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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23)화 (123/394)
  • 123화 

    억지로 삼켜 낸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 몸이 절로 떨렸다.

    “이런.”

    잔뜩 젖은 눈이 쓰라렸다. 얼굴을 붙잡은 채로 콜록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던 사마엘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목이 심하게 말랐나 보군요. 울기까지 하고.”

    짜증 나는 새끼. 사마엘의 손목을 움켜쥐며 굳은 입매를 끌어 올려 억지로 웃었다.

    “그래. 덕분에 시원하네.”

    “하하….”

    가면의 좁은 틈 사이로 반짝 빛나는 사마엘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동시에 억센 손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이거 참, 볼수록 마음에 들어서 난감하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사마엘이 이번에는 쇠사슬을 훅 잡아당겼다. 그 힘에 몸이 억지로 일으켜졌다.

    “풀어.”

    “예.”

    짧은 명령에 여자가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벽으로 걸어갔다. 벽에 붙어 있는 이음새에 열쇠를 꽂아 돌리자, 쇠사슬 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을 마셨으니, 이제 배를 채워야겠죠? 식사하러 갑시다.”

    “잠깐, 윽…!”

    사마엘이 마치 개를 끌어내는 것처럼 나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 행동에 뒤를 돌아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하, 한이결 씨!”

    잔뜩 굳은 채로 구석에 서 있던 에드워드가 두려운 표정으로 내 이름을 외쳤다. 그제야 에드워드의 존재를 깨달은 듯, 사마엘이 발걸음을 멈췄다.

    “아, 맞다. 깜빡했네.”

    잠시 고민하는 듯 나와 에드워드를 번갈아 보던 사마엘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인질이 걱정되면 순순히 따라오십시오, 한이결 능력자.”

    “…….”

    “그렇지 않아도 귀찮은 인질에게 밥까지 챙겨 주길 원하는 건 아니겠죠? 제가 음식에 뭘 넣었을 줄 알고?”

    에드워드는 최대한 사마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편이 좋았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사마엘이 그럴 줄 알았다며 쇠사슬을 다시 한 번 더 잡아당겼다.

    사마엘과 정신 지배를 당하는 두 명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서며 닫히는 문틈 사이로 에드워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버텨 달라는 뜻을 알아차렸는지, 에드워드가 얼굴을 굳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흠.”

    들뜬 목소리로 흥얼거리던 사마엘이 문에 눈길을 주는 내게 입을 열었다.

    “이 건물의 몇 안 되는 잠기는 방입니다. 그래도 나름 신경 써 준 건데, 어떻습니까?”

    “어차피 신경 쓸 거면 좀 더 인심 쓰지 그래? 에드워드는 그만 보내 줘. 어차피 원하는 건 나잖아.”

    “글쎄요. 그건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고민해 보도록 하죠.”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듯, 사마엘이 앞장서서 걸어가며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휘청이는 몸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던 나는 복도를 지나 펼쳐진 넓은 홀을 마주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크아악! 크윽!”

    “끄으윽, 헉, 사… 살려…….”

    “이거 놔, 시발!”

    “아아악…!”

    수십 명의 사람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새하얀 정장이 피와 먼지로 더럽혀지고, 얼굴은 누군가에게 맞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상대방의 목을 조르며 욕설을 내뱉고, 여러 명이 한 명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혼자서 벽에 머리를 여러 차례 갖다 박았다.

    마치 지옥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검붉은 피가 낭자하고, 고통에 찬 비명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충격을 받은 내가 귀엽다는 듯 볼을 가볍게 툭툭 두드린 사마엘이 홀 중앙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 많은 이들 중 단 한 명도 우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새까만 가면을 발견하자, 강승건이 떠올랐다. 지극히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던 강승건. 카렌이라 불린 인형이 ‘감정 지배의 부작용’이라고 말했었지.

    그제야 사마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일부러 이런 상황을 보여 준 것이다.

    함부로 반항하지 못하도록. 부작용에 시달리는 이들이 에드워드에게 해를 끼치거나, 혹은 에드워드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압박이었다.

    배를 걷어차인 남자가 피를 울컥 뱉어 내는 모습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그 어떤 협박보다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홀 가장 안쪽,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하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기다란 테이블에는 다양한 음식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준비해 봤습니다. 앉으시죠.”

    식기가 놓인 두 자리 중 한 곳에 앉은 사마엘이 손짓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아 내며 그의 말대로 의자에 앉았다.

    검은 가면을 쓴 사람이 따듯한 빵이 담긴 바구니를 가져와 옆에 놔 주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지만, 놀라울 만큼 식욕이 돌지 않았다.

    멍하니 빵을 응시하는 내게 사마엘이 짐짓 다정한 태도로 말했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아니.”

    고민 끝에 양 손목이 묶인 채로 빵을 집어 들었다. 빵이 아니라 벌레를 집어 든 것처럼 강한 불쾌함이 일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손에 들린 것이 빵이 아니라 벌레라 해도, 사마엘이 원한다면 먹어야 했다.

    사마엘이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된 채였다. 가면을 벗는 것을 기대했는데, 애당초 나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모양이다.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억지로 빵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하루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가 졌지만, 씹히는 빵 표면이 흙처럼 거칠게만 느껴졌다.

    “흐음.”

    “뭐야.”

    그런 내 모습에 사마엘이 턱을 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포를 삼키는 것처럼 겨우 빵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 묻자, 사마엘이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저 정말로 먹는 게 신기해서.”

    “먹으라며?”

    “제가 음식에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그렇게 의심 없이 드십니까?”

    빵 한 조각을 다 먹자, 이번에는 희멀건 수프가 앞에 놓였다. 수저를 들고 수프를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내 능력을 써먹으려고 인질까지 잡아 오는 번거로운 짓을 했는데, 먹는 거로 장난칠 거였으면 진작 강제로 입에 처넣었겠지.”

    “오, 정말 눈치가 빠르군요. 더 마음에 듭니다.”

    …젠장. 괜한 짓 했나. 그냥 모른 척 바보처럼 앉아 있을 걸 그랬다. 가뜩이나 없는 식욕이 더 떨어졌다. 슬쩍 수저를 놓으며 사마엘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됐잖아. 그 아이… 인질은 놔줘.”

    “그 제안은 별로 끌리지 않는군요.”

    사마엘이 우아하고 정갈한 자세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나이프에 썰린 부드러운 살점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와 기름과 함께 접시에 퍼져 나갔다.

    “인질 하나로 당신의 태도가 이렇게나 다른데, 굳이 제가 인질을 풀어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달그락. 사마엘이 한 입 크기로 적당하게 썰린 스테이크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본인이 먹으려는 게 아니라, 나보고 먹으라고 썰어 둔 건가.

    “제가 인질이나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십시오.”

    “…….”

    “원래 계획은 말이죠, 한이결 능력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검은 가면을 쓴 이가 빈 와인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점점 차오르는 와인을 보며 사마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인질을 포함해서 당신의 뇌를 잔뜩 뭉개 놓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눈길만 보내도 무릎을 꿇고 기어 올 만큼.”

    “…계획대로 안 돼서 아쉽겠군.”

    “조금? 그래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도 꽤 재밌으니까.”

    사마엘이 손으로 스테이크를 가리켰다.

    “드십시오. 딴청 그만 부리고.”

    무심코 입가가 일그러졌다. 음식에 거부감을 보이는 나를 보며 사마엘이 웃었다.

    “당신의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아직 제게는 인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인질. 그 말에 포크를 집었다.

    “정신과 감정이 무너져 벽에 머리를 박고 자해하는 제작자의 모습을 보면, 당신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 줄까요?”

    먹기 좋게 썰어진 스테이크에 포크가 꽂혔다. 피와 기름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와 씹고 삼켰다. 그것만으로도 가슴께에 커다란 바늘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지고, 배 속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천히 식사하는 나를 지켜보며 사마엘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경계를 풀지 마십시오. 저의 악랄함을 머릿속에 새기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긴장하십시오.

    당신이 그래야만 인질이 살 수 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실수하거나 제 심기를 거스른다면, 인질은 자신의 이름조차 잊고 죽어 갈 겁니다.

    귀를 막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억누르며 꾸역꾸역 스테이크를 먹었다. 이 끔찍한 시간은 내가 스테이크 한 접시에 와인 잔을 다 비울 때까지 계속됐다.

    ***

    “그럼, 쉬십시오. 한이결 능력자.”

    식사가 끝난 후, 사마엘이 날 끌고 온 곳은 에드워드가 없는 새로운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아까 방과 달리 이곳은 침대와 화장실, 새하얀 테이블이 자리해 있었다.

    “부디 평온한 휴식이 되기를.”

    마치 놀리듯 능청스럽게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한 사마엘이 나를 방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욱, 욱…!”

    변기에 얼굴을 박고 먹었던 음식을 모두 쏟아 냈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것에서 냉기가 느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속에 든 것을 죄 게워 낸 후, 비틀거리며 세면대 물을 틀었다.

    “하아…….”

    거울에 비친 한이결의 얼굴은 처참했다. 창백한 피부와 입술은 잔뜩 마르고 갈라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토했음에도 여전히 불편한 속에 허리를 숙이며 묶인 손목을 내려다봤다.

    ‘능력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아무래도 그때 억지로 삼킨 약이 굉장히 강한 셔터 아이템인 듯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능력을 쓰지 못하는 데다 에드워드와 멀어지기까지 했으니, 최악이었다. 최소한 사마엘이 에드워드에게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곁에 있어 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입을 헹구는 김에 세수까지 해 버린 나는 곧장 문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지만, 예상대로 잠겼는지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하지. 혹시나 해서 테이블 근처에 있는 협탁 서랍을 다 열어 봤지만,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침대와 화장실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방 안을 보고 있으려니 두통이 일었다.

    에드워드가 걱정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문을 부수거나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

    그때, 고민하는 내 시선에 테이블 의자가 들어왔다. 잠시간 의자를 바라보다 화장실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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