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27)화 (127/394)

127화 

앞으로 내밀어진 천사연의 손을 잡자, 그가 나를 가뿐하게 일으켜 세웠다.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내 허리를 천사연이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천사연, 잠깐….”

그제야 천사연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볼의 상처를 포함해서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다친 곳이 여럿이었고, 숨도 살짝 거칠었다. 그가 이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을 이제껏 보지 못했던 터라,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너 설마 혼자 온 거야?”

“무슨 문제라도?”

“미쳤어? 지금 여기에 적이 몇 명인데! 그러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걱정해 줘서 고맙군. 쓸데없긴 하다만.”

이 자식이, 진짜.

재수 없는 말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내 뒤에서 눈치만 보던 에드워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사연 씨,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날씨 얘기를 하듯 평온하게 대답한 천사연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목과 손목을 옥죄던 것들이 깔끔하게 잘려 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절그럭.

묵직한 쇠사슬에서 벗어나자 숨통이 트는 기분이었다. 거친 가죽 목걸이에 쓸려 붉어진 목을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수십 명이 우리를 둘러싼 형태로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검은 가면 사이로 하얀 가면을 쓴 사마엘이 보였다. 내가 긴장으로 몸을 굳히자, 천사연이 팔에 힘을 주며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어떡하지?”

“나가야지. 밖으로.”

“천사연, 나 능력을….”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입술을 깨물며 이어 말했다.

“능력이 써지지 않아. 끌려오자마자 무슨 이상한 약을 삼켰는데, 그게 아무래도 셔터 아이템인 것 같아.”

“셔터 아이템이라.”

천사연이 딱히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천사연이 나를 내려다봤다.

“기운을 움직여 봐, 한이결.”

“뭐?”

“기운을 써 보라고.”

그 요구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가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못 들었어? 셔터 아이템을 먹었다고 했잖아.”

“할 수 있어.”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가 사분사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이템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야. 무엇보다 섭취형 아이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이 사라지지.”

“…….”

“해 봐.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잖아.”

단호한 말이 어쩐지 응원처럼 느껴졌다. 천사연의 말이 맞았다. 시도한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한이결 능력자.”

희망을 짓밟듯, 사마엘이 여유롭게 끼어들었다. 챙, 기기긱!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창과 릴리스의 검이 부딪혔다. 나를 품에 안고 에드워드를 뒤로 숨긴 채로 천사연이 검을 휘둘렀다. 나를 천사연에게서 빼앗기 위해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이 사방에서 손을 뻗어 왔다.

“헉…!”

내 손목을 붙잡은 상대방의 팔이 날아갔다. 한쪽 팔이 날아갔음에도, 검은 가면을 쓴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팔을 내밀었다. 그런 이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었다.

사마엘에게 정신과 감정을 통제당하는 이들에게는 생명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공포나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불리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 능력이 필요했다.

천사연의 말대로 딱딱하게 굳은 기운을 억지로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자, 지끈거리는 고통이 심장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마치 가슴을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한 통증에 턱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흐으, 윽!”

짙은 현기증에 속이 매슥거려 왔다. 정신을 잃을 만큼 더웠다가,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추워지는 게 여러 번 반복됐다. 그리고 마침내,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고 벼락을 맞은 듯 온몸에 저릿한 정전기가 스쳐 지나가자, 거짓말처럼 기운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멈춰 있어 녹이 잔뜩 슨 톱니바퀴가 가동되는 것처럼, 일렁이는 기운이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와 손끝으로 느껴졌다.

“성공, 했어.”

손바닥에서 바람이 흘러나왔다. 극심한 피로 속에 숨을 헐떡이며 천사연에게 말했다.

“능력이… 돌아왔어, 천사연.”

“상태가 좋지 않군.”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셔터 아이템의 효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아직 기운의 움직임은 둔한 데다 몸 상태도 최악이었다. 겨우겨우 끌어낸 바람으로 천사연의 몸과 에드워드의 몸을 감쌌다.

“꽉 잡아.”

“어떻게 하려고?”

천사연이 에드워드를 등에 업으며 말했다.

“나가야지. 게이트 출구를 찾아서.”

게이트 출구라고? 그러면 여기가 게이트 내부라는 거야?

“어디 있는데? 게이트 출구가.”

“건물 밖에 있을 가능성이 크군.”

천사연이 검을 크게 휘두르자, 불을 머금은 피가 길게 뻗어 나갔다. 불꽃이 피어오른 피를 밟으며 내게 눈짓했다. 타이밍을 맞춰 몸을 띄우자, 천사연이 곧장 문 쪽으로 움직였다.

“잡아!”

“도망친다! 막아!”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이 고성을 지르며 득달같이 쫓아왔다. 뒤따라 들려오는 수십의 발소리를 들으며 눈앞으로 다가온 홀의 문을 능력으로 열었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눈송이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허억, 헉…….”

단순한 능력 사용에도 금세 기운이 바닥났다. 아직 멈춰 있는 기운이 절반 이상이라, 조금만 써도 한계가 찾아왔다.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지자, 천사연이 정신 차리라는 듯이 내 몸을 살짝 흔들었다.

“버텨, 한이결.”

콰릉!

“으앗!”

건물을 빠져나와 높이 올라가는 우리를 향해 커다란 폭탄이 날아들어 허공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천사연에게 업혀 있던 에드워드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바싹 굳혔다.

폭탄 외에도 날카로운 얼음 송곳이나 바늘이 날아들었다. 빠른 속도로 공격을 피해 내며 건물 위를 지나치자, 후문 쪽에 게이트 출구가 보였다. 고도를 낮춰 그대로 출구를 향해 날아가려던 그때였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한이결 능력자.”

사마엘이 느긋한 걸음으로 게이트 출구를 막아섰다. 위로 빙 돌아온 우리와 달리, 이미 게이트 출구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마엘은 건물 후문을 통해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다.

“천사연…!”

“속도를 늦추지 마!”

천사연의 외침과 동시에, 사마엘이 엄지와 중지가 들린 손을 들어 올렸다. 능력이 통하지 않는 나와 천사연이 아닌, 에드워드를 노릴 게 분명했다.

남은 기운을 최대한 끌어 올려 바람의 속도를 높였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사마엘의 손가락이 부딪혔다. 천사연이 휘두른 검은 사마엘의 앞을 막아선 검은 가면의 남자가 대신 맞고 쓰러졌다.

“이런.”

무언가를 알아챈 사마엘이 아쉽다는 듯이 가면의 입가를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곧이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우우웅!

굳게 닫혀 있던 게이트 출구가 입을 벌렸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내게 사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또 뵙죠, 한이결 능력자.”

그때는 지금만큼 쉽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게이트 출구가 우리의 몸을 집어삼켰다. 시야가 확 뒤집히며 눈이 쌓인 새하얀 땅이 아닌, 흙길과 우거진 수풀이 나타났다.

“에드워드 씨!”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온 것을 알아챈 나는 급히 천사연의 등에 업힌 에드워드를 불렀다.

“괜찮습니까? 마지막에 사마엘이 능력을 쓰던데요.”

천사연의 등에서 내려온 에드워드의 상태를 살피며 묻자, 에드워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괜찮아요. 멀쩡해요. 진짜로요.”

“하지만…….”

사마엘이 마음만 먹으면 평소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 걱정을 눈치챈 에드워드가 나와 천사연을 돌아보며 반지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타이밍이 맞았나 봐요.”

반지 중앙에 박힌 보석이 회색으로 물든 채로 부서져 있었다. 에드워드가 반지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상대방의 능력을 막아 내는 데 성공하면 이렇게 변해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온몸에 긴장이 풀리자 잊고 있었던 통증과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천사연이 감싸 안았다.

“뭐, 이쯤에서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군.”

“잘 마무리되긴, 개뿔이….”

지나친 피곤함에 두통까지 더해졌다. 이마를 짚은 채로 몸에 힘을 빼고 천사연에게 기대며 물었다.

“이제 어쩔 건데? 사마엘이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도 있잖아.”

“당장은 아닐 거다. 그쪽도 피해가 꽤 클 테고, 뒷정리도 해야 할 테니까.”

“뒷정리?”

천사연이 정신을 잃기 직전인 나를 아예 품에 안았다. 천사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이어지는 설명을 들었다.

“몰랐나? 너와 에디가 있던 건물은 아이템으로 만들어 낸 거다. 흔적을 지워야 하니 건물을 없애고, 들어갔을 때처럼 공간 이동 아이템을 사용해서 빠져나가겠지.”

“그럼, 일단은…….”

“그래. 쉬어.”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인 천사연이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에디. 너는 클로에 부마스터에게 연락부터 하는 게 좋겠군. 내 핸드폰을 빌려주지.”

“고마워요, 천사연 씨.”

“연락이 끝나면 산에서 내려가도록 하고.”

“누님께 사람을 보내 달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천사연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에드워드가 전화를 걸며 우리에게서 거리를 조금 벌렸다. 수화기 너머로 에드워드의 이름을 외치는 클로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의 나지막한 통화 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천사연.”

“말해.”

“이상한 점이 많아. 너도 알고 있겠지?”

잠꼬대하듯 웅얼거리는 내 말을 천사연은 금방 알아들었다. 그가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짜증 나는 새끼….”

한 번도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니까. 내 한탄이 꽤 재밌었는지, 천사연이 소리 내서 웃었다.

“이만 자, 한이결. 깨어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 있을 테니.”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글쎄…….”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천사연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함을 느끼며 덮쳐 오는 수마를 받아들였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