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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22)화 (122/394)
  • 122화 

    흐릿한 의식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감각과 함께 갈증이 일었다.

    “…한이결 씨. 정신이 드세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 어깨를 붙잡고 조심히 흔들던 이는 다름 아닌 에드워드였다.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던 에드워드는 내가 깨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워드 씨.”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침착하게 대답하며 내 상태를 확인했다. 기절하기 직전, 식은땀을 흘리고 바닥을 굴러 지저분했던 몸은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고, 아무 무늬 없는 새하얀 티와 면바지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목에는 쇠사슬이 연결된 커다랗고 두꺼운 목줄이 채워져 있었고, 양손은 앞으로 모인 채로 수갑에 묶여 있어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기운마저도 아까 먹은 구슬의 힘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이대로는 능력을 쓸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천사연에게 받았던 A급 기운 회복 팔찌 아이템과 일회용 무효화 반지 아이템은 아직 내게 있었다.

    ‘어째서 아이템을 가져가지 않은 거지?’

    강승건이야 그럴 정신이 없었다지만…. 사마엘이 내가 가진 아이템을 발견했는데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반지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나는 시선을 돌려 에드워드를 살폈다. 정신 지배의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니, 아무래도 걱정이 들었다. 목의 상처는 다행히 피가 멈춰 있었다.

    “에드워드 씨,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불편한 곳은요?”

    내 물음에 에드워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전 멀쩡합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정신 지배를 당하셨으니까요.”

    정신 지배라는 단어에 움찔 어깨를 떤 에드워드가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리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닙니다. 애초에 노려지고 있던 것은 저인 걸요.”

    에드워드의 자책을 막으며 쓰게 웃었다.

    “말려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이결 씨…….”

    나와 에드워드 사이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암울해졌다. 차라리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대화를 하는 편이 나아 보여,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에드워드 씨. 어쩌다가 정신 지배를 당하게 됐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에드워드가 눈동자를 굴리며 지난 일을 회상했다.

    “한국 공항에 도착한 후에, 천사연 씨가 보내 준 경호원들을 만났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누가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음료수를 손에 조금 쏟았어요.”

    “아.”

    “따로 닦을 만한 것도 없고, 너무 끈적여서 가까운 화장실에 들렀습니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에드워드가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미간을 굳히며 말했다.

    “화장실에서 사마엘을 만났군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엘을 만나서 바로 정신계 능력에 당하고, 공간 이동 아이템을 숨긴 채로 경호원들과 함께 길드로 온 거겠지.

    “미안해요. 제가 너무 안일했어요. 경호원을 멀리하는 게 아니었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에드워드 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에드워드가 주변 걱정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를 돌며 아무 대가 없이 많은 이들을 돕고 있다는 클로에의 설명이 떠올랐다. 에드워드는 평소처럼 행동하고, 선택했을 뿐이다. 나를 만나러 오는 길이 아니었다면 별문제 없이 손을 씻고 공항을 빠져나왔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명치 부근이 무겁고 배 속이 따끔거렸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에드워드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모두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묶은 손을 움직여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 에드워드에게 내밀었다.

    “에드워드 씨.”

    “네?”

    “이거 끼고 계세요.”

    손바닥 위에 올려진 반지를 본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혹시 일회용 무효화 아이템인가요? 제가 만든.”

    “맞습니다. 이번에 클로에 부마스터를 만나면서 받은 아이템입니다.”

    에드워드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반지를 끼워 주었다. 손가락에 끼워져 반짝이는 반지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에드워드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내게 물었다.

    “잠깐만요. 반지를 왜 제게?”

    “잘 들어요, 에드워드 씨.”

    벽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사마엘, 우리를 끌고 온 놈의 이름입니다. 알다시피 정신 지배와 감정 지배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

    샹들리에 빛에 불길하게 번들거리던 새하얀 가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긴장감에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설명을 이었다.

    “놈은 능력을 쓰기 전에 엄지와 중지를 튕겨 소리를 냅니다. 그 타이밍에 잘 맞춰서 반지를 쓰셔야 해요. 또 정신 지배를 당하지 않도록.”

    “그, 그럼 한이결 씨는요?”

    “제게는 사마엘의 능력이 통하지 않습니다.”

    통한다고 하더라도 반지는 에드워드에게 넘겼겠지만. 어쨌든 좋은 기회인 것은 확실했다.

    “한 번만이라도 지배를 피한다면, 그 뒤는 제가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제 말대로 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얼굴을 일그러뜨린 에드워드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그도 이해한 것이다. 자신이 사마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내 상황도 조금이나마 편해진다는 것을.

    전투를 하지 못하는, 어린 제작 능력자를 인질로 끌고 온 사마엘의 의도가 무척이나 혐오스러웠다. 반지가 끼워진 손을 보며 불안해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데, 새하얀 방문 너머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악!”

    “헉…!”

    겁에 질린 에드워드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나 또한 급히 일어나 에드워드의 앞을 막아섰다. 철그렁, 벽에 연결된 굵은 쇠사슬이 크게 흔들렸다.

    “끄으으, 으윽! 으아아!”

    “죽여 줘…. 죽여 줘…!”

    “흐흑, 저리 가! 으으!”

    쿵, 콰앙! 쿠궁!

    마구잡이로 얽힌 비명과 동시에 무언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굉음으로 바닥이 옅게 진동했다. 그 소리를 전부 들으면서도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방 안에서 나갈 수 없는 나와 에드워드 마음속에 두려움이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다.

    “이,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차갑게 식은 양손으로 주먹을 쥐며 문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모든 소리가 뚝 그쳤다. 뒤에 서 있는 에드워드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올 만큼 기괴한 적막 사이로, 느긋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뚜벅, 뚜벅.

    깔끔하고 가벼운 구두 굽 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낀 에드워드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마엘. 그가 오고 있다.

    쇠사슬을 붙잡아 강하게 당겼지만, 벽에 고정된 이음새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목에 끼워진 두꺼운 가죽 목줄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는 묶여 있지 않으니 내가 시선만 잘 끈다면 도망치게 할 수 있다.’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아봤다. 자그마한 키에 앳된 모습의 에드워드를 보니까 마음 한구석이 납을 단 듯이 무거워졌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무서운 경험을 하게 한 나 자신이 사마엘만큼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에드워드 씨. 반지를.”

    내 말에 에드워드가 황급히 반지 낀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허밍 소리가 들려왔다. 절그럭, 바닥에 쇠사슬이 끌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예상대로 사마엘이 나타났다.

    “깨어나셨군요.”

    기절하기 전과는 다른, 새하얀 티셔츠에 짙은 붉은색의 정장 재킷을 걸친 사마엘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목 끝까지 차오른 긴장감으로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당신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묶어 두고 싶었어요.”

    사마엘이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새하얀 장갑이 끼워진 손으로 박수를 두 번 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런데… 왜들 그러고 계십니까?”

    싸늘한 내 시선을 마주한 채로 한참이나 침묵하던 사마엘이 뒤늦게 아, 소리를 내며 이해했다는 듯이 웃었다.

    “과한 걱정을 하시는군요, 한이결 능력자. 제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

    “저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린아이 따위, 인질이 필요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굳이 데려오지도 않았을 텐데.”

    사마엘의 검은 구두가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사마엘의 행동에 급히 에드워드를 뒤로 밀쳐 내며 그를 노려봤다.

    시선이 자꾸만 사마엘의 손으로 향했다. 설마 또 능력으로 에드워드를…….

    “그쪽은 흥미 없다니까.”

    바싹 굳은 내 표정을 보고 픽 실소한 사마엘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턱을 까딱였다.

    “꿇으세요.”

    “뭐?”

    “꿇으시라고.”

    웃음기가 깃든 얼굴 그대로 사마엘이 내게 명령을 내렸다. 몇 초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 있던 나는 곧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어금니를 강하게 문 채로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하, 한이결 씨….”

    뒤에서 물기 젖은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항은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칠 틈이 날 때까지, 사마엘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순순히 무릎을 꿇자, 가면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나지막이 허밍을 하던 사마엘이 입을 열었다.

    “물 가져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열린 방문 사이로 여자와 남자 한 명이 손에 생수병을 들고 걸어왔다.

    “헉!”

    “……!”

    그들의 가면을 쓰지 않은, 맨 얼굴을 본 에드워드가 숨을 들이켜며 경악했다. 나 또한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의 이마는 무언가로 여러 번 찧은 것처럼 짓물러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생수병을 들고 있는 손의 모든 손톱이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었다.

    정신 지배 능력에 당해 아무 표정 없이 넋을 놓은 상태로 사마엘 곁으로 다가온 여자에게서 생수병을 뺏은 사마엘이 내 턱을 잡아챘다.

    “큭…!”

    “목마르죠, 한이결 능력자?”

    사마엘의 엄지손가락이 입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이빨을 뽑아낼 것처럼 억센 힘으로 내 입을 강제로 벌린 사마엘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기울였다.

    “헉, 쿨럭! 우윽… 컥!”

    물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강제로 벌려진 입 안과 코를 지나 물이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이렇다 할 반항 한번 못 해 보고 물세례를 받아 낸 나는 얼굴이 잡힌 그대로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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