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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26)화 (126/394)

126화 

강원도 속초, 인적이 드문 숲속에 있는 게이트 입구 앞에 도착한 천사연은 주변을 둘러봤다.

“흐흠, 뭐야.”

꽉 닫힌 게이트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연의 뒤로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리가 잔뜩 굽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로 느리게 다가왔다.

“누구쇼?”

“안녕하세요, 어르신.”

노인을 향해 몸을 돌린 천사연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게이트에 들어가려고 왔습니다.”

“게이트?”

천사연의 말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긁적인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두어 번 두들기며 물었다.

“거, 동규 허락은 받고 온 겨?”

동규라. 이 게이트를 관리하는 청호 길드의 마스터 박동규를 말하는 거겠지. C급 게이트를 관리하는, 규모가 아주 작은 길드 중 하나였다.

“물론입니다.”

허락은 고사하고 연락조차 한 적 없지만, 천사연은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다행히 노인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하게, 젊은이.”

말린 입술로 더듬더듬 마지막 말을 전한 노인이 등을 돌리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저물어져 가는 석양의 붉은빛이 조각조각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뒤늦게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천사연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 기운에 감응한 게이트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은하수처럼 기묘한 색으로 일렁이는 표면에 몸을 집어넣자 방금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하아, 내뱉는 숨에 따라 새하얀 연기가 퍼져 나왔다.

우득.

촘촘히 쌓인 눈밭 위로 발자국이 새겨졌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얀 눈이 가득 쌓인 한겨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 사이로 다소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인벤토리에서 릴리스의 검을 빼 든 천사연이 건물을 올려다봤다. 흐릿한 하늘 아래로 우뚝 치솟은 새하얀 건물은 주인의 결벽적인 천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전체가 유리로 된 정문에는 창을 든 두 명의 남자가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이 쓰고 있는 검은 가면이 유독 눈에 띄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천사연이 정문으로 걸어오자,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현재 초대된 손님은 없습니다. 당신은 침입자입니다.”

“가까이 올 시, 무력 진압을 하겠습니다.”

기계처럼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경고한 남자들의 창이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잠시간 문지기를 바라보던 천사연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당신들은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가 아니군.”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그 이상 접근한다면 무력―”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쪽 남자의 목이 아래로 떨어졌다. 검날에 피가 묻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깔끔한 솜씨였다. 뒤늦게 왼쪽 남자가 창끝을 천사연에게 겨눴지만, 순식간에 두 팔이 잘려 나갔다.

“끄아아악!”

피가 솟구치는 양팔에 남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쌓인 눈 위로 피가 번져 나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버둥거리는 남자를 지나쳐 천사연이 느긋하게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화려한 외형과 달리 관리되지 않은 문은 느리고 뻑뻑하게 움직였다. 샹들리에 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홀로 들어서자 2층 난간에 서 있던 검은 가면을 쓴 이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침입자입니다, 주인님.”

“침입자.”

“침입자.”

그 말을 시작으로, 곳곳에 숨어 있던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마치 바퀴벌레와 같아서, 천사연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집주인을 만나고 싶은데.”

“나 말이야?”

계단 앞에 서 있던 검은 가면을 쓴 작은 키의 여자에게서 능청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짐을 지고 앞으로 두어 걸음 움직인 여자가 이어 말했다.

“반갑군. 천사연. 아니, 이제는 천사연 마스터라고 해야겠지.”

“그래.”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행동에 맞춰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살랑였다.

“안타깝게 나는 그다지 반갑지 않군.”

“반갑지 않다라.”

여자가 검지로 검은 가면을 툭툭 두드렸다.

“이해할 만하네.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넌 이 모든 게 그저 지겨울 테니.”

“…….”

“말해 봐, 천사연 마스터. 나와 이런 대화를 하는 게 지금 몇 번째지? 기억은 하나? 셀 수는 있고? 이 장소에 마지막으로 와 본 건?”

쉴 틈 없이 이어진 질문은 마치 놀리는 것처럼, 지나치게 가볍고 날카로웠다. 긴 속눈썹 아래로 눈빛을 숨긴 천사연이 입을 뗐다.

“오해가 있군. 내 것을 멋대로 훔쳐 간 좀도둑을 상대로는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는데.”

“하하, 내 것?”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흘린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자, 무기를 꺼내 든 검은 가면의 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층뿐만 아니라, 2층과 3층으로 이어진 계단도 사람 발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착각 아닐까 싶은데. 천사연 마스터, 네 것인 게 세상에 있기는 한가?”

그를 둘러싼 수십 명이 동시에 입을 열고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네게는 그저 모든 게 한낱 꿈과도 같을 텐데.”

철그럭. 가장 가까운 남자가 쥔 무기의 두꺼운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회색빛 쇠사슬 끝에 거대한 철퇴가 달린 플레일이었다. 투박하게 돋아난 가시에는 끈적이는 무언가가 말라붙어 있었다.

“…무슨 설명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사연이 새하얀 손을 펼쳐 들고 그 위에 검날을 올렸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살고 있다.”

깊게 베어 낸 손바닥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비옥한 땅에 피어나는 꽃처럼, 붉은 피 위로 뜨거운 열기가 솟아올랐다.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아, 사마엘.”

천사연이 고개를 들고 검은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 사이로 하얀 가면 쓴 남자를 정확하게 바라봤다. 기다란 검신을 타고 흐른 핏방울이 바닥 위로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너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

“내가 가진 것을 탐내겠지. 항상 그래 왔듯이.”

“능력 사용을 허가한다.”

이제껏 보였던 여유로운 모습이 사라진, 냉정한 목소리로 사마엘이 명령했다. 갖가지 무기를 든 이들에게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죽여.”

쿠웅!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달려든 이는 플레일을 든 거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키가 2m는 훌쩍 넘는 남자가 휘두른 플레일이 방금까지 천사연이 있던 바닥을 거침없이 부서트렸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아오른 천사연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시 박차고 뛰어올랐다. 천사연이 자리를 옮기는 족족 새로운 공격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샛노란 벼락과 얼음 송곳, 폭발하는 돌 조각, 부채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파편 등 다양한 능력자가 사마엘의 명령대로 오로지 천사연을 죽이기 위해 행동했다.

환각과 감각 증폭, 최면 같은 정신계 능력도 쏟아졌지만, 그 누구도 SS급인 천사연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들은 불에 집어삼켜져 비명을 내지르거나, 신체 부위가 절단당했다.

“그아아악!”

쿠웅, 철컹!

플레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남자의 오른쪽 다리 반절이 휘두른 검에 잘려 나갔다. 남자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며 플레일을 놓쳤다. 붉은 피와 불, 비명으로 넓은 홀이 메워졌다.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고개를 살짝 꺾는 것으로 벼락을 피해 낸 천사연에게 가슴을 크게 베인 남자가 고통에 찬 신음 대신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집중을 못 하고 있군.”

곧이어, 불에 얼굴 반절이 삼켜진 이가 말했다.

“한이결 능력자를 찾나?”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불안한가?”

“이 중에 한이결이 있을까 봐?”

“아니면, 내 능력으로 이미 정신을 빼앗.”

천사연이 들을 가치도 없다는 태도로 입을 움직이는 여자의 머리를 날렸다.

“시끄럽군.”

쿠궁!

바닥이 갈라지고 벽이 부서졌다. 굉음과 함께 흔들리는 건물을 느끼며 천사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한이결을 걱정한다고?”

흩날리는 핏방울 사이로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의 보호를 받는 사마엘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천사연의 볼에 상처가 생겨났다. 끝없이 몰려오는 공격에 가벼운 부상이 점차 늘어났다.

“글쎄. 그래 보이나?”

“…뭔가를 알고 있군.”

천사연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사마엘이 흥미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쉽게 보내 준다 했더니.”

“그쪽도 일부러 한이결에게서 아이템을 뺏지 않고 데려오지 않았나.”

천사연이 볼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대충 쓸어 냈다.

“나를 그렇게나 보고 싶었나 보군.”

“하….”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숨을 길게 내쉰 사마엘이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매만졌다. 서로를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꾸만 가면을 매만지는 사마엘의 행동에 천사연이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거슬리나 본데. 얼굴의 흉터가.”

습관처럼 가면에 손을 대던 사마엘이 그 물음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를 둘러싼 공기에서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짙은 악의가 감돌았다.

가면 틈 사이로 보이는 사마엘의 눈동자가 불온한 기운으로 빛난 그때, 검은 가면을 쓴 이가 복도에서 빠져나와 사마엘에게로 달려왔다.

“주인님.”

“…말해.”

“시체와 부상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위치는 1층과 2층입니다. 시체는 23번. 부상자는 34번과 89번입니다.”

“흠.”

세 명에게 했던 명령을 떠올린 사마엘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한이결이 움직였군.”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생각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역시 인질이 있기 때문인가.

“찾아. 그리고 끌고 와.”

“예.”

한마디에 사마엘 주변에 서 있던 20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건물 곳곳으로 흩어지는 그들을 알아챈 천사연의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피잉!

석궁으로 쏘아진 밧줄이 천사연의 왼쪽 팔을 뱀처럼 휘감았다.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도끼를 검으로 쳐 낸 천사연의 얼굴에서 한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제 팔을 휘감은 밧줄을 오히려 힘주어 잡아챘다.

“헉, 크헉!”

천사연을 잡아당기려던 석궁을 든 자가 반대로 천사연에게 휙 끌려가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끝없이 밀려오는 적에 천사연이 반듯한 미간을 구겼다.

이미 한쪽에서 시선을 끌고 있는 이때, 다른 쪽이 붙잡히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것이다. 그 전에, 한이결을….

“……연!”

검과 검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비명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천사연이 예리하게 알아챘다.

“천사연…!”

한이결의 부름이었다. 재빨리 몸을 돌린 천사연이 땅을 박차고 어딘가로 뛰기 시작했다. 막아 세우는 이들을 가차 없이 베어 내며 나아간 천사연이 마지막으로 쇠사슬을 움켜쥔 자의 팔을 잘라 냈다.

“큭….”

적에게 쇠사슬이 붙잡혀 강제로 끌려갈 뻔한 한이결이 마른기침을 뱉어 내며 천사연을 올려다봤다. 등 뒤로는 에드워드도 함께였다.

새빨간 뺨과 목에 채워진 두꺼운 가죽 목걸이, 손목에 채워진 수갑, 다친 팔과 부어오른 발목을 차근차근 살펴본 천사연이 한이결을 향해 첫말을 뱉어 냈다.

“웃기는 꼴을 하고 있군, 한이결.”

안도의 숨을 내쉰 한이결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왜 또 시비야?”

“흐흠.”

천사연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한이결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스로 베어 내어 검상이 남아 있는 천사연의 손과 도망치기 위해 잔뜩 헤지고 다쳐 피가 범벅 된 한이결의 손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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