굴을 가린 그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와 함께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품위가 느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내가 궁금한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이 돌아왔다.
“아니면 이 장소가 궁금한가?”
알 수 없는 장소, 예측할 수 없는 인물.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도망치거나, 능력을 사용하는 대신 말했다.
“둘 다 알고 싶습니다.”
“그래. 답해 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
남자가 몸을 일으켜 땅으로 내려왔다. 회색 로브가 바람에 펄럭이고, 발걸음마다 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여긴 꿈속이야. 정확히는… 한이결. 네 꿈에 내가 찾아왔다.”
꿈? 지금 여기가 꿈속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지나치게 사실적이지.”
남자가 앞서 걸어가며 내게 손을 까딱였다. 잠시 망설이다 그를 뒤따랐다. 무성한 나뭇잎에 짙게 졌던 그늘이 점점 옅어지고, 새파란 하늘이 훤히 드러나는 초원이 눈앞에 드러났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시원한 바람에 풀이 흩날리고, 새하얀 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남자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오기 힘든 장소지.”
확실히 그렇네. 생각해 보면 언제나 이런 곳을 오고 싶었다. 갑갑하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편해지는 장소를.
알아내야 할 것을 다 알고 나면… 이런 곳을 찾아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앞으로의 일을 밀어 넣어 두고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들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란다. 그래도 이해는 한다. 너는 원치 않게 많은 것을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예정이니, 내가 와 볼 수밖에.”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상대방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가까이 섰다. 이상한 거적때기를 걸치고 있어서 몰랐는데, 키가 꽤 컸다.
“꿈이긴 해도 첫 만남인데, 간단한 선물 정도는 줘도 되겠지. 자.”
“……?”
남자가 창백한 손을 활짝 펴자, 둥그런 알사탕 두 개가 드러났다. 연하늘색 사탕과 검은 사탕.
“고르렴.”
“고르라고요?”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바라보자, 마치 새가 지저귀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린 남자가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네게 필요한 꿈을 꾸게 해 줄 거다. 사탕에 따라 볼 수 있는 게 다르니까, 신중하게 선택해.”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해도…….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연하늘색 사탕을 집어 들었다. 검은 사탕보다 이게 낫겠지.
“쓸데없는 걱정 그만하고 먹어. 어차피 이 꿈을 끝내려면 먹어야 한다.”
사탕을 든 채로 머뭇거리는 내게 단호하게 말한 남자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살피며 천천히 사탕을 입에 넣었다.
“아, 이런. 깜빡할 뻔했군. 한이결.”
쌉싸래한 맛과 함께 눈앞이 액체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뺨을 간질이던 시원한 바람도, 코끝으로 느껴지던 향긋한 풀 내음도 남자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네가 보낸 사람과는 잘 만났다. 곧 너에게 돌아갈 거야.”
“무슨….”
“그럼, 몸조심하길.”
그 말을 끝으로 몸이 어딘가로 훅 떨어지며 암흑이 찾아왔다.
***
붉고 질척거리는 것이 보였다. 손을 적신 피가 팔목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흐윽, 흑. 울음을 뱉어 내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차가운 목소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진심을 알아주길, 또한 이해해 주기를 원했다.
“글쎄.”
“…….”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천사연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등지고 섰다. 주저앉은 채로 올려다본 그의 검은 눈동자에 짙게 깔린 성가신 감정을 알아챘다.
갑자기 모든 것이 창피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피에 젖은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런 내 행동에 천사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이결.”
“그, 그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저는…….”
천사연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버리는 상상만 해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급히 변명을 쏟아 냈지만, 천사연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끊어 냈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니야, 한이결.”
“마스터….”
“너는 동생을 대신해서 집착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지.”
그걸 끝으로 천사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끼익,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싸늘한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
집착할 대상이, 필요한 거라고.
당장이라도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쉽게 뱉어 낼 수 없었다. 나를 보며 웃던 여린 아이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다.
나는 정말로 죽은 동생을 대신해서 천사연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건가? 만약 지금 천사연 자리에 그가 아니라 다른 이가 있었다면…….
“모르겠어….”
뚝, 눈물이 핏자국 위로 떨어졌다.
나도 이런 내가 끔찍해. 달라지려고 노력해도 매번 같은 자리만 맴도는 인생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경멸받는 현실이 저주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 삶을 계속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가 사라진다면 천사연, 당신도 신경 쓸 곳이 줄어들어 편하겠지.
하지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가슴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에게 그저 귀찮은 인물로만 각인된 채로 죽는 것은 너무나도 싫었다.
“천사연.”
폐허에서 피어난 장미처럼 아름답고, 매정한 사람.
당신이 나를 오래도록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달이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흐려졌다.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
이마를 쓸어 넘기는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감긴 눈 위를 간지럽히는 감각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전등불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옆에 누운 채로 날 지켜보고 있던 천사연이 눈을 휘어 웃으며 조용히 물었다.
“잘 잤나?”
“…….”
이번에는 다행히 꿈이 아닌 현실인 모양이다. 이상한 꿈을 연달아 꿔서 머리 한구석이 여전히 몽롱했다.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그제야 가파르게 뛰는 심장과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알아챘다. 넋을 놓고 천사연을 응시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을 한번 살폈다.
“…레퀴엠 병실인가.”
“하도 와서 이젠 익숙한가 보군.”
“넌 왜 옆에 누워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른 건 너야.”
그 말에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름을 불렀다고? 한이결에 대한 꿈 때문인가.
끼익. 천사연이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린 나는 누운 채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하루 정도. 아직 피곤해 보이는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 천사연이 커다란 손으로 뺨을 쓸어 왔다. 그런데 이 자식이… 저번부터 엄청 만지작거리네.
한이결의 꿈을 꾼 터라 천사연의 손길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쳐 내고 싶었지만, 피로가 몸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누워 있자 손이 얼굴을 지나 목으로 내려왔다.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나 했더니. 열이 꽤 높은데.”
“피곤하긴 하네…….”
반갑지 않은 것과 별개로, 목에 닿아 오는 천사연의 손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몽롱한 정신에 귓가를 만지는 천사연의 손에 나도 모르게 뺨을 비비자, 바람처럼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웬일로 애교를 다 부리고.”
“헛소리하지 마…. 에드워드 씨는?”
뒤늦게 에드워드와 어린 동생을 걱정했을 클로에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덧붙이는 말이 없어도 뜻을 알아챈 천사연이 서늘한 손을 내 목에 갖다 대며 대답했다.
“무사히 돌아왔어. 지금은 클로에가 지내고 있는 호텔 방으로 가서 쉬고 있지. 목에 상처는 힐러를 통해 치료했고.”
“다행이네.”
정말로.
진심으로 안도하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마음이 놓이자, 그제야 몸을 집어삼킨 열기가 느껴졌다. 천사연의 손길이 닿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열이 뜨끈하게 올랐다.
“점점 심해지는군.”
천사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침대 밖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서랍을 뒤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콜록. 작게 기침하자 목덜미가 뻐근하게 당겼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처럼 지독한 몸살이 오는 것 같았다.
더는 못 버티겠어. 좀 자야겠다. 어차피 밤이니까, 아침까지만 자자.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 좀 만나고…….
“…이결. 한이결.”
“응….”
지독하게 강한 수마가 물밀듯 밀려왔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무심코 대답하자, 차가운 손가락이 입 안을 벌리고 들어왔다. 뜨거운 혀를 살짝 짓누른 천사연이 보기 드물게 난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이대로는 약을 먹을 수가 없는데.”
입을 빠져나간 손이 이제는 턱을 붙잡았다. 정면을 올려다보도록 내 얼굴을 들어 올린 천사연이 위에서 날 응시했다. 전등 빛 그림자에 얼굴이 절반 가려진 천사연과 내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천…….”
흐릿한 시야에 눈을 깜빡이며 천사연의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벌린 그 순간, 입술에 무언가가 닿아 왔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손가락보다 부드럽고 말랑한 혀가 물과 함께 입 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읏…!”
생소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 반사적으로 천사연의 옷깃을 붙잡으며 물을 꿀꺽 삼켰다. 미지근한 물과 함께 둥그런 알약이 쉽사리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흐으, 헉….”
삼킨 것을 알아챈 천사연이 입술을 떼어 내며 턱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다시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약이 남아 있나 입 안을 꼼꼼히 훑은 손가락은 내가 미간을 일그러뜨린 것과 동시에 빠져나갔다.
“다 됐으니 이만 자, 한이결.”
숨을 헐떡이는 내 가슴 위로 이불이 덮어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싶었지만, 한계까지 치솟은 열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욕 대신 끙끙거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둥글게 말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더는 못 버티겠다.
“잘 자, 한이결.”
잠에 빠져들기 직전, 믿기 어려울 만큼 다정한 인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