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예. 아무래도 흔치 않은 능력이니까요.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럴까요? 사실 엄청 간단하답니다.”
클로에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두 분도 아시겠지만, 저는 상대방의 기운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한이결 능력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능력을 써서 기운을 확인했습니다. 아까 민아린 힐러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빠르게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제약이 적을수록 등급이 높죠. SS급이라는 등급에 맞게 저는 아무런 부작용도, 한계도 없어요.”
싱그러운 웃음을 보인 클로에의 눈에 반짝거리는 빛 가루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것으로 클로에가 능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항에서 마주쳤을 때 봤던 그 빛은 착각이 아니었던 건가.
“사람마다 기운의 색부터 크기까지, 모든 게 다릅니다. 완벽하게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운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도 가능하죠.”
“색과 양…. 그럼 제 기운의 색도 보이시나요?”
흥미가 차다 못해 넘치는 얼굴로 설명을 듣던 민아린이 적극적으로 질문을 해 왔다. 그런 민아린이 귀엽다는 듯, 클로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민아린 힐러는 봄날의 공기처럼 아주 따듯하고 부드러운 살굿빛이에요. 크기는 보통 A급 힐러들보다 훨씬 크군요.”
민아린이 아닌 다른 힐러의 치료 능력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터라, 클로에의 말은 공감이 갔다.
“확실히 민아린 힐러님 실력이 대단하긴 하지.”
“맞습니다.”
박건호와 내가 한마디씩 하자, 민아린이 쑥스러움으로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박건호 팀장은 전에 얘기해 줬지만, 아주 강렬하고 선명한 하늘색이에요. 우서혁 비서는 한여름 숲을 연상케 하는 초록색이고… 한이결 능력자. 당신은 어두운 푸른색입니다. 남색에 가깝죠.”
빈 찻잔을 내려놓은 클로에가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사실 느낌은 더 밝은색이 어울릴 것 같았는데. 지금도 나쁘진 않아요.”
그제야 클로에가 어떤 식으로 사람의 기운을 판별하는지 감이 왔다. 한이결의 기운은 어두운 푸른색인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한이결이나, 다른 이들보다는 궁금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선뜻 묻기가 쉽지 않았다. 입술만 달싹이며 갈등하는 내 모습에 클로에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콧잔등을 찡긋 움직였다.
“한이결 능력자.”
“예?”
“혹시 천사연 마스터의 기운이 궁금한가요?”
“…….”
젠장. 눈치도 빠르시지. 머쓱함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목덜미만 쓸어내리는 날 보던 박건호가 놀리듯 말했다.
“참,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런 거 아닙니다.”
“솔직히 마스터의 기운은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내 옆에 앉아 얌전히 차를 마시던 권정한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한마디 얹었다.
“다들 기대하는 와중에 뻔한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천사연 마스터는 당연하게도 붉은색이에요. 보석처럼 아주 아름답고 선명한 핏빛이죠. SS급이니, 기운의 크기도 다른 이들과 비교 못 할 만큼 대단하고요.”
역시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밝은 얼굴로 설명하던 클로에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가를 매만졌다.
“…분명 그랬는데, 이틀 전에 봤을 때는 조금 달라졌더군요. 색이 좀 더 깊고 진해졌고, 기운도 더 커졌어요.”
“그래서 제게 물어보신 겁니까? 마스터에 대해서.”
“맞아요.”
박건호의 물음에 수긍한 클로에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천사연 마스터가 숨기려고 작정하면 알 방법이 없으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물어본 거예요. 어쩔 수 없죠. 당사자가 말 안 하는데, 여기서 더 파고들 수도 없고.”
혀를 찬 박건호가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합니다. 마스터를 오래 봐 왔지만, 아직도 속을 모르겠으니.”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귀엽기라도 했는데.”
클로에가 진심으로 속상하다는 듯이 눈썹 끝을 축 내렸다. 천사연이 귀엽다니…. 그보다 어린 천사연이라. 상상조차 안 되는데.
차마 끼어들 수 없는 클로에와 박건호의 대화를 조용히 듣는데,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에디가 도착했나 보네요.”
“제가 열어 드리겠습니다.”
가장 바깥쪽에 앉아 있던 권정한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권정한의 반듯한 등을 바라보다 클로에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럼 에드워드 제작자도 아테나 길드의 소속입니까?”
“어머, 아니에요. 에디는 한이결 능력자와 마찬가지로 무소속이랍니다. 여러 나라를 돌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요.”
“그렇죠? 저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위험하지 않도록 항상…….”
“쿨럭!”
클로에의 말 사이로 권정한의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응접실의 문을 연 채로 비틀거리는 권정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권정한 씨?”
“크, 으윽….”
“기다려, 한이결!”
무언가를 눈치챈 박건호가 내 어깨를 붙잡은 것과 동시에, 권정한의 몸이 아래로 쓰러졌다. 바닥 위로 흩어진 새빨간 핏자국을 작은 발이 짓밟았다.
피가 묻은 단검을 든 채로 서 있는 이는 금발의 소년,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의 커다란 눈은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초점이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에디!”
에드워드를 발견한 클로에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처럼 외쳤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몸이 미약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한이결. 침착해.”
내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알아챈 박건호가 에드워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낮게 속삭였다. 그의 말대로 가파르게 뛰는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권정한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쿨럭, 큭….”
피가 섞인 기침을 뱉어 낸 권정한은 복부를 움켜쥔 채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제대로 찔린 배에서는 질척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천천히 나와 박건호, 민아린과 클로에를 차례로 돌아본 에드워드가 평온한 어투로 인사를 내뱉었다. 멍한 눈에 비해 입만 웃고 있는, 기이한 표정이었다.
“하하,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표정들이… 제법 볼만하네.”
“…당신, 누구야?”
무서울 만큼 얼굴을 굳힌 클로에가 입술을 깨물며 에드워드를 노려봤다. 나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지금 에드워드의 정신은 누군가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기는.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던 에드워드 애스너입니다.”
마치 노래를 부르듯 대답한 에드워드가 들고 있던 단검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국내 1위 길드라고 하길래 기대를 좀 했는데, 이렇게 허술해서야. 손님이 제정신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말이죠.”
으흠, 흠. 허밍을 읊조리며 여유롭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에드워드가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는 우리를 바라봤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보기와 달리 여유가 많지는 않아서. 우리 쉽게 쉽게 갈까요?”
“원하는 게 뭐지?”
피가 묻은 단검을 의식한 채로 클로에가 날카롭게 물었다. 클로에는 혹여 저 단검이 에드워드, 본인에게로 향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는 박건호도 급히 꺼내 든 쇠구슬을 쉽사리 던지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방은 클로에의 동생인 에드워드다. 응접실 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들을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에드워드의 눈치를 살폈다.
“뻔히 알면서 뭘 물으십니까, 아테나 부마스터.”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은 에드워드의 흐릿한 눈이 나를 향했다. 그 어두운 눈동자에 무심코 뒷걸음질 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 하나 끌고 가려고 이딴 짓을 해?”
“그렇죠. 이 정도 노력을 들일 값어치는 있으니까.”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차갑게 식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또다. 또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온몸에 피가 발밑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한이결.”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박건호가 붙잡은 어깨를 살짝 흔들었지만, 아무것도 와닿지 않았다. 귓가에 여러 사람의 비명이 마구잡이로 들려오고, 주위에 어둠이 몰려들었다.
침착함을 잃고 환청과 환각에 빠져 식은땀을 흘리는 내 모습에 에드워드가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검을 거리낌 없이 목에 갖다 댔다.
“에디!”
새하얗고 여린 목에 날카로운 검날이 닿자마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클로에가 차마 달려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술만 짓씹었다.
“나와 함께 갑시다, 한이결 능력자.”
“…….”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이 아이와 경호원의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지요.”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목에서 흐르는 피의 양도 늘어났다. 주륵,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에 클로에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B급이기는 해도, 아이템 검입니다. 이런 연약한 목덜미는 단번에 끊어 낼 수 있죠.”
나는 에드워드의 목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응시하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애쓰는 권정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선택하십시오.”
새하얗게 질린 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권정한의 상태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심각했다. 내가 어떤 답을 내릴지 눈치챈 권정한이 눈을 힘겹게 뜨며 입을 열었다.
“허억, 헉… 안, 됩니… 한이결 능력자님….”
고민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박건호의 품에서 벗어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쪽 뜻대로 할 테니까… 검을 내려놔.”
“이결 씨!”
굳은 채로 상황을 살피던 민아린이 내 결정에 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족스러운 듯 눈꼬리를 휘어 웃은 에드워드가 단검을 내리며 말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한이결 능력자.”
“…….”
“저도 불필요한 살인은 딱 질색이라서. 당신과 저는 여러 부분에서 참 잘 맞을 것 같군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에드워드가 내게 손짓했다.
“뭐 합니까, 거기 가만히 서서. 제 곁으로 오십시오.”
내가 한숨을 삼켜 내며 에드워드에게로 다가가려 하자, 박건호가 사나운 얼굴로 다시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한이결.”
“팀장님.”
“상대는 정신계 능력자다. 함부로 가까이 갔다가는….”
“가야 합니다.”
머뭇거렸다는 이유로 다시 단검을 들까 봐 초조함이 일었다. 다소 거칠게 박건호의 손을 뿌리치며 에드워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보며 에드워드가 단검을 다시 한번 빙글 돌렸다.