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도, 시계도 없는 방에 갇혀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는 방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리가 길어 걸음 폭이 넓으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사마엘의 발걸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방으로 다가오는 이가 사마엘이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것을 알아챘다.
철컥, 끼익.
곧이어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몸을 긴장하며 바지 주머니 위를 손으로 쓸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딱딱한 것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나를 찾아온 이는 검은 가면을 쓴, 체구 건장한 남자였다. 키가 2m는 족히 넘어 보였다. 그는 문을 완전히 닫지 않은 채로 방 안에 들어섰다.
안에서는 열 수 없는 형식의 잠금장치인 건가? 차분하게 거리를 벌리고 남자의 행동을 살폈다.
남자는 내게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은 채로 걸어와 협탁 위에 옷과 수건을 내려놨다. 남자와 문 사이의 거리는 대략 열 걸음 정도.
벽을 등지고 천천히 남자의 대각선 방향으로 이동했다. 나와 남자, 문의 구도가 삼각으로 이루어졌다.
내 움직임을 눈치챈 남자가 옷과 수건을 내려 두기 위해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나를 돌아봤다. 팽팽한 긴장감이 나와 남자 사이에 감돌았다.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은 공기를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할 수 있을까?’
사실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장소가 좁은 방 안인 데다 양손과 목이 묶인 내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얼마나 시간을 허비했을지도 모르는 현재로서는, 상대방을 눕히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새하얀 정장 소매 아래로 보이는 손이 내 얼굴만 했다. 솥뚜껑처럼 두껍고 큼직한 손에 새삼 체격 차이를 느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
“……!”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뛰었다. 내 재빠른 움직임에 남자가 가면 속에서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달려들었다. 남자와 문을 두고 가운데 선 나는 휘둘러지는 거대한 팔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큭!”
곧바로 다음 공격이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목에 걸린 가죽 목걸이를 붙잡아 내 행동을 저지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허리를 꺾어 상체를 앞으로 숙였지만, 길게 내려온 쇠사슬 끝이 남자의 발에 밟혔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 둔 것을 꺼내 휘둘렀다. 찌익, 날카로운 모서리에 상대의 어깨 부근이 길게 찢어졌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선 남자의 행동에 다행히 발에 밟혔던 쇠사슬이 풀려났다.
깨진 거울 파편. 의자로 거울을 부숴 얻어 낸 무기였다.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싸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사정 봐주지 않고 상대할 수밖에.
내 손에 들린 거울 파편을 발견한 남자가 목을 울려 위협적인 소리를 흘렸다. 조심성 없이 꺼내 든 탓에 파편을 쥐고 있는 내 손바닥도 무사하지 못했다. 쓰라린 고통과 함께 손바닥에서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정신을 사마엘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데다, 가면까지 쓰고 있는 상대를 앞에 두고 있자니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핥으며 애써 웃었다.
“덤벼, 자신 있으면.”
내 말에 콧김을 훅 내뿜은 남자가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움직임이 제법 빨랐다. 또다시 쇠사슬이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몸을 숙여 날 붙잡으려는 남자의 손을 피해 거울 파편을 휘둘렀다.
사정거리에 들어온 남자의 목 위로 파편이 지나갔다. 비명과 함께 피가 눈앞으로 확 튀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남자를 쓰러트리고 가려면 죽이지는 않아도 움직일 수는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후웅, 남자가 휘두른 팔이 허공을 갈랐다. 속도는 빠르지만, 행동이 단순해서 피하기 쉬웠다. 나는 빈틈을 노려 남자의 허벅지에 거울 파편을 깊게 찔러 넣었다.
“크아아악!”
찔러 넣은 파편을 뽑아내자 피가 울컥 치솟았다. 비틀거리는 남자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다른 쪽 허벅지에도 똑같이 거울 파편을 찔러 넣었다.
쿠웅!
두 다리를 찔린 남자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피에 젖은 거울 파편으로 가면의 끈을 단번에 끊어 내자, 초점이 없는 멍한 표정을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정신 지배를 당했던 에드워드와 비슷한 상태였다. 내가 도망치려고 하면 어떻게든 막으라는 명령이 입력되어 있는지, 그는 다친 몸으로도 계속 일어나기 위해 꿈틀거렸다.
“하아…….”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대충 훔쳐 내며 손에 들고 있는 거울 파편을 내려다봤다. 피에 젖은 거울 파편에 얼굴이 비쳤다. 이제 보니 볼 부근에 피가 튀어 있었다. 나는 아예 남자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좀 더 제대로 된 무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버둥거리는 남자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여기저기 뒤져 봤지만, 쓸 만한 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울 파편을 계속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나는 무기 대신 남자의 귀에 꽂혀 있는 작은 인이어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거 덕분에 멀리 떨어진 사마엘의 명령을 들을 수 있나 본데. 그렇다면 지배를 당한 상태에서는 직접적인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건가?
‘S급인 강승건에게 능력이 통할 때부터 예상했지만… 이 정도면 SS급 능력자인 게 확실하겠군.’
그럼 인형술사도 SS급일 확률이 높았다. 최악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혀를 차며 인이어를 꺼내 들었다.
다른 기기나 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용도에 맞춰 제작된 아이템으로 보였다. 혹시 모르니 인이어를 귀에 꼈다. 사마엘이 다른 이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훔쳐 들을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남자에게서 얻을 만한 것을 다 얻어 낸 나는 만약을 대비해 거울 파편을 손바닥 안쪽에 숨긴 채로 방을 나섰다.
길게 펼쳐진 새하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 기억을 떠올려 에드워드 방이 있을 만한 위치를 파악했다.
‘1층 7번째 방.’
기절하기 직전, 사마엘이 나와 에드워드를 그곳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했었지. 그 후로 에드워드가 다른 방으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아직 같은 방에 있을 것이다.
일단 계단을 찾아봐야겠다. 숨죽이고 복도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봤다. 일정 간격마다 방문이 보이는 복도는 마치 호텔과 비슷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빠르게 몸을 숙이며 벽에 붙어 섰다. 복도 끝머리에 있는 계단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계획대로 찾아내서 다행이었지만, 계단을 지나기 위해서는 저들을 지나쳐야 했다. 내 방으로 찾아왔던 이보다는 평범한 체격의 남자 세 명이었지만, 혼자 상대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운 나쁘게도 바로 뒤에 있는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왔다. 긴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여자였다.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벌렸다.
“키아아악!”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잔뜩 쉬고 메마른 비명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계단 앞의 남자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쯧…!”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급히 몸을 일으켜 계단으로 뛰려고 했지만, 기다란 손톱을 가진 마른 손이 뒷머리를 잡아챘다.
따가운 고통에 이를 강하게 물며 뒤쪽으로 거울 파편을 휘둘렀다. 꺄아악! 파편에 콧등이 베인 여자가 머리를 놓으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남자 하나가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쿠웅!
“으윽!”
휙 돌아간 머리가 복도 벽에 부딪히면서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그 충격으로 귀에 꽂고 있던 인이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심을 잃은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배에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욕설과 고성,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날아들었다.
묶인 손목을 들어 팔로 머리를 감싸며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다리를 강하게 후려 찼다.
“크악!”
정강이를 제대로 맞은 남자가 쓰러지며 생긴 빈틈으로 빠져나온 나는 옆에 있는 이의 어깨에 거울 파편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이 씹새끼가!”
“죽여!”
쇠사슬이 확 잡아당겨져 몸이 앞으로 쏠렸다. 비교적 다친 곳이 적은 세 번째 남자가 내 머리채를 붙잡아 벽에 두 번 연달아 처박았다. 우웅, 머릿속이 울리고 정신이 한순간 끊겼다 돌아왔다.
목숨 줄처럼 강하게 움켜쥔 거울 파편으로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는 손을 힘줘서 긁어 냈다. 깊게 찢어진 남자의 손등에서 피가 튀었다.
“헉, 흐…!”
재빨리 벗어나려고 했지만, 또다시 어깨가 붙잡혀 복도 바닥에 던져졌다. 남자 셋에 여자 한 명. 목과 손목이 묶인 상태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성이 사라지고 폭력적인 본능만 남은 이들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억센 손에 붙잡힌 정강이가 고통스러웠다. 일부러 두려움을 느끼도록 날카로운 거울 파편을 눈앞으로 들이밀며 위협적으로 휘둘렀지만, 공포가 사라진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도망갈 구석을 찾는 사이, 또다시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으…….”
입 안이 찢어졌는지 아릿한 통증과 함께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심한 멀미를 하는 것처럼 매슥거리는 속과 가물가물한 시야를 애써 외면하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아직 뺏기지 않은 거울 조각으로 반격을 해 보려는데,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쿠구궁!
그러자 방금까지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주먹을 휘두르던 이들이 고장 난 기계처럼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얼굴 근육도 모조리 풀려 넋이 나가 보였다. 그 변화에 바닥에서 인이어를 찾아 끼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군.]
“……!”
사마엘의 목소리였다. 바닥을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인이어를 만졌다.
[1층으로 모여.]
명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앞에 있던 네 명은 가장 가까운 방에 들어가 가면을 쓰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은 마치 공장에서 뽑아낸 장난감처럼 모든 행동을 동시에 똑같이 했다.
파직!
“윽…!”
그걸 끝으로, 인이어에서 작게 전기가 튀어 오르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바닥에 떨어지면서 부품이 망가졌다가 완전히 고장 난 것 같았다. 쓸모없어진 인이어를 귀에서 빼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사마엘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을 확인한 나는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방금 싸움으로 잘못 다쳤는지, 걸을 때마다 오른쪽 발목이 욱신거렸지만 무시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최대한 빨리 에드워드에게로 가야 했다. 에드워드만 만난다면, 그 뒤는 출구를 찾아 도망가면 된다.
혹여 또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