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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25)화 (125/394)
  • 125화

    32. 흐려진 물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온 나는 다른 계단이 더 있나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복도 맞은편에 넓은 홀이 나타난 거로 보아, 여기가 1층인 듯했다.

    ‘발목 상태가… 생각보다 더 안 좋은데.’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는데, 계단을 내려오고 나니 욱신거리는 고통이 더 심해졌다.

    식은땀을 대충 닦아 내며 그림자가 진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내가 내려온 계단으로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이 여럿 내려왔다.

    몸을 숨긴다 해도 한계가 있는데, 스치듯 마주한 적들은 나를 보지도 않고 홀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정신 지배 능력의 영향이었다.

    줄을 맞춰 똑같이 움직이는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을 피해 방이 나열된 복도로 들어섰다. 1층 7번째 방. 차분히 숫자를 세며 7번째 방문 앞에 도착해서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철컥.

    아쉽게도 문은 잠겨 있었다. 내가 있던 방처럼 밖에서 열리기를 기대했는데. 짜증스럽게 몇 번 손잡이를 잡아당기던 나는 이번에는 문을 쿵쿵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 씨? 에드워드 씨, 거기 있습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 방이 맞을 텐데. 설마 그사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나?

    난감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방 안에서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한이결 씨…?”

    “에드워드 씨!”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게다가 마치 아픈 사람처럼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괜찮습니까? 다치셨어요?”

    덜컥 불안함이 치솟았다. 내가 급히 묻자, 에드워드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방금보다는 조금 더 선명한 소리로 답했다.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방금은 그러니까, 목이 너무 말라서…….”

    그제야 여기로 붙잡혀 오고 지금까지 에드워드가 물도 음식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 어린 나이라 기본적인 체력도 부족해서 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에드워드 씨. 제가 방을 열어 낼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발목만 멀쩡했으면 힘으로 어떻게 해 봤을 텐데, 지금은 그마저도 어려웠다. 나는 일단 옆에 있는 다른 방의 문을 열어 봤다.

    아무도 없는 방 내부에는 간소하게 생긴 1인용 침대와 서랍 하나만 놓여 있었다. 썰렁한 안을 둘러보다 혹시나 해서 서랍을 여니,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이 나타났다.

    “총?”

    검은 가면과 권총이었다. 조심스럽게 권총을 잡아 들자, 묵직한 무게가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이리저리 총을 살펴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생긴 건 베레타 92와 비슷한데, 총신이 조금 더 길고 가벼웠다. 아무래도 자동 권총을 아이템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였다.

    ‘무기가 생긴 건 좋기는 한데.’

    쥐고 있던 거울 파편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차라리 야구 배트나 단검이 발견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총은 위력이 강한 만큼 다루기 힘들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단 총을 챙겨 방을 빠져나왔다. 혹시 모르니 다른 방도 뒤져 봤지만, 딱히 쓸 만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에드워드의 방문 앞으로 돌아온 나는 갈등했다. 여기서 문손잡이를 총으로 쏘면 에드워드를 방에서 빼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총소리를 사마엘이 들을 가능성이 너무 컸다. 녀석은 지금쯤 1층 홀에 있을 테니, 여기서 총을 쏘면 분명 듣겠지. 정신 지배를 당한 놈들이 몰려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를 계속 저렇게 놔두는 것도 위험했다. 차라리 총을 쏘고, 에드워드가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따로 움직여서 시선을 끄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마엘은 내 능력을 좋게 평가하고 있으니, 최소한 죽이지는 않겠지.

    마음을 다잡고 에드워드의 방문을 두드렸다.

    “에드워드 씨, 지금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멀리 떨어지세요.”

    “네, 네!”

    에드워드의 대답을 들은 후, 문에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섰다. 오랜만에 잡아 본 총을 들고 문손잡이를 겨눴다.

    아이템 총이라 정확한 위력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약해도 총이니 두세 발 정도면 문손잡이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총을 쏜 뒤는 재빨리 상황 설명을 하고, 에드워드가 도망칠 수 있도록 시선을….

    쿠웅!

    “……!”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홀 쪽에서 시끄러운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절로 움칠 떨렸다.

    쿠궁! 쾅!

    “…뭐지?”

    굉음이 쉴 틈 없이 들렸다. 아무래도 홀에서 전투가 벌어진 듯싶었다.

    뭐가 됐든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 정도라면 총소리가 묻힐 거고, 만약 들린다 해도 전투 중에 빠른 대처를 하기가 쉽지 않겠지. 망설임 없이 문손잡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총탄이 문손잡이와 부딪히며 스파크가 번쩍 튀었다. 철컹, 미세한 화약내와 함께 문손잡이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손잡이가 달려 있던 부분이 아예 너덜너덜해진 문을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이결 씨!”

    내 말대로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벽에 붙어 있던 에드워드가 나를 보고는 안도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나는 에드워드의 상태를 급히 확인했다. 다행히 안색이 좀 창백하고 지쳐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헉, 괜찮으세요? 피, 피가…….”

    “아. 오다가 일이 좀 있어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에드워드를 살폈듯, 내 모습을 살핀 에드워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얼굴 상처를 가리켰다. 그렇게 많이 다쳤나? 얼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터라 대충 얼굴을 가리며 에드워드에게 손짓했다.

    “일단 나갑시다. 총소리를 듣고 놈들이 몰려올 수도 있어요.”

    말뜻을 알아챈 에드워드가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중에도 홀에서는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혹시 우리를 구하러 누가 왔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출구를 찾으려면 복도를 빠져나와 홀 근처로 가야 하니, 운이 좋으면 사마엘이 손님이라고 말한 상대가 누군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 뒤를 따라오세요.”

    복도 끝에 숨어서 총소리를 듣고 방으로 오는 인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한이결 씨.”

    숨죽이고 나를 쫓아오던 에드워드가 머뭇거리며 총을 가리켰다.

    “그건 한이결 씨가 쓰는 아이템인가요?”

    “아뇨. 운 좋게 주웠습니다.”

    어딘가 묘한 표정이던 에드워드는 내 설명에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역시 그렇군요. 한이결 씨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인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

    “그렇습니까?”

    사람마다 어울리는 아이템이 따로 있는 건가? 난 잘 모르겠는데. 에드워드는 제작자이니 나보다 아는 게 많아서 그런가.

    “네. 총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한이결 씨는 이런 투박한 것보단 좀 더 가볍고 깔끔한 무기가 좋아 보여요.”

    “아이템인 것은 기운이 느껴져서 알지만… 투박합니까? 일반적인 권총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저는 볼 수 있어요.”

    에드워드가 제 눈가를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어느 정도 수준의 제작자가 만들었는지, 무슨 재료가 어떻게 들어갔고 무슨 효과가 있는지 다 보여요.”

    오. 사실이라면 굉장한 능력이다. 상대방의 기운을 볼 수 있는 클로에와 아이템의 정보를 볼 수 있는 에드워드라. 남매가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하나.

    “그럼 이 총에 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드디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에드워드가 의욕 가득한 표정으로 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으음, C급 몬스터 스파크 스네이크의 체액이 들어가 있네요. 전기 충격 기능이라고 보면 돼요. 그걸 제외하면 한이결 씨 말씀처럼 총과 다른 부분은 딱히 없어요.”

    그러고 보니 문손잡이를 쏠 때 스파크가 번쩍이긴 했었지. 몬스터 체액의 힘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C급이라면 그다지 쓸모는 없겠군요.”

    “그렇죠. 그냥 총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제자리걸음이군.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복도 반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쉿.”

    급히 몸을 낮추며 에드워드를 등 뒤로 감췄다. 에드워드도 소리를 들었는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벽에 바싹 붙어 섰다.

    검은 가면을 쓴 남자와 여자였다. 손에는 각각 검은 목검과 가죽 채찍을 들고 있었다.

    ‘복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저길 지나가야 하는데.’

    나를 보고도 지나쳤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곱게 보내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사이 명령이 바뀌었나.

    인이어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홀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삼켜 내며 주머니에 넣어 놨던 거울 파편을 다시 꺼내 들었다. 홀이 가까우니 웬만하면 총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에드워드 씨, 뒤로 빠져 계세요.”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어쩔 수 없다. 강경 돌파해 보는 수밖에는. 상체를 낮추고 소리 죽여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목과 손목이 묶인 상태이니 신중하게 상대해야 했다.

    상대는 둘 다 홀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총, 나머지 손에는 거울 파편. 잠시 고민 끝에 목검을 들고 있는 남자의 등 뒤에서 몸을 일으켜 팔을 빠르게 휘둘렀다.

    푹!

    거울 파편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남자의 목에 강하게 찔러 들어갔다. 크억,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꽂힌 부위에서 피가 솟구쳤다.

    “끄으윽!”

    거울 파편을 뽑아내고 거리를 벌리자, 남자가 피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뒤늦게 내 존재를 알아챈 여자가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채찍을 휘둘렀다.

    치명상을 입은 남자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히 바닥으로 몸을 날렸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팔뚝에 채찍이 스쳐 지나갔다.

    “읏…!”

    이제 보니 단순한 채찍이 아닌, 겉면에 가시가 빽빽하게 박힌 무기였다. 상처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을 무시하며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내가 피한 자리로 순식간에 채찍이 날아들었다.

    철그렁!

    격한 움직임에 목줄에 달린 쇠사슬이 크게 흔들렸다. 욱신거리는 발목에 억지로 힘을 주며 왼쪽 다리를 크게 휘둘렀다. 코앞까지 다가온 내 모습에 당황하던 여자가 돌려차기에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쿨럭….”

    검은 가면 안쪽에서 짧은 기침과 함께 여자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혹여 방해될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에드워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하, 한이결 씨. 괜찮으세요?”

    “일단은요.”

    “발목이…!”

    방금 싸움으로 가뜩이나 부어 있던 발목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걷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오싹한 고통이 밀려왔다.

    “제, 제게 기대세요. 제가 어떻게든…….”

    퉁퉁 부어오른 내 발목을 본 에드워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부축했다. 어린 에드워드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지만, 걷는 게 영 쉽지 않았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에드워드에게 기대서 발목의 부담을 조금은 줄인 채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살짝 어두웠던 복도 밖, 샹들리에 불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홀 중앙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십 명의 검은 가면을 쓴 이들과 사마엘을 발견하고 몸을 숨기려다가, 곧이어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를 발견하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천사연?”

    붉은 재킷을 입고 릴리스의 검을 든 수려한 외모의 남자. 눈을 깜빡이고 봐도 천사연이 확실했다. 에드워드도 나와 같은 곳을 봤는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사연 씨 맞죠? 저희를 구하러 오셨나 봐요!”

    “잠깐만요, 에드워드 씨.”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침착하게 천사연의 주변을 살폈다. 아까부터 건물을 흔들던 굉음의 흔적으로 보이는 무너지고 갈라진 벽과 바닥, 그리고 피를 흘린 채로 죽어 있는 검은 가면을 쓴 사람들.

    ‘천사연.’

    피 웅덩이를 밟고 사마엘과 대치하고 있는 천사연의 창백한 옆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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