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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21)화 (121/394)

121화

31. 아슬아슬하게

침묵이 내려앉은 잠깐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아무 말 없이 우뚝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마엘이 보였다.

“……?”

뭐지? 새하얀 가면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불안감이 더욱 증폭했다. 어깨를 굳히며 식은땀만 흘리는데, 얼마 가지 않아 사마엘이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토록 싸고돈 이유가 있다 이건가.”

“뭐?”

“얘들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사마엘의 부름에 근처에 서 있던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이 동시에 내게로 몰려들었다.

수십 명의 구두 굽 소리가 홀에 울리며 주변이 사람 그림자로 물들었다. 나를 둘러싼 검은 가면들 너머로 시선이 느껴졌다.

“붙잡아.”

“예.”

수십 명이 동시에 대답하며 손을 뻗었다. 온 방향에서 내게 쏟아진 손에 순식간에 양팔과 다리가 붙잡혀 몸이 땅에 짓눌렸다. 마치 전시된 곤충 표본처럼 벌려진 팔과 다리, 허리에 손길이 닿아 왔다.

“뒤져 봐. 어느 한 곳도 놓치지 말고.”

“예.”

그 명령에 수십의 손이 내 몸을 쓸고 만지기 시작했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손길에 오싹한 소름과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거 놔! 시발, 그만… 흐읍!”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입을 막아 왔다. 벗어나려고 움찔거리자, 내 다리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던 사마엘이 가면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뭐지? 아이템 사용 흔적은 없는데.”

“사마엘 님.”

가슴까지 내려오는 장발의 여자가 쥐고 있던 무언가를 사마엘에게 건넸다. 내가 착용하고 있던 팔찌와 반지 아이템이었다.

“음.”

팔찌와 반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사마엘이 픽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돌려줘. 갖고 있어 봤자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이니까.”

“예.”

“이만 놔줘라.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더 귀한 손님이 온 것 같으니.”

즐거운 음성에 내 몸을 움직일 틈 없이 붙잡고 있던 손길이 단숨에 떨어져 나갔다. 있는 대로 긴장하고 있던 나는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서 발버둥 치듯 뒤로 물러섰다. 극도의 피로가 정신을 잠식하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스스로 내뱉는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한이결 능력자.”

잔뜩 지친 나를 내려다보던 사마엘이 한 걸음 다가왔다. 아무리 애써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에게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허억, 헉… 윽!”

어떻게든 멀어지려는 내 앞에 선 사마엘이 다리를 들어 가슴을 밟아 왔다. 가슴 정중앙을 내리누르는 새까만 구두가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가면과 함께 번들거리며 빛났다.

“어딜 봐도 A급이 확실한데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라…. 기분 더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재밌기도 하군요.”

그 말에 나 또한 당황했다. S급 강승건을 휘둘렀던 사마엘의 능력을 내가 막아 냈다고?

‘……대체 어떻게?’

그 순간, 이전에도 겪었던 일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SS급 게이트에서 릴리스의 능력을 피해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던 때와 S+급으로 등급이 올라간 벤시의 주술을 피해 낸 순간. 천사연마저도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던 기묘한 그 상황이, 이번에도 반복되고 있었다.

“뭐, 괜찮습니다. 이것도 나쁘지 않죠. 능력을 써서 당신을 제 입맛대로 굴리면 물론 편하기야 하겠지만, 이건 이거대로 아주 흥미로우니까.”

“무슨….”

“끌고 와.”

이어진 명령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아닌, 기절해 있는 에드워드를 향해 가면을 쓴 이들이 몰려들었다. 불길함을 감지한 나는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건드리지 마!”

내 외침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드워드의 두 팔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끌려온 에드워드에게로 고개를 돌린 사마엘이 발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한이결 능력자. 제작자를 살리고 싶습니까?”

고작 발 하나에 짓밟혀 있을 뿐인데도, 도저히 사마엘의 아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슴을 짓눌러 오는 고통에 헐떡이며 가면에 새겨진 초승달 모양의 검은 입을 올려다봤다.

“당신도 알다시피, 의식조차 없는 이 어린 제작자의 목숨 따위는 지금 당장이라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 발밑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당신보다도 더 쉽게 죽어 버릴 수 있겠군요.”

“…원, 하는 게 뭐야.”

“글쎄.”

가볍게 대답한 사마엘이 정말 궁금하다는 어투로 물어 왔다.

“제 구두라도 핥으시겠습니까?”

“뭐?”

“무릎을 꿇고, 등을 굽혀서…. 복종의 뜻을 담아 제 구두를 핥으십시오. 혹시 모릅니까? 그 갸륵한 정성에 감동해서 이 어린 제작자는 몸 성히 보내 줄지.”

나긋하게 이어지는 말에 허탈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구두를 핥으라고? 나는 사마엘의 발목을 움켜잡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할게.”

“…….”

“에드워드를 보내 준다는 약속만 지킨다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어.”

“흠.”

사마엘이 아무런 말 없이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내 의중이 뭔지 파악하려는 거겠지. 꿀릴 것 없었으므로, 가면 너머에서부터 느껴지는 시선을 조용히 받아 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내가 구두를 핥아서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면 못 할 것 없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내게 큰 도움을 주었던 에드워드이니, 그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나와 엮이지 않았으면 에드워드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다.’

상황을 되짚을수록 음울한 감정이 이성을 갉아먹었다. 지치고 피로한 몸에 우울감이 퍼져 나가자, 그저 다 포기하고 혀를 베어 물거나 손목을 그어 버리고 싶었다. 아주 오랜만에 든 충동이었다. 만약 에드워드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시시하군. 뭐, 알겠습니다.”

순순히 꼬리를 내린 내 모습이 영 재미없는지, 심드렁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대답한 사마엘이 발을 치웠다.

“1층 7번째 방으로 데려가.”

“예.”

마지막 명령을 내린 사마엘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사마엘과 내 사이로 검은 가면을 낀 이들이 몰려와 나를 억지로 일으켰다. 식은땀으로 차갑게 식은 몸이 축 늘어졌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나와 함께 끌려가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어디로 보내는지, 봐야 하는데.’

나와 다른 장소에 가둬 둘 수도 있으니 에드워드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한계에 치달은 몸은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천근만근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결국 이겨 내지 못한 나는 고개를 숙이며 몰려오는 어둠을 받아들였다.

***

뚜벅, 뚜벅. 여러 명이 내는 구두 굽 소리가 시끄럽고 거칠게 울렸다. 새하얀 병원 복도를 지나 목적지에 다다른 천사연이 망설임 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

“마스터.”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던 박건호가 뒤를 돌아봤다. 박건호뿐만 아니라 민아린과 김우진, 클로에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천사연을 바라봤다.

“상황은?”

매고 있던 검은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어낸 천사연이 묻자, 민아린이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피를 워낙 많이 쏟은 데다, 일반적인 검이 아닌 아이템에 찔린 상처라 당장 깨어나는 건 어려워요.”

수행원들을 내보내고 병실 문을 닫은 우서혁이 보고했다.

“사계 길드 마스터에게 답변이 왔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럼 권정한은 권지훈 마스터가 도착하면 맡기도록 하지.”

“천사연 마스터.”

클로에가 물기 어린 눈으로 천사연을 바라봤다. 병실 불빛에 반짝이는 녹안에는 불안함과 걱정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 거지?”

“…….”

“당신이 자리를 비운 것도, 그 틈에 에디가 도착한 것도, 다 계획된….”

“그래.”

천사연이 간결하게 답했다. 게이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도착한 N11 구역의 게이트는, 역시나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대신 3시간가량의 기억을 잃어버린 구역 관리인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천사연을 맞이했다.

당황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천사연의 얼굴을 잠시간 응시하던 클로에가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혹시 예상했어? 이렇게 될 거라고?”

벼려진 것처럼 날카로운 공기가 주변에 감돌았다. 미간에 힘이 들어간 채로 긴장한 박건호와 우서혁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니지? 내가 오해한 거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클로에의 말을 듣던 천사연이 여상히 말했다.

“그렇다면?”

“천사연 마스터!”

얼굴을 처참히 일그러뜨린 클로에가 소리쳤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에디, 그 아이가 정신 지배를……!”

“정신 지배를 당한 에드워드 애스너를 살리기 위해 한이결이 적에게 제 발로 걸어 들어갔지.”

클로에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낸 천사연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예상했다 한들, 모든 일을 막아 낼 수는 없다. 명심해, 클로에 부마스터. 네 소중한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한이결이 내린 선택을.”

“…….”

클로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천사연이 창백하게 질린 뺨을 하고 입술을 깨무는 클로에에게서 등을 돌렸다.

“권지훈 마스터가 도착할 때까지는 병실을 지켜, 우서혁. 길드에 연락해서 쓸 만한 정신계 직원을 병원에 배치하고.”

“마스터? 어디 가십니까?”

한 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박건호가 질문했다.

“설마 지금 한이결 능력자 찾으러 가십니까?”

천사연의 생각을 눈치챈 박건호의 물음에 지금껏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던 김우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스터, 저도…!”

“아니.”

천사연의 새하얗고 단단한 손이 망설임 없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김우진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천사연이 이어 말했다.

“한이결에게는 나 혼자 간다.”

“하지만 마스터!”

“그만, 김우진.”

따라가려는 김우진을 박건호가 막아 세웠다. 한숨을 푹 내쉰 우서혁이 입을 뗐다.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한 명 정도는 데려가시는 게….”

“오히려 번거로울 뿐이다.”

상대는 강승건 마스터의 정신을 주물렀던 정신계 능력자. 확실히, 다른 이가 끼어들어 봤자 상황만 복잡해지겠지.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병실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던 천사연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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